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02)
202 더도 말고 한가위
추석이 다가왔다. 회사 세우고 세 번째 맞는 추석이다.
첫 추석은 창업하고 일주일 만에 찾아와서 조용히 넘어갔고, 두 번째 추석은 돈이 많이 쪼달릴 때라 역시 조용히 넘어갔다.
세 번째 추석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설보다 더 쳐주는 것이 추석 아닌가! 돈 많이 벌었으니, 그 위력을 보여 줘야겠다.
“사장님, 부르셨어요?”
살림꾼 김지연 대리가 사장실로 들어왔다. 지난 설에는 돈 쓸 때가 아니라는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상여금을 지급하지 않았지만, 이번 추석 상여금은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추석인데, 명절 잘 보내라고 떡값 좀 돌려야죠?”
“얼마씩 주는 걸로 할까요?”
“이번엔 순순히 응하시네요?”
김 대리가 배시시 웃으며 응대한다. 이 동네 캣맘의 위력을 보여 주는 듯한 사람 좋은 웃음. 넉넉한 한가위를 맞이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에이. 저번에는 성과급 받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이기도 했고, 자금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잖아요. 돈 나갈 데는 많고, 대출 이자도 한 달에 2천만 원씩 나가는데, 저야 당연히 걱정이 되니까 그랬죠.”
“지금은 돈이 너무 넘쳐 나죠?”
“그러게요. 사업 대박이라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 돈이 이렇게 많이 들어오니까 좀 무서울 정도네요.”
그렇다. 이제 우리 회사는 무서운 회사가 됐다. 연말엔 무서운 성과급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야.
“만근 기준으로 1년 넘은 사람들은 기본급 100프로, 1년 안 되면 50프로로 하죠.”
“월급 한 번씩 더 주는 거네요? 이거 공고문 게시하면 직원들 난리 나겠어요. 호호. 자회사들은요? 거기도 얘기 되신 거죠?”
“물론이죠. 회사만 다르지, 대우는 똑같이 가기로 했으니까요. 다 동의했으니 그냥 집행해 주시면 됩니다. 참! 선물은 늘 그렇듯이 스팸 1호로 하구요.”
김 대리가 신이 났던지 발레하듯 통통거리며 나갔다. 통통거림이 머지않아 환호로 이어질 것이다.
회사 세우고 급여체계 정할 때 다른 회사들처럼 더러운 짓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기본급을 줄일 대로 줄이고, 온갖 명목의 수당을 덕지덕지 붙여 놓는 짓 말이다.
그래서 우리 회사는 월급이 곧 기본급이다. 난 돈 잘 벌 자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추석 떡값으로 통장에서 시원하게 빠져나가겠지만, 그래 봐야 고작 6억 원이다. 6억 원이 고작이라니! 감개무량하다.
이 기쁜 소식을 공장장에게 전해 줘야겠다.
작년 이맘때는 공장장 얼굴에 그늘이 꽤 드리워져 있었다. 대한전력 물량은 터졌지, 그 많은 물량 내보낼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 포장도 해야 했지. 갑갑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공장장의 얼굴은 여유를 넘어 꽤 한가해 보인다. 만들어야 할 변압기가 배 이상으로 많아졌어도, 충분한 설비와 인력으로 거뜬히 처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장장님, 이번 추석 때 어디 가십니까?”
“아들 녀석 보러 인천 갔다 올라고. 애들 내려오는 것보다 나 혼자 올라가는 것이 낫지 뭐.”
“혼자 올라가세요? 둘이 아니고?”
“에이, 왜 그래. 우리 그 정도 사이는 아니야. 하하.”
백지원 최봉숙 원장과 우정을 나눈 지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부끄러워하는 공장장. 사춘기 소년 같은 모습은 여전하다.
“소고기 세트 들고 가서 가족들이랑 같이 구워 먹으며 상견례하면 딱이지 않습니까?”
“허허. 거참. 이렇게 나온다 이거야?”
손사래를 치며 그만 얘기하라는 표정이지만, 공장장의 얼굴엔 참을 수 없는 미소가 터져 나왔다. 노년의 아름다운 사랑을 적극 응원하리다.
“하하. 암튼 인천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이번 추석엔 상여금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월급 한 번씩 더!”
“그으래? 그거 좋지.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우리 사장님 돈 시원하게 잘 쓴다고 소문이 자자해. 최 원장도 사장님 덕분에 운영에 숨통이 트였다고 아주 좋아해. 하하.”
“뭐, 회사가 잘 벌어서 그렇죠. 잘 버는 것도 좋지만 잘 쓰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래그래. 우리 사장님은 언제 봐도 듬직해. 걱정할 일이 없어! 내가 직원들 단속 확실하게 하고 있으니까 늘 맘 편히 지내라고.”
내가 할 일 없이 회사 빈둥거릴 수 있는 것도 공장장 덕분이다. 직원들 배부르면 일을 열심히 안 한다는 개소리가 통용되지 않는 것도 공장장이 있기에 가능했다.
공장장은 공장에서 엄한 호랑이 선생님이자 장판파 장비였다. 두 눈 부릅뜨고 서 있어서, 지금까지 안전사고가 한 건도 없었다. 나태해진 직원들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엄하게 해도 당근도 잘 먹인다. 영산포 시내 술집 다 먹여 살릴 정도의 시원한 뒤풀이로 풀어 줄 때 제대로 풀어 준다. 내년엔 월급을 훨씬 많이 올려 줘야겠어.
“공장장님. 각진 코아 있잖아요? 추석 지나서 대한전력 인증 받을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관수에 바로 적용해도 되니까 추석 잘 보내고 나서 준비 좀 해 주세요.”
“그래? 그거 좋구만. 어차피 테스트야 충분히 했고, 바로 양산 들어가면 되네. 공정 짧아져서 더 할 만해지겠네그려.”
상여금 지급 소식 때와 달리 꽤 표정 관리하는 공장장이 귀엽게 느껴졌다. 본인이 개발한 것이라 과하게 반응하기 부끄러웠으리라.
공장장이야 우연찮게 얻어걸린 것이라고 애써 과소평가했지만, 그 결과로 3년간 최소 1,200억 원을 확보했다. 그것뿐이랴? 월등히 높아진 생산성과 원가 절감에 기술적으로 앞서 간다는 자부심까지!
“소둔 안 하고 바로 쓸 수 있으니까 시간 꽤 절약되겠죠? 전기료도 많이 아끼고 말이에요. 이게 다 공장장님 덕입니다.”
“그건 모르겠고. 코아 조립도 처음이야 버벅거렸지, 지금은 오히려 기존보다 더 수월하게 하더라고. 그나마 수출품에 적용해 봤으니 익숙해졌지, 안 그랬으면 익숙해지는 데 시간 좀 걸렸을 거야. 그러게, 진작 좀 하지 그랬어?”
공장장이 부끄러움을 나에 대한 타박으로 돌려서 전했다.
진작에 할걸. 내가 아둔한 탓이다. 대한전력 규정을 제대로 살폈더라면 마냥 묵히고 있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생산부 직원들 더 편할 수 있었는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최 상무님이 그런 규정 있다는 걸 안 알려 줬으면 내후년이나 적용할 뻔했습니다. 저도 아직 모르는 것투성입니다. 부지런히 배우고 공부해야죠.”
“이제라도 하면 됐지 뭐.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으니까 자책하지 말어. 그나저나 최 상무, 사람이 괜찮더라고.”
최윤근 상무에 대한 공장장의 첫 평가가 나왔다. 최 상무가 입사하고 나서 뻔질나게 공장장 찾아가더니, 합격점을 받은 모양이다.
“하하. 최 상무님이 맘에 드십니까?”
“그 사람 말이야, 사람을 아주 귀찮게 하더라고.”
“네?”
“작업 매뉴얼 보겠다고 현장 왔다 갔다 하면서 나보고 이건 어떠냐, 저건 어떠냐고 하나하나 물어보는데, 아주 죽겠어. 하라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알아서 하라고 그래 버렸지.”
“공장장이 현장 오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알지. 그걸 아니까 사람이 괜찮다고 하는 거야. 난 그래도 대한전력에서 왔다고 해서 거들먹거리고 그럴 줄 알았더니, 그 나이 먹고도 안 그런 거 보면 참 괜찮은 사람이야. 잘 데려왔어!”
나도 좋게 보고, 공장장도 좋게 본다면, 좋은 사람이 확실하다.
“그래서 매뉴얼은 많이 바뀌었나요?”
“보니까 이것저것 많이 바꾸더라고.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는데, 역시 배운 사람이라 그런지 괜찮은 것 같더라고. 뭐 적응하려면 골치 좀 아프겠지만, 만들 때 제대로 만들어야 불량도 안 나오고 좋지. 익숙해지면 물량 뽑기는 더 나아질 것도 같고.”
그러고 보면 진짜 좋은 사람은 공장장이다.
중소 제조업 공장밥 30년 넘게 먹은 사람이라면 자기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좋게 말하면 노하우, 나쁘게 말하면 곤조? 남의 말 안 듣고 자기 식대로 하려고 한다.
공장장은 그런 게 없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다는 콤플렉스가 좋게 발현된 것이랄까? 63살 먹은 지금까지도 귀를 닫지 않고 뭐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한다.
회사 세우겠다고 결심했을 때 저 사람은 죽어도 데려와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게 이뤄졌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내년에 봅시다. 입이 쩍 벌어지게 월급 올려 드릴 테니까, 공포를 느껴 보시길.
명절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공장장과 평온하게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그래서인지 할 말이 계속 오장육부에서 밀려 올라온다.
“참, 공장장님. 직원들 대학 보내는 거 반응은 어때요?”
수시 원서 접수를 앞두고 고조선대학 신재생에너지과 17학번으로 보낼 20명 선발이 완료됐다. 대학 입학은 원서만 내면 끝이지만, 자체 선발전은 경쟁이 치열했다.
전기이론에 대해 기초부터 다지고 싶다는 학구열이 3이라면, 대학생활이라는 막연한 환상이 주는 기대감이 7일 것이다. 학교 잠바 입고 선배한테 밥 얻어먹는 재미도 느껴 보고, 엠티 가서 술이 떡이 돼 히드라처럼 먹었던 것 다 토해 내 보기도 해야지.
“다들 좋아하지. 대학 갈 애들 추리느라 힘들었어. 쟤네들도 대학 얼마나 다니고 싶겠어? 공짜로 보내 준다는데 아주 좋아하지.”
“보호 종료되면 보육원 나가야 하니 억지로 대학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해서 좀 꺼려 하지 않을까 했는데, 반응 좋아서 다행입니다.”
“쟤네들이 뭐 여기 천년만년 다니진 않겠지만, 그래도 여기 있는 동안에는 부족함 없이 해 줘야지. 요즘 젊은 애들은 중소기업이라면 쳐다도 안 본다는데, 얼마나 기특해?”
“공장장님이 잘 챙겨 주시니까 열심히 일하는 거겠죠. 말 나온 김에 공장장님도 이참에 대학 한번 가시렵니까? 고령자전형은 정원 외라 그냥 원서만 내면 된다고 하던데요?”
“에이, 고등학교 졸업장도 없는데 무슨 대학이야. 이 나이 먹고 검정고시 보라고? 난 못해. 하하.”
대학은 안 가겠다? 그럼 장가는 가려나?
“공장장님, 근데 지금 사시는 집은 괜찮으십니까? 아직도 아파트 싫으세요? 그래도 신혼집 차리려면 아파트가 좋지 않겠습니까?”
“아휴, 자네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많이 해? 이거 수다쟁이 다 됐네. 나 일해야 하니까 사무실 올라가. 바뻐, 아주 바쁘다고!”
떠밀리듯이 현장 사무실에서 쫓겨났다. 부끄러워하는 걸 보니 새장가 갈 생각은 있는 모양이네. 후훗.
* * *
그렇게 추석이 찾아왔다.
손에 쥐고 가는 것은 스팸 선물 세트지만, 이미 통장이 두둑해지는 아름다운 경험을 한 만큼 표정들은 더없이 신 나 있다. 비록 직원 대부분이 명절에도 딱히 갈 곳이 없는 이들이지만, 명절이 주는 포근함과 푸짐함은 느낄 수 있으리라.
회사 세우고 맞는 5번째 명절. 연휴 전날이라고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시켰더니 썰물 빠져나가듯이 회사가 조용해졌다. 자동권선기만 부지런히 돌며 존재감을 알린다.
나 역시 딱히 갈 곳이 없다. 5일 연휴 동안 집에 짱 박혀서 밀린 미드나 볼 생각이었는데, 늘 그렇듯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 사업은 생각대로 잘 풀리는데 말이야.
“너 연휴 때 할 것 없지? 이 형이랑 같이 캠핑 한번 가자!”
“캠핑? 너랑?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인마. 이참에 그런 것도 경험해 봐. 만날 집에만 있지 말고. 집에 대현자 냄새 한번 박히면 빠지기 힘들다. 이럴 때 바람 좀 쐬는 거야. 글램핑이라 다 있으니까, 넌 그냥 몸만 오면 돼.”
덕준이가 굳이 연휴 첫날을 같이 보내 주겠단다. 남자끼리 무슨 캠핑이냐고 몸서리 쳤지만, 서울 올라가지 않고 친구 놈 챙겨 주겠다는 그 고마움을 어찌 외면하겠는가!
개뿔. 선의는 거절하는 법이 아니라지만, 의심은 해 봐야 한다.
여자 친구인 오윤경 기자랑 둘이 보내자니 찔려서 나를 깍두기로 끼워 넣은 자식. 어쩐지 자기가 다 준비하니까 몸만 오라는 것이 이상하다 싶더라. 누가 뭐래도 내 친구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