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3)
183 뜻밖의 수확
정말 최악의 여름이다. 이렇게 더웠던 여름이 또 있었나 싶다. 단군의 부동산 사기설이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더위가 끝이 아닐 것이란 불길한 예감도 여전하다.
날이 더워서 그런지, 나주로 내려가는 차 안도 무척 덥다. 아니, 덥게 느껴진다. 잠깐의 정적이 가져온 어색함은 누군가 입을 열어야 풀린다.
“체육대회 때 내기에서 이기면 소원 하나 들어주기로 한 것 있죠? 방금 막 썼어요.”
볼에 살짝 홍조가 올라온 박준희 사장이 짐짓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저녁 사는 게 먼저 아니에요? 그리고! 다음부터는 뺨부터 때려 달라고 하세요!”
뺨 맞을 짓이지만, 넘어가겠다는 소리. 테스트 결과는 성공적이다.
살짝 아쉽다. 여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남자들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조마조마하다가 안심이 되고 나면 아쉬워하며 2차, 3차 공격을 감행하려고 한다. 여기서 멈출 줄 아는 자는 진정 일류이다.
“정수 씨, 이러려고 안전벨트 매 준 거예요? 내 입술이 그렇게 탐났나요?”
질문 2연타. 이거 강공이네. 박 사장도 꽤 쑥스러운 모양이다. 그렇다면 배려 차원에서 내가 더 쑥스러운 척해야겠군.
“뭐, 하하. 저도 모르게. 실례했습니다.”
“푸하하. 귀여워. 뭐 나쁘지 않았어요.”
나쁘지 않았다? 가벼운 입맞춤 정도는 아쉬웠다는 뜻인가? 아니지, 앞서 가지 말자. 그래서는 일류가 될 수 없다고.
“자, 이제 출발합니다. 벌써 여덟 시네요. 서둘러야겠어요.”
“정수 씨, 부끄러워요? 부끄러울 짓을 왜 했대? 푸하하.”
“제가 살던 유럽에서는 일상적인 인사예요. 나주까지 잘 가자는 인사로 생각해 주세요.”
“저번에 중국 갈 때 해외 처음 나간다고 해 놓고, 말은 아주.”
박 사장 은근 집요하네. 확 그냥 인적 드문 화물차 주차 자리로 가 버릴까 보다.
휴게소를 벗어난 차가 고속도로에 진입해 속도를 급격히 올렸다. 혹시나 해서 리어뷰미러로 흰색 과학5호기가 오지 않나 살펴봤다. 이 간사한 놈.
차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박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반응했지만, 과한 반응은 오래가지 못한다. 과거는 지나간 일일 뿐,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자.
“근데 중전기조합은 이탈자가 없을까요? 한두 업체가 개별 입찰 들어갈 것이란 소문이 있던데요.”
“정수 씨, 나 좋아해요?”
아이씨, 놀래라. 안전운전에 저해될 뻔했네. 미련 많은 박 사장, 뜬금없기도 하네.
“아이, 왜 그래요. 저야 당연히 누나 좋아하죠. 누나처럼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요?”
“말 돌리지 말구요. 누나로 말고 여자로서 말이에요.”
직문 직답을 요구하니 피해 갈 수 없겠다. 진솔하게 얘기하자.
“네, 좋아해요. 좋아한다는 감정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감정은 분명히 있고, 진짜 좋은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진짜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팔짱 낄 때마다 느껴지는 뭉클함이 궁금하다고 해야 하지만, 짐승은 되지 말자고. 육체적인 것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야. 일류는 기다릴 줄 아는 자다.
“좋아해 줘서 고마워요.”
“뭐예요. 대답 받아먹고 입 닦기 있어요?”
“하하. 저도 정수 씨 좋아해요. 능력 있고, 자신감 넘치고.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박 사장도 은근 고수 냄새가 난다. 자연스럽게 총구를 나한테 들이댄다. 이제 내가 해야 할 멘트가 중요하겠네. 오래 고민하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딱히 멋진 멘트가 생각나지도 않고. 이거 참.
“누나, 우리 자주 만나요. 일적으로 말고 개인적으로 더 알고 지내요.”
“하하. 싱겁기는. 같은 동네 사는데 자주 못 만날 것도 없죠.”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젓고, 쇠뿔 단김에 뺄 때가 있지만, 길게 호흡할 때도 있어야지.
그렇게 천안-논산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호남고속도로로 들어갔다. 호남고속도로만 들어오면 다 온 것 같은 기분이다. 아직도 1시간 반은 더 가야 한다. 우리나라도 꽤 넓단 말이지.
“정수 씨, 아까 이탈업체 물어봤었죠?”
“기억은 하네요. 저도 정확히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개별입찰하려는 업체가 있다고 하네요.”
“아마 아시아전기일 거예요. 연초에 김용철 씨가 거기로 갔거든요. 아마 개별 입찰 준비하려고 그런 걸 거예요.”
“김용철 씨라면 설계 짜게 잘 뺀다는 그 사람 말이죠?”
“맞아요. 이 바닥에서는 설계로 원가 절감하는 건 그 사람이 최고일 거예요. 근데 불량이 좀 많죠. 아시아전기가 그 사람 영입했다는 것은 올해 입찰 때 뭔가 해 보겠다는 뜻이겠죠. 아시아전기같이 규모 좀 있는 회사들은 매번 나눠 먹기 달가워하지 않았거든요.”
조합에서 빠져나와 개별 입찰을 하려면 설계부터 다시 빼야 한다. 단가 하락이 빤해서, 제조 원가를 최대한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연초부터 준비했다면, 이번 입찰에 뛰어드는 것은 상수로 알아야겠군.
“이러다 삼파전이 될 수도 있겠네요?”
“오히려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까 더 나을 수도 있겠죠. 중전기조합이야 이탈 업체 생기면 후려치기로 상대했는데, 올해는 양상이 달라지니 골치 좀 아플 거예요. 우리 이 상무님이 정말 꼼꼼한 분이거든요? 크게 걱정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걱정이 되긴 합니다. 이미 확보한 것이 740억 원이나 되는데, 낙찰 단가 조금만 떨어져도 몇억, 몇십억 날아가니깐요.”
혁신산단에 있는 다른 회사들이야 지역배정으로 69억 확보한 것이 전부지만, 난 여기에 651억이 더 있으니, 단가가 예민하지 않을 수 없다. 각오한 일이지만, 이왕이면 좋은 가격으로 받는 것이 낫지 않겠나?
“740억 원요? 작년에도 800억 정도 하지 않았어요?”
“네. 계약 물량은 802억 원이었는데, 9월 1차분까지 850억 나왔으니까 좀 많이 나오긴 했죠.”
“변압기가 부족해서 올해는 계약보다 더 발주한다는 얘기가 있더니, 많이도 받았네요. 우리 회사는 10억 정도 늘어났는데, 역시 스케일이 다르네요. 하하.”
“이게 원래는 추가 발주하려고 했다가, 일반형 주상변압기 재고 구입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다고 하더라구요.”
“아, 그래요? 근데 많이 나오고 있잖아요? 아하! 저번 회의 때 얘기한 것이 그건가 보네요?”
박 사장이 목욕탕에서 물 넘치는 것을 보고 유레카를 외치는 표정이다. 강 사장이 세세한 얘기까지 전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한전력으로부터 귀한 정보를 받을 수 있는 비결은 무거운 입인 것인가?
대한전력 계획대로면 작년 계약 마지막인 9월 발주는 거의 없어야 한다. 그 돈에 예비비까지 보태 재고품 구매하겠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9월 1차 발주로 29억 원 어치를 받았고, 2차도 비슷하게 나올 것이다. 중전기조합 엿 먹이기 위한 계획 변경이 성공했다는 증표이다.
중전기조합 회원사들은 대한전력이 재고품 구매해 줄 것이라고 믿고, 지금 미친 듯이 재고 생산하고 있을 것이다. 도연테크 박민창 사장이 전하길, 최근 중전기조합 회원사로 납품량이 늘고 있다고 했으니, 확실하다.
대한전력은 재고품 구매하겠다는 계획은 밝힌 적이 없으니 그냥 조용히 있으면 된다. 중전기조합 놈들, 아주 피눈물이 날 것이다. 입찰에서 피박당하고, 재고품 구매 나가리로 광박까지 당해 봐라.
“아무쪼록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네요. 우리 조합도 그동안 당한 설움 다 털어 내야죠. 참! 정수 씨는 중전기조합이 어떻게 했는지 잘 모르죠?”
“신입이라고 무시하는 겁니까!”
그렇게 박 사장의 네버엔딩스토리가 시작됐다. 얼핏 흘려듣던 것들이 아닌, 직접 당한 것 같은 생생한 이야기 말이다.
조합으로 입찰을 받으면 조합은 배정 권한이라는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된다. 조합이 발주 물량을 회원사에 배정하면 대한전력은 그걸 확인하기만 한다. 배정은 오로지 조합의 역할이다.
당연히 이를 놓고 말이 아주 많았고, 그 피해자들이 우리 조합에 참여한 회사들이었다. 물량 덜 주기, 어려운 물량만 배정하기, 배정 늦게 하기 등등. 중전기조합은 여러 방법으로 소속사들을 길들이고자 했다.
“그래서 한번은 사장님들 몇 분이랑 같이 조합을 찾아서 발주 전체 물량하고 배정 결과를 보여 달라고 했어요. 규정 어쩌고 뻗대길래 한참을 실랑이하다가 결국 봤는데, 이사장이랑 몇몇 회사가 더 받아 갔더라구요.”
“가만있었어요? 저 같으면 난리쳤을 것 같은데?”
“이게 뭐냐고 항의했죠. 결국 긴급 총회까지 열었는데, 뭐라고 결론이 난 줄 알아요?”
“뭐래요?”
“조합 일 하면서 고생한 회사들에 조금 더 챙겨 주는 것이 무슨 문제냐고 그래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수에서 밀리니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더라구요.”
“그래서 조합 새로 만들자고 결심한 거군요?”
“그게 재작년 입찰 공고 나왔을 때였으니까 딱 2년 전이네요.”
내가 회사 세우겠다고 나주 바닥 휘졌고 다닐 때였군. 가만있자. 그럼 박 사장이 처음 연락 준 것도 새 조합 만드는 데 힘 좀 보태 달라는 뜻도 있었겠군.
“그래서 그때 누나가 저한테 연락해서 밥 먹자고 한 것이군요?”
“에이, 그건 아니다. 일심전기 유원태 사장님이 계속 부추기긴 했어도, 조합 새로 만들자고 생각만 했지, 추진할 단계는 아니었어요. 정수 씨한테 연락한 거야, 말했듯이 젊은 사장들끼리 잘해 보자, 서로 돕자, 이런 마음이었어요.”
“그때 무슨 의도인가 싶으면서도 참 고맙기도 했어요. 그래서 지금 서로 잘하고, 도우니까 좋죠?”
“지금이야 그때처럼 뻣뻣하게 굴지 않으니까 이쁘네요. 처음에는 얼마나 까칠하게 굴던지, 원. 푸하하.”
과한 웃음소리가 교태처럼 들린다. 별것 아닌 타이밍에 선지가 쏠리네.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거리두기 하며 지내다 최근 급격히 가까워져서 그런지, 남성의 욕망 게이지도 높아지는가 보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구나.
말이 가지를 치며 여기저기 뻗어 나가며 향연을 펼치다 보니, 어느새 나주에 도착했다. 한나절 생활권이라고 하지만, 장거리 오고 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제2의 고향 나주에 도착하니 맥이 딱 풀린다.
“정수 씨, 고생했어요.”
“집까지 들어가야 고생 끝나는 겁니다. 어디 아파트라고 했죠?”
“여자 혼자 사는 집 함부로 알려 주면 안 되는데…….”
“혼자 사는 여자가 최고라고 하던데, 누나는 역시 최고의 인재입니다.”
“또 헛소리!”
어깨로 받아 내는 손바닥 스매싱이 전혀 매섭지 않다. 강단 있으면서도 여리여리한 사람일세.
“우리 집이랑 가깝네요. 걸어서 10분 정도? 퇴근하고 할 것 없으면 호수공원에서 같이 운동이나 해요.”
“정수 씨 운동 좀 해요! 저 매일 퇴근하고 호수공원에서 런닝하는데, 어째 한 번을 본 적이 없네요?”
“어렸을 때 뛰어다니면 배 꺼진다고 그랬잖아요. 그래서 잘 안 뛰어요. 하하. 앞으로 운동하러 나올게요.”
이 시간에 핫팬츠 입고 런닝하는 박 사장을 상상하면 안 된다. 가을에는 레깅스를 입고 뛸려나? 그만 생각하자.
“그래요. 내일부터 안 보이면 전화해서 부를 거예요. 늦었어요. 피곤할 텐데 어서 들어가세요. 오늘 고생 많았어요.”
박 사장이 내 생각 해 준답시고 칼같이 끊고 작별 인사를 전한다. 밤 11시. 늦기도 했지만, 살짝 출출할 시간이기도 하다.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 좋을 시간인데, 라면 먹고 가면 안 되냐는 소리는 해서는 안 된다. 꾹 참자.
그렇게 업무적으로는 별 소득 없는 판교 출장이 끝이 났다.
중전기조합이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여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과 경쟁 입찰에 들어가도 걱정 안 해도 될 것이라는 믿음을 얻은 것이 전부다.
고작 그거 확인하려고 귀한 시간 내어 판교까지 갔다 왔나 싶지만,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
박 사장과의 진전된 관계. 젊은 남녀가 자주 만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진행될 절차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박 사장과 이리될 것이라고 생각조차 안 했기에 놀랍기도 하다.
이제 일주일 뒤면 대한전력 입찰이 개시된다. 다음 주부터는 새로운 마음으로 1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작년보다 더 따뜻한 겨울을 보낼 것 같다. 겨울 오기 전에 이 무지막지한 더위부터 물러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