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43)
243 훈수꾼
검찰 조사 받느라 심신이 기진맥진해졌지만, 이 몸은 여전히 쉴 수 없다.
그래서 중전기조합에 대한 분노가 더 커졌다. 회사 일만으로도 정신없이 바쁜데, 괜한 곳에 정력을 소모하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산속에 땅은 파 놨다. 이제 그놈들 잡아서 구덩이에 집어넣고 공구리만 치면 그만이다. 복수는 차차 생각하고, 일단 일부터 하자.
유재준 사장을 만나러 설비제작부로 달려갔다.
“사장님! 사장님이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회장님 오셨어? 내가 달라질 것이 뭐 있다고 그래. 허구한 날 조립이나 하며 사는 거지 뭐.”
우리 회사의 핵심 경쟁력인 기상천외한 설비들을 제작하는 아이디어 포켓의 유재준 사장. 여전히 조립에 여념이 없다. 봄에 신규 공장 준공하면 사정이 좀 나아지려나. 어림없겠지.
“요새 급한 불은 좀 껐죠?”
“예전보단 훨 나아졌지. 직원들도 손이 익어서 많이 빨라졌어. 이 상태면 지금 납품 밀린 거 다음 달엔 다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최 부장님이 문제긴 한데…….”
작년 하반기에는 거의 매일이 야근이었다. 우리 캐파 늘리느라 말 그대로 미친 듯이 설비 뽑아내야 했고, 우리 조합 회원사에 보낼 자동권선기도 줄을 길게 서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 한숨 돌리겠구나 싶은데, 최형택 부장이 또 무슨 사고라도 쳤단 말인가?
“최 부장님이 왜요? 뭐 또 만들어 왔습니까?”
“아니, 만든 건 아니고, 얼마 전에 와서는 외함제작기 한번 손봐야겠다고 하더라고.”
“하하. 최 부장님도 여전하네요. 근데 요즘 그거 할 시간 없을 텐데요?”
김신우 사장이 데리고 온 최 부장, 입사한 지 1년이 훌쩍 넘었다. 하고 싶은 일이 설비 설계 뜯어고치는 것이라며, 그것만 하겠다는 외골수 같은 소리를 내고는 골방에만 처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궈 낸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우리 회사에 실존하는 문자님으로 거듭나고 있다. 자동권선기 설계 분석을 마치고 나자 개선된 설계를 뽑아냈고, 그걸 응용해 조임쇠체결기도 만들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월급값 충분히 하고도 남지만, 설비 설계에 푹 빠졌는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다음 타자로 외함제작기 개선을 선택한 모양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할 일에 비해 몸뚱이는 하나뿐이다.
“최 부장님이 외함제작기 뜯어고친다길래 난 또 죽었구나 싶었는데, 요새 탭판이랑 방압변 찍는 설비 설계한다고 해서 좀 잠잠해졌지. 하여간 그 형도 한시도 가만있질 않아.”
“뭐가 됐건 설비는 계속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하. 사장님은 아무래도 일복을 타고나신 것 같습니다.”
“사출기야 일도 아니야. 외함제작기는 진짜 힘들었다구. 자동권선기 정도는 아니지만.”
유 사장이 한시름 놨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 표정이 오래가지 않을 것 같아서 말도 꺼내기 전부터 미안해진다.
“전력용 변압기 설비 얘기하려고 왔는데, 말도 안 꺼내야겠습니다. 설비에 들어가는 부속품 가공도 직접 했으면 싶기도 한데, 이건 생각도 안 하겠습니다.”
한숨 소리가 들렸다. 유 사장의 한숨은 하겠다는 승인의 뜻이다. 우리 순둥이 유 사장이 숙명으로 받아들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아 냈다.
“얘기 다 해 놓고 뭘 안 꺼내! 우리 회장님도 똑같다니까. 하하. 안 그래도 전력용 변압기 설비 준비하고 있으니까 좀 기다려 보셔. 김 이사랑 틈틈이 상의 중이야.”
“부속품 가공은…….”
“에이, 진짜! 숨 좀 쉬면서 하자!”
전력용 변압기 시장 진출의 출발은 변압기 설계에 착수하면서 시작됐다.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한 설계팀 대장 김진욱 이사가 25MVA 용량까지 설계를 뽑으면 그에 맞춰 설비를 새로 갖추기로 했다. 이미 설계팀과 유 사장이 수시로 모여 회의 중이다.
제대로 하려면 25MVA가 아니라 못해도 400MVA까지는 해야 한다. 지금 주력으로 만드는 변압기가 50kVA이니 무려 8,000배짜리다.
안타깝게도 그 정도는 지금의 기술력과 공장, 인력, 자금으론 어림도 없다. 25MVA짜리도 빨라야 연말이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서두를 생각은 없다. 5층 건물만 한 변압기를 만들려면 아무리 빨라도 5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 내가 입버릇처럼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얘기한 것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장님. 전력용 변압기는 배전용이랑 차원이 다르니까 설비 제작할 때 신중하셔야 합니다. 돈도 돈이지만, 안전을 제일 신경 쓰셔야 해요.”
“사고 안 나게 잘해야지. 설비도 엄청나게 커질 텐데 아차 하면 큰일 나니까 말이야.”
우리가 만들 전력용 변압기도 당연히 지금의 방식을 적용한다. 기술이야 자꾸 만들고 뜯어고치다 보면 얻을 수 있지만, 지금 같은 고수익은 기상천외한 설비가 뒷받침하지 않고서야 어렵다.
자동권선기도 지금보다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부싱체결기도 지금처럼 메고 다니며 작동할 수 없을 것이다. 집채만 한 변압기에 들어가는 부싱을 고정하는 너트만도 사람 상반신만 하니 말이다.
커지는 변압기에 따라 설비도 커지는데, 그만큼 안전사고 위험이 높아진다. 이전의 사고가 타박상 정도라면 앞으로 사고는 골절이나 추락이 될 것이다. ‘괜찮아, 안 죽어’가 유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아무쪼록 올해도 고생 좀 해 주세요. 우리 설비도 계속 업그레이드해야 하고, 새로 만들기도 해야 하고, 할 게 많네요.”
“만들기만 하면야 좋지. 이젠 공부도 해야 돼. 전력용 변압기는 아예 다른 품목이더라고. 하나씩 새로 배워야 해. 근데, 김 이사는 대용량 변압기라고 부르대? 서로 같은 거지?”
“이게 명칭이 제각각이긴 해요. 엄밀히 따지면 대용량이나 초고압 변압기로 부르는 것이 맞는데, 대한전력에서 배전용이랑 전력용으로 구분하니까, 대부분 용량 큰 걸 전력용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그렇지? 난 또 뭘 잘못 알고 있나 했지. 나도 변압기 좀 안다 싶었는데, 아직도 모르는 것투성이야.”
“올해 지나면 변압기 박사가 돼 있을 겁니다. 하하.”
전력용 변압기 생산이라는 변압기회사 최종 목표로 가기 위해서는 나도 부지런히 공부해야 할 참이다. 사장 하는 일이란 것이 마을 어귀에서 뒷짐 지고 바둑판 구경하는 훈수꾼 노릇이지만, 공부를 안 하면 훈수꾼이 아니라 시비꾼이 되는 것이다.
공부도 공부지만 해야 할 일도 아주 많다. 생산직은 물론, 설계팀과 영업팀도 대폭 보강해야 한다. 머리가 살짝 지끈거리지만, 새로운 도전 과제에 힘이 난다.
덕준이 말대로 사업이 너무 심심했어. 회사 처음 세우고 나서 고효율주상변압기와 자동권선기 만들었을 때 그 기분으로 돌아가 열정을 불태울 생각을 하니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난다…… 개뿔. 죽어나겠네.
훈수꾼 역할이나 마저 하자고. 이번엔 연구실로 올라가 김진욱 이사를 찾아갔다.
“이사님! 담배 콜?”
“하하. 좋지요. 때맞춰 딱 와 주셨네요.”
의자와 혼연일체가 된 김 이사가 스트레칭을 하며 걸어 나왔다. 처음 공장장 혼자 도맡았던 설계가 지금은 김 이사를 대장으로 하는 5명의 팀이 커버하고 있다.
우리 회사 어디든 마찬가지로, 여기도 여전히 바쁘다.
관수 설계야 확정됐으니 손볼 것이 없지만, 민수 설계는 보고 또 보고, 뚫어져라 봐야 한다. 변압기에 돈 쓰기 싫어하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을 위해 싸고, 작고, 가볍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 앞두고 날이 좀 풀리긴 했네요. 며칠 전엔 그렇게 춥더니만요.”
몸이 찌뿌둥한 듯 이리저리 비트는 김 이사가 기온 변화를 느끼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사님, 운동하라고 까지는 못하겠지만, 만날 앉아만 있지 말고 스트레칭이라도 자주 하세요.”
“그래야죠. 이거 다른 직원들은 살이 쭉쭉 빠지는데, 저만 살이 찌는 것 같습니다. 하하.”
“그러게요. 이사님만 편하신가 봅니다. 일을 더 고되게 시켜야 하나 고민이네요.”
“아이고, 회장님. 왜 그러십니까? 이게 다 회장님께서 잘 대해 주셔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하다하다 이제는 살 찐 것도 내 덕분이 됐다. 뭐 보기 좋네. 중국 부호 같은 느낌도 나고.
“전력용 변압기 설계는 잘됩니까?”
화제를 돌리자 김 이사가 몸에 긴장을 불어넣으며 열중 쉬어 자세를 취했다. 일 얘기하면 프로로 변하는 이런 모습 참 좋아.
“아시겠지만, 금방 결과가 나올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일단 설비 설계에 윤곽 잡아 줄 정도로만 할 생각입니다. 대충 계산해 보니까 지금 설비로는 6MVA짜리가 최대일 것 같네요.”
“제가 전력용 변압기 시작해 보겠다고 하면서도 잘될까 걱정이 많았는데, 이사님 계셔서 아주 든든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저도 설계 빼 본 것은 15MVA짜리가 최대라 그 이상은 연구를 많이 해야 합니다. 설계대로 제품이 잘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단가 뽑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고…….”
김 이사가 강조하지 않아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전력용 변압기는 단가 책정부터 골머리를 싸게 만든다. 그냥 대충 용량에 곱하기 만 원 하고 나서 가감하는 잔챙이들과 차원이 다르다.
대당 천만 원 단위로 시작하니 어설프게 할 수 없다. 변압기 설치하려는 공장의 전력 사용량을 토대로 무부하, 부하 운전시간까지 계산해야 한다. 역시 두통엔 아세트아미노펜이다.
“지금까지 잘해 왔으니까, 이것도 차근차근 하다 보면 결실이 있지 않겠습니까? 설계 인원은 부족하지 않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쥐어짜야죠. 하하. 아직까지는 거뜬합니다. 제 지인 중에 현성중공업에서 설계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 꼬시는 중입니다. 넘어왔다 싶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성중공업요? 거기면 탑 아닙니까? 우리 회사 같은 하꼬방으로 오려고 할까요?”
“현성이 탑이면 뭐 합니까? 일이나 대우는 우리 회사가 더 좋을 겁니다.”
인재채용은 늘 옳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변압기회사에서 일하는 설계자라면 쌍수 들고 환영이지.
말도 안 했는데, 알아서 기술자들 데려오려고 꾀고 있는 이 사람. 살 더 찌는 것을 허하노라.
“역시 우리 이사님만 믿고 있으면 되겠습니다. 하하. 보니까 이것저것 많이 드시던데, 주전부리 필요하면 언제든 말씀만 하시죠.”
“이거 살을 빼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하하.”
흘러내리는 바지를 추켜올리는 김 이사를 다시 연구실 의자로 돌려보내고, 다음 행선지로 나섰다. 어딜 가든 기분 좋게 해 주는 직원들 덕에 발걸음이 가볍다.
ODI 사무실에 마련된 최형택 부장 아지트를 찾아갔다.
“최 부장님, 차 한잔하러 왔습니다.”
“아, 네. 회장님, 어서 오세요. 믹스 괜찮죠?”
부장인데도 독립된 공간을 배정 받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최 부장 혼자 지지고 볶으며 지내라는 황미연 사장의 배려 덕택이다. 이런 게 맞춤형 인재활용 아니겠나.
최 부장이 스틱 봉지로 휘휘 저은 믹스 커피 한 잔을 내왔다. 시간 뺏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요새 설비 다 뜯어고치겠다고 하던데요?”
“뭐, 제가 하는 일이 그거 아닙니까? 진짜 자동권선기는 누가 설계했는지 모르겠지만, 대박입니다, 대박. 그거 제대로 공부하고 나니까 온갖 것을 다 만들 수 있겠다 싶습니다.”
“말씀만으로도 듬직하네요. 김 이사님 설계 나오면 설비 설계도 대박으로 뽑아 보시죠.”
최 부장이 제대로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목이 말라 마음이 이미 우물가에 가 있는 듯하다. 빨리 나가란 소린가?
“네네, 그래야죠. 일단은 탭판이랑 방압변 설비부터 설계해야죠. 명판이랑 스티커 뽑는 설비도 직접 설계했으면 싶은데, 이게 시간이 없네요, 시간이.”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되겠네요.”
당장 일하게 시간 뺏지 말라는 의사를 확인했으니, 빨리 나가 주자.
쫓기듯 밖으로 나와서 담배 한 대 꺼내 물었다. 일 못해서 안달인 직원들 때문에 훈수꾼 노릇도 못하게 생겼다. 담배가 달디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