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184)
184 입찰 개시
사상 최악의 무더위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1994년 폭염을 능가했다는 기사가 쏟아지며 모든 관심사가 폭염에 쏠리고 있다.
이 폭염이 대체 언제 잠잠해질 것인지도 관심사이지만, 지금 가장 큰 관심사는 내일 있을 대한전력 변압기 입찰이다. 이 더운 와중에도 물밑으로 바쁘게 움직이며 입찰전을 달궈 놨다.
올해 입찰은 삼파전으로 치러진다. 아시아전기가 중전기조합에서 이탈해 개별 입찰하겠다고 선언한 결과다. 소속사 하나 설득 못한 중전기조합의 무능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 무능함 때문에 삼파전이 됐으니,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입찰을 하루 남겨 둔 상황이라 괜한 조바심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날이 너무 더워서 담배 피우러 나가기도 무섭지만, 이럴 때는 한 대 피워 줘야지.
테라스로 나가자마자 확 느껴지는 후덥지근한 공기를 이겨 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또 허벅지를 강타하는 진동이 느껴진다. 담배 좀 필라 치면 여지없이 전화가 오네.
“네, 김 사장님.”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이다. 언제쯤 연락이 오나 기다렸는데, 빅 이벤트를 앞두고 전화를 했네. 프렐류드로 제격이었으면 좋겠다.
“요즘 엄청 덥죠? 일 좀 해 볼라 하니까 날이 더워서 힘이 짝짝 빠집니다. 하하.”
“부산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거긴 바닷가라 바람 좀 불지 않습니까?”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습해가 더 죽겠습니다. 그나저나 엊그제 난퉁에 다녀왔습니다.”
난퉁에 다녀와서 전화 준 것이라면 좋은 소식임이 분명하겠군.
“전기연구원에서 코일 성적서가 나왔고, 총판 설립도 다 마무리됐지요. 이제 본격적으로 수입하면 됩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좀 걸렸는데, 걱정 많으셨지요?”
“아닙니다. 김 사장님 믿고 맡겼으니 걱정 하나도 안 했습니다. 그럼 도연테크 박 사장님이랑 얘기를 해 보셨습니까?”
유통은 단계가 줄어들수록 이득이다. 그럼에도 은하무역에다 도연테크까지 끼워 넣었다. 총판인 은하무역이 난퉁전기로부터 수입을 책임지고, 도연테크는 대리점으로 부지런히 내다 파는 역할이다.
영업적인 측면에서 도연테크 박민창 사장의 역량을 활용하기 위함이며, 박 사장의 파이를 지켜 주기 위한 내 나름의 고심이었다. 당분간은 수입량 전량을 내가 쓰겠지만, 차차 판매도 늘려 갈 생각이다. 국산 애용 외치기에는 단가가 너무 좋단 말이지.
“그제 귀국하자마자 도연테크 찾아가서 잘 얘기했습니다. 코일이랑 볼트, 너트 다 들어와 있으니까 필요 규격이랑 수량 말씀해 주시면 바로 납품 들어가겠습니다.”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덕분에 돈 벌고 회사 커지는데 고생이랄 게 있습니까? 이런 고생이라면 얼마든지 하지요. 하하.”
입찰 대승을 위한 소소한 이벤트로 제격인 전화였다. 난퉁전기 코일은 당분간 수출품에만 사용할 생각이다. 그래도 그 좋은 가격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공장장과 이규철 부장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 부장님, 나날이 야위어 가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포동포동한 사람한테 야위어 가다니! 살 더 빼야 해.”
공장장의 타박 대상이 이 부장으로까지 확대된 모양이다. 이 더위에 땀 흘려 가며 고생하는 사람한테 살 빼라고 타박이라니 원.
“공장장님, 진짜 죽겠습니다. 생산부야 일하기 좋아도, 저흰 죽습니다.”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지. 이제 태풍 좀 오고 그러면 더위가 좀 꺾이지 않겠어? 조금만 참고 버텨 봐. 그나저나 사장님이 무슨 일로 이렇게 불러 모았을까?”
그래, 제발 태풍이라도 좀 와라. 며칠째 폭염주의보 발령인지 모르겠다. 뜨겁게 달궈진 차 보닛에다가 달걀프라이 하는 것은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저번 달에 중국 출장 다녀와서 코일 들여오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절차가 다 끝나서 다음 주부터 본격적으로 받을 예정입니다.”
“그 뭐 전기연구원에 시험 맡겼다더니 다 끝난 모양이네?”
“네, 맞습니다. 성적서 나왔는데 기존 제품이랑 차이가 없거나, 어떤 항목은 오히려 더 좋더라구요. 시험 항목들이 전기적으로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이상 없는 것으로 나왔으니까 이제 실증 테스트해 봐야죠.”
“사장님, 성적서 사본 하나 보내 주시죠. 저도 자세히까지는 모르는데, 여기저기 물어보고 찾아보겠습니다.”
이 부장의 좋은 점이 저것이다.
모르면 배우려 하고,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적서 분석하면서 공부하겠다는데 어찌 마다할쏘냐. 저런 이 부장을 두고 고졸이라고 무시한 박진호 같은 놈은 산이나 타면서 여생을 마무리하라고.
“우선 수출품이랑 민수부터 적용할 계획인데요. 그것과 별도로 관수 변압기도 테스트해 주세요. 제작 대수 늘려 가면서 시험해서 문제없으면 관수 적용 범위로 점차 넓혀 가겠습니다.”
“그 유진전선에서 반발이 좀 있지 않겠나? 우리가 제일 큰 거래처일 텐데, 발주 줄어들면 온갖 아쉬운 소리 다 할 텐데 말이야.”
“인연도 없는 회사까지 챙겨 줄 여력이 있습니까? 그건 그렇고, 가격이 너무 좋습니다. 유진전선이 우리한테 제일 싸게 준다고 하는데, 그래도 너무 차이 납니다. 이것저것 다 제해도 킬로당 천 원 차이 나면 엄청나지 않습니까?”
“킬로당 천 원? 중국 놈들은 대체 뭘 어떻게 하길래 그리 싸게 만들 수 있는 거야? 그 정도면 안 쓰는 것이 바보지.”
공장장의 좋은 점이 저것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테스트한다는 소리에 구시렁거렸을 것인데 일언반구도 없다. 오히려 다른 점을 걱정한다. 몇 차에 걸쳐서 제품 추적하고 관리하고 체크하고, 테스트가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데…… 저런 사람을 늙었다고 홀대한 태양전기는 아주 잘 망했어.
“공장장님이 제품 번호만 잘 체크해 주시면 꼼꼼하게 시험해 보겠습니다.”
“걱정 말어. 매직으로 큼직하게 써 줄 테니까.”
“저번처럼 수성펜으로 써 놓지 마세요.”
“에이, 진짜.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1년 전 일을 아직도 꺼내 드네.”
입찰을 하루 앞두고 초조한 나와 달리, 직원들은 서로 갈구면서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다. 전달 사항은 다 전했으니, 만담은 둘이 하라고 하자.
“사장님, 갈라고?”
“할 얘기 다 했습니다.”
“정 없게 말이야. 어째 내일 입찰은 잘될 것 같나?”
“당연히 잘돼야지요. 거기 걸린 돈이 얼만데요. 좋은 결과 들고 올 테니까 변압기 부지런히 만들어 주세요.”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안성파워 공장에 크고 좋은 차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대한전력 입찰을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사장들이다. 전자 입찰이라 숫자만 입력하면 그만인데, 결과가 궁금해 못 참겠는 사람들이지. 나도 그중 한 명이고.
“정수 씨!”
앞서 가는 저 차가 낯익다 했더니 금성전기 박준희 사장 차였군. 주차하자마자 반갑게 불러 준다.
“누나, 어제 잠 좀 잤어요?”
“잘 잤죠. 걱정돼서 잠 설쳤을까 봐요? 하하.”
“어쩐지 피부가 뽀송뽀송해 보이더라구요.”
“참 나. 나이 많다고 그러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애기 피부인데!”
그건 인정. 우리나라 나이로 37살인데도 20대도 처바를 피부는 나도 인정한다. 가만있자. 박 사장이 37살이면 내가 34살인 거네. 나도 나이 많이 먹었네.
“나중에 시간 날 때 피부 관리 비법 좀 알려 주세요. 나이 먹어서 그런지 피부가 점점 건조해지는 것 같아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들어가요. 무슨 날씨가 아침부터 푹푹 찐데요? 자, 가요.”
덥다면서 팔짱 끼고 끌고 가는 박 사장이 아침부터 고맙다. 이젠 팔짱 끼는 것이 과감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릴 팔짱이지만, 그 잠깐 동안에 팔이 아주 호강을 한다.
안성파워 회의실이 북적거린다. 그래도 일찍부터 에어컨을 틀어 놨는지 시원하기 그지없다.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입찰 과정 구경하면 되겠군.
“이제 곧 9시입니다. 입찰 준비는 아주 열심히 했으니까 맘 편히 주전부리 드시면서 지켜보시면 됩니다. 왼쪽 방에 흡연실 마련해 뒀으니, 생각나시는 분들은 거기서 해결하고 오세요.”
조합 이호영 상무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구경꾼들을 안심시켰다.
프로젝터로 확대된 컴퓨터 화면은 대한전력 전자 입찰 사이트를 또렷이 보여 주고 있다. 입찰은 간단하다. 20분 간격으로 25개 입찰이 하나씩 열린다. 그때마다 5분 이내로 입찰가를 입력하면 끝이다.
말이야 간단하지만, 입찰가 누르는 과정이 피를 말린다.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높은 가격을 써 내고도 낙찰될 수 있고, 낮은 가격을 쓰고도 떨어질 수 있다. 심리 게임이자, 도박판이다.
“9시 됐습니다. 가격 입력 칸이 열렸네요. 1번 입찰은 탐색이니까 넉넉하게 99.5프로로 들어갑니다.”
이제 시작이다. 입찰 열리고 5분 안에 예정가 입력하면 바로 결과가 나온다. 1번 입찰은 넘겨줄 계획이라고 했지? 상대방이 얼마에 들어가는지 보자.
“와!”
박수 소리가 잔잔하게 터져 나왔다. 99.5퍼센트로 들어간 1번 입찰을 먹은 것이다. 중전기조합은 99.7퍼센트, 아시아전기는 99.9퍼센트. 서로 탐색하다가 어부지리로 먹은 느낌이다. 일단 출발 좋다.
“99.5프로면 아주 좋네요. 그쵸?”
내심 표정 관리하고 있는데 박 사장이 말을 건다. 그럼 표정 관리가 어려운데……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시작이긴 한데, 기분이 좋긴 하네요. 이렇게만 높게 받아 냈으면 좋겠어요.”
“여기 있는 분들 생각이 다 그럴 거예요. 예전 단일 조합일 때처럼 99.8프로 이렇게 끝나면 좋긴 하겠지만, 이제는 어렵긴 하겠죠.”
이번 입찰에서 웃을 사람은 우리 조합이 될 것이라 믿지만, 진짜 웃을 곳은 대한전력이다. 낙찰가 하락으로 예산 절감했다며 국감장에서 칭찬 받을 것이다. 이걸로 이춘배 부사장한테 생색 좀 내야겠군.
“자, 두 번째 입찰 열렸습니다. 이번에도 탐색이니까 똑같이 99.5프로로 갑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누가 먼저 치고 나오느냐, 얼마나 후려치느냐가 관건이다. 이제 두 번째 입찰인데, 테이블에 놓인 주전부리를 벌써 다 먹어 버렸다. 이거 자꾸 먹게 되네.
또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계속된 탐색전으로 2번 입찰도 우리 조합이 먹었다. 이거 출발이 너무 좋은데?
중전기조합은 속이 타들어 가게 생겼다. 최대한 많이 가져가야 하는데, 탐색전 멍청하게 벌이다가 2개나 날려 버렸으니 말이다. 꼬시다 이놈들아.
“세 번째 입찰 들어갑니다. 이렇게까지 될지 몰랐는데, 성과가 좋네요. 일단 세 번째도 탐색하는 걸로 해서 똑같이 99.5프로에 들어가겠습니다.”
세 번째 입찰은 중전기조합이나 아시아전기가 먹을 것이 분명하다. 누가 얼마나 후려치느냐를 보면 되겠지.
“우하하하.”
이번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중전기조합이 91.5퍼센트로 3번 입찰을 차지했다. 우리 조합이 99.5퍼센트, 아시아전기가 98.9퍼센트로 들어간 것에 비춰 너무 후려친 것이다. 바보 같은 놈들.
“중전기조합이 완전 말리는 분위기네요.”
“그러게요. 이번 것도 우리가 먹을 줄 알았나 봐요. 근데 너무 낮춰서 들어갔다. 그렇죠?”
기분 좋은 박 사장과 달리 난 기분이 묘하다. 중전기조합이 똥값에 받아 가면 저들 손해이긴 하지만, 나도 피해를 본다. 우선배정 단가는 25개 입찰 평균가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전기조합 멍청한 놈들아! 평균값 떨어트리지 말라고!
“저것들이 가격 너무 떨어트려도 좋지는 않은데…….”
“저 정도는 감내할 생각이었잖아요. 중전기조합 무너트리는 것이 우선이니까 좋게 생각하자구요.”
박 사장이 내 속내를 알고 있는지 달래 주며 살짝 손을 잡아 준다. 손잡기 위력이 대단하다. 마음이 평온해지는군.
4번 입찰도 재미있는 결과였다. 탐색을 끝낸 이 상무가 97.9퍼센트로 들어가서 먹어 버린 것이다. 3번 입찰에서 너무 후려쳐 버린 중전기조합이 98.6퍼센트로 높게 올려 버린 것이 패착이다. 중전기조합은 멘탈이 붕괴되고 있을 것이다.
5번 입찰이 중전기조합 멘붕의 결정타를 날렸다.
우리는 99.1퍼센트로 양보하다시피 했는데, 아시아전기가 의외의 복병으로 나타났다. 94.6퍼센트를 써낸 중전기조합을 0.1퍼센트 차이로 제쳐 버렸다. 내내 높은 입찰가를 써냈던 아시아전기가 작정하고 뛰어든 것이 중전기조합을 물 먹인 것이다.
“푸하하. 이거 아주 쌤통이네요. 누나, 기분 좋죠?”
“그러게요. 5번까지 헐값으로 하나 먹은 거 말고는 연전연패네요. 거기 지금 죽을 맛이겠죠?”
기분 좋은 사람이 나와 박 사장뿐이 아니다. 회의실에 있는 모든 이들이 치아가 환히 보이게 웃고 있다. 30분 휴식이니, 기분 좋게 담배나 피우자. 우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