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5)
015 갑질
“대한전력 배전기획처 박아름입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뭐 여쭤 보려고 합니다.”
“네. 말씀하세요.”
“저는 변압기 회사를 하고 있는데요, 이번에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는데, 대한전력에서 채택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담당 부서 연결해 드릴게요.”
와! 싸늘하다. 수화기에서 비수가 날아와 귓구멍에 꽂힌다. 이게 공룡 공기업의 힘인가?
“네, 배전기기과 최철민입니다.”
“…….”
“네. 담당 부서 연결해 드릴게요.”
아오! 이 연결병 걸린 놈들아!
“네. 배전계획과 송정길입니다.”
내가 한 말을 전했을 리 없으니 똑같은 말을 또 했다.
전화 돌리기, 정말 짜증 나는 일이다. 기껏 다 얘기하고 나면 담당이 아니라고 돌리고, 또 얘기하면 자기도 담당이 아니라고 돌리고, 그러다 전화 끊기면 고등교육을 받은 품격 있는 현대인이라도 쌍욕이 벌컥 나온다. 그나마 전화 안 끊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야 하나. 아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네, 저희가 주상변압기 신제품 개발에 성공했는데요, 기존 일반형주상변압기 대비 효율도 크게 개선됐고 크기도 30퍼센트가량 줄였습니다. 이것이 채택되면 대한전력에 큰 이익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혹시 연구 과제로 진행 중인 변압기 말하는 겁니까? 두성전기 직원이세요?”
이놈 이거 아주 건성건성 들었구만.
“아니요. 아까 프라임일렉트릭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신생 회사입니다. 연구 과제랑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개발에 나섰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가능한가요? 희한한 일이네. 잘 이해가 안 되긴 하네요. 언제 시간되면 관련 자료 챙겨서 와 보시죠. 말 나온 김에 다음 주 괜찮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제가 제대로 못 들어서 그런데 성함이랑 핸드폰 번호 좀 부탁드릴게요.”
“4223번으로 전화 주시면 됩니다. 핸드폰 번호는 뭐…… 그냥 직통 번호로 전화 주세요.”
뭔가 애매하게 무시당한 느낌이 우뇌를 강하게 타격했지만, 그래도 보고 얘기하자고 한다. 사기꾼 대하는 듯한 뉘앙스에 살짝 짜증이 났지만, 일단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과장이란 사람은 황당했을 것이다. 두성전기가 대한전력의 연구 과제를 수행하고 있는데, 듣보잡 기업이 불쑥 나타나서 자기가 그것을 개발했고 채택해 달라고 하니 말이다.
자칫 어설프게 대응했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겠다 싶다. 설마 문자님께서 두성전기 설계 뽀려다가 준 것은 아니겠지? 소문엔 두성이 아직 개발 못했다고 하니, 설마 아니겠지.
문자님에 대해서는 일체의 의심을 안 하기로 했다. 정체가 무엇인지, 왜 나한테 이런 일을 시키는지 등등에 대해서 말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할 생각이다.
가만있어도 황금알을 낳아 주시는데, 궁금하다고 배를 쩌억 갈라 버릴 필요가 없다. 솔직히 지금도 대체 정체가 뭘까 궁금하긴 하다. 언젠가 알려 주겠지 뭐.
이제는 혁신산단을 조질 차례다.
“네, 나주혁신산단 이정용입니다.”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지정수입니다.”
“아이고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 못해요. 함흥에 차사를 보냈는데 돌아오지가 않네요.”
늦어도 내년 초에 공장 착공 가능하게 해 달라고 얘기했건만, 아직까지 답변이 없으면 내가 화가 나겠지? 우리 잘하자. 응?
“하하하. 공무원들 일 처리가 그렇잖아요. 긍정적으로 밀어붙이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시죠.”
“저 다음 주에 나주 내려가는데 한번 들르겠습니다. 말 안 듣는 공무원 있으면 불러 놔 주세요.”
“여기 오신다고요? 아이고야. 아…… 알겠습니다. 제가 오시기 전까지 뭐가 됐든 성과를 만들어 놓겠습니다.”
보채는 것을 정말 싫어하지만, 공무원이 끼여서 일이 한없이 늘어질 때는 어쩔 수 없이 보채야 한다. 이것들은 들들 볶고 채찍질도 하고 꽹과리도 쳐 줘야 일을 한다. 그래도 안 되면 귀에다 태평소라도 불어야 한다.
내가 단방에 매출 천억짜리 회사로 키워서 지역민들 마구 채용하겠다는데! 어! 어디! 공무원들이 뭉그적거려! 어! 시장이랑 밥도 먹고 사우나도 하고 다 해야겠구만 이거. 이정용 과장은 아군으로 만들어 두는 것이 좋으니 총질은 살짝만 해 두자.
* * *
“한 과장. 가을인데 단풍놀이나 다녀옵시다.”
“사장님요. 또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젠 무서워지려고 한다.”
“그래? 그럼 나 혼자 나주 갔다 와야겠네. 나주 가면 좋은 곳이 많던데…….”
“지금 출발할 거야? 난 다 준비됐어. 가시죠, 사장님. 제가 안전 운전으로 모시겠습니다.”
덕준이가 호기롭게 나주까지 운전하겠다고 하더니, 결국 내가 운전대를 잡았다. 그동안 면허를 장롱 속에 고이 간직해 두셨단다. 아오!
“차가 아주 좋습니다요, 사장님.”
“과자 부스러기 떨어트리면 뒤진다잉.”
“네, 사장님! 손가락까지 쪽쪽 빨아 먹고 있습니다.”
“특허는 좀 걸린다지?”
“어. 일단 출원까지 마쳤는데, 심사가 오래 걸린대. 변리사가 우선 심사 제도인가? 그거 하면 좀 빨라진다고는 하는데 그것도 신청한 사람이 워낙 많아서 꽤 걸린대야.”
“이야, 우리나라가 이리 기술이 훌륭한 곳이었냐? 그냥 특허 없이 야매로 하는 줄 알았더니 안 그러네.”
“아이고 중쏘기업 사장님요. 사업을 대국적으로 하십시다. 언제까지 중소 마인드로 하실 겁니까?”
“너 이 새끼, 휴게소 안 들르고 바로 간다?”
정안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커피 한잔 하고 담배만 피우고 바로 출발하기로 했다.
그러나 휴게소 입구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오징어버터구이 냄새는 우리의 의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정나미 없게 오징어버터구이만 먹을 수 있겠는가! 핫바도 하나씩 먹어 줘야지!
핫바 먹다가 덕준이가 급신호 왔다고 화장실로 달려가는 통에 나주까지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사업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금이라고 하던데, 고속도로에 24K짜리로 마구 뿌려 버렸다.
“변비 걸렸다고 난리더니, 시원하게 뽑아내서 좋겠다야.”
“와! 진짜 장난 아니었어. 입구에 막힌 것 하나가 빠지니까 와…… 감동이었어 진짜.”
“부연 설명 하지 마라.”
드디어 대한전력 본사에 도착했다.
“이제부터 근엄한 척해라.”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개소리하는 것 봤냐! 대본 연습한 대로 존나 뭐 있는 척할 거니까 걱정 마셔.”
“그래그래. 자료 잘 챙기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있어. 전화 좀 하게.”
-빛이 있어 세상은 밝고 따뜻해~.
대한전력 특유의 신호대기음. 언제 들어도 참 오글거린다. 분명 임원급 정도 되는 높은 분이 자식 놈 음악 한답시고 밀어붙였겠지. 이 관공서와 공기업 사이를 애매하게 왔다 갔다 하는 꾸리꾸리함. 이건 분명 손주 볼 어르신들이 좋아할 감성이다!
“네, 대신 받았습니다. 배전계획과 박철수입니다.”
대신 받아? 어째 예감이 불길한데? 불길한 예감은 항상 들어맞던데…….
“안녕하세요. 프라임일렉트릭 지정수라고 합니다. 송정길 과장님하고 오늘 뵙기로 했는데요.”
“송 과장님요? 서울 사무소 출장 가셨는데요. 약속 잡은 것 맞습니까? 과장님께서 별 얘기 없으셨는데…….”
이런 개…… 아오. 그 새끼 핸드폰 번호 안 알려 줄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니놈이 오늘 보자고 했다고!
“하아. 그러십니까? 급한 용무이셨나 봅니다. 혹시 언제 복귀하시나요?”
“아마 이번 주는 계속 서울에서 일 보실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인데요?”
이런 썅…… 이렇게 사람을 무시할 수 있나! 송 과장 그놈이 나를 허접 사기꾼으로 본 것이 분명하다. 뚜껑이 활짝 열려 버렸다. 그런데 철수야. 넌 뭔데 이리 전화 받는 태도가 띠껍냐? 이것들이 아주 가지 가지 하네 이거.
“아니, 저랑 오늘 만나기로 약속하셨기에 인천에서 여기까지 내려왔는데,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저야 모르죠. 과장님한테 직접 연락해 보시든지요.”
이것들이 진짜 싸가지를 곰탕에 말아먹기라도 했나? 화가 보글보글 끓어올랐지만, 아닌 척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더 짜증이 난다.
“그럼 핸드폰 번호를 알려 주시죠.”
“모르세요? 제가 알려 드릴 수는 없네요. 그나저나 무슨 일인데요?”
참자, 참아.
“저희가 신제품 관련해서 자료를 좀 드리려고 약속을 잡았던 것인데요. 과장님 안 계시는데, 제가 또 오기는 그렇고, 대신 건네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그러죠 뭐. 안 그래도 나갈 참이었으니까 제가 로비로 나가겠습니다.”
“네,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양팔 벌려 환영할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홀대는 좀 아니지 않나? 매출 몇십 조짜리 거대 공기업이면 이래도 되는 건가?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든다고 하더니, 나쁜 놈들!
로비에서 화를 식이며 표정 관리에 안간힘을 쓰고 있자니, 직원 하나가 내려와 누군가를 찾는 표정이었다. 대타로 만날 철수란 놈이구나. 기분 더럽지만 웃는 얼굴로 맞이하자.
“저기.”
“아! 좀 전에 전화하신 분?”
“네, 맞습니다. 프라임일렉트릭 지정수입니다.”
명함을 받더니 ‘언니 저 마음에 안 들죠?’라는 눈빛으로 살펴본다. 이해는 한다. 온갖 놈들이 들락거리며 허무맹랑한 소리를 했을 것이니 말이다. 이해는 해도 짜증 나는 것은 짜증 나는 것이다. 명함을 다 살피고 나서야 자신의 명함을 건네준다.
“박철수입니다.”
아나! 대리 주제에! 우리 회사 연구진들이 1년을 밤낮없이 연구해서 만든 귀한 기술을 고작 대리한테 알려 줘야 한다니!
그렇게 하기로 대본을 짰다. 그럴싸한 대본 짜 놓고 덕준이랑 얼마나 연습을 했는데……. 연구소장 한덕준 과장도 연기 기회를 놓치자 겸연쩍은 표정이다. 뭐 하나 순탄하게 되질 않는구만!
“이것은 저희가 개발한 고효율주상변압기 관련 자료입니다. 지금 대한 전력 연구과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저희가 먼저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자료 좀 봐도 될까요? 여기 있어 보면 알겠지만, 신기술 개발했다고 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서요.”
저 새끼 저거 봐라. 덕준아, 저거 비아냥거리는 것 맞지? 기분 더러운데 아시바리 걸어?
“여기 외형 도면과 특성 자료입니다. 보기 편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어차피 안 볼 것 알고 있다. 보는 척 대충 몇 장 훑어보고 말겠지. 그럴 줄 알고 제대로 만들어 왔다고! 보고 깜짝 놀라면 넌 실력 있는 직원일 것이야.
“음…… 네. 그래서 이것을 저희가 채택했으면 하는 것이죠?”
안 놀라는 것을 보니 그냥 토익 잘 봐서 들어온 놈이구만.
“네, 그렇습니다. 특허 출원을 내긴 했는데, 어차피 특허 고집할 이유도 없고요. 대한전력에서 채택해 주시면 바로 특허 개방할 생각입니다.”
“과장님 오시면 전달하겠습니다. 또 뭐 있나요? 없죠? 제가 바빠서요.”
“네,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관수 변압기는 유일한 수용가가 대한전력이기 때문에, 제품이 구매 대상으로 채택되면 특허를 개방해야 한다. 특허를 푼다고 해서 다른 업체들이 바로 따라 만들 수도 없으니 걱정할 것도 없다. 대한전력과 거래할 때 특허란 그저 우리가 이걸 처음으로 만들었다고 선언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저 토익 잘 봐서 들어온 대리한테 도면 준다고 한들 외형도뿐이라, 스파이가 훔쳐 가도 아무 쓸모가 없다. 외형도만 보고 특성치를 맞힐 수 있다면, 그런 기술을 갖춘 회사가 있다면 내가 이리 자신만만할 수 없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말 같지도 않은 상황에 기분이 팍 상해 버렸다. 화가 나서 더 이상 일하고 싶지 않았다.
온 김에 본사 건물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관련 부서 찾아가 명함이라도 돌리려고 했는데, 김이 쫘악 빠져 버렸다. 이런 것이 갑질이구나.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들이 이랬을 것이다.
자식들 키우기 위해서 자존심 버려 가며 어디서든 굽실거리며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부아가 치밀어 올라도 아닌 척하며 미소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퇴근 후에야 독한 소주를 털어 넣으며 그날 무너진 자존심을 추슬렀겠지. 그 기분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야, 덕준아. 어디 술이나 하러 가자. 오늘은 좀 취했으면 싶다.”
내가 어떤 짓을 당했는지 똑똑히 바라보며 붉으락푸르락하던 덕준이가 안면을 몰수하며 시시덕거리기 시작했다.
“오호, 우리 싸장님! 웬일이십니까? 술도 못 마시면서? 많이 화나셨어요? 그래, 술 진탕 마시고 빨리 털어 내자고!”
“진짜 화가 난다, 화가 나.”
“야, 지정수! 너무 열 내지 마. 앞으로 이런 일 숱할 건데 멘탈 잘 부여잡아야지. 그럴수록 우리가 존나게 회사 키워서 저런 놈들 찍소리 못하게 만들어야 하는 거라고. 저놈 존나 싸가지없긴 해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것 아녀? 오늘은 우리가 봐주자.”
“알아. 그런데도 짜증 나는 건 짜증 나는 거 아니냐?”
“이거 확실하다며? 그럼 됐어. 그 과장이라는 놈도 개새끼지만, 내가 지극정성으로 만든 자료 보면 우리를 달리 대할걸?”
“내가 진짜 짜증 나는 게 뭔지 알아? 내가 존나 화를 내도 괜찮은 상황인데도, 저것들이 슈퍼갑이라 꾹 참고 아닌 척하는 거야. 이 먼 데까지 오라 해 놓고, 와 진짜. 존나 열 받네.”
“야야. 그럴수록 더 힘을 내야지! 우리 말이야, 회사 존나 키워서 목에 깁스 하고 다니자. 이봐요, 사장님아! 힘내라고! 이 새끼는 찌질하게 구석에서 담배 피우면서 이러고 있냐!”
그래. 친구가 있으니 웃을 수 있다. 덕준이 엉덩이를 걷어차고 나니까 기분이 살짝 풀렸다. 그러나 오늘 당한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오냐, 내가 니네들 폴더 인사하는 것은 보고 관짝에 들어갈 것이야.
“정수야. 내가 생각했을 때 우리가 갑질 안 당하는 방법은 딱 두 가지야. 회사가 미친 듯이 존나 크거나, 아니면 누구도 넘보지 못할 기술을 가지고 있거나. 자, 봐 봐, 우리는 이미 기술을 가지고 있잖아? 이제 미친 듯이 존나 크기만 하면 되는 거야! 씨발, 가자! 어? 존나게 키워 버리자고!”
까짓것 그래 버리지 뭐! 대한전력 너네만큼은 아니겠지만, 못해도 이 업계에서는 짱은 먹고 말 테다. 두고 봐라. 내가 그 그지 같던 회사에서 오기 하나로 무려 3년을 버틴 놈이야!
앞으로도 숱한 수모가 있을 것이다. 온갖 수모는 사장인 내가 다 막아 낼 테니 직원님들아 회사만 확실하게 키워 주세요.
난 그렇게 자식 키우는 부모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