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45)
245 투트랙
설 연휴를 앞두고 회사가 미친 듯이 제품을 쏟아 냈다. 마당에는 변압기가 가득했고, 공장 내부에는 외함이 천장까지 쌓였다.
설이 토요일이라 월요일 대체휴일까지 쳐도 실상은 이틀 쉬는 것에 불과했다. 난 당연히 화요일까지 쉬는 것으로 결정했다. 5일 정도는 쉬어 줘야 명절 보낼 기분이 나지 않겠나!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직원들이 단내가 펄펄 나도록 물량을 뽑아내 버렸다.
설을 평온하게 보내고 싶고, 2월 대한전력 물량질에 당하지 않겠다는 직원들의 굳은 의지가 만들어 낸 작품들이다.
나주 공장에서 일 시작한 지 1년하고 8개월째이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 직원들은 베테랑이 돼 갔다. 압축성장이 가져온 장점이랄까?
설 연휴 전날 공장 건조로에서 뜨끈뜨끈하게 건조된 중신 2천 개를 완성품으로 조립하는 것을 끝으로 회사가 조용해졌다.
현장 직원들은 스팸 선물세트 하나씩 손에 쥐고 공장을 벗어났다. 그래 봐야 대부분은 기숙사로 향했지만.
스팸이 돈 좀 벌었다는 회사의 명절선물로 적합한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선물세트 중에서 제일 싼 샴푸 세트가 아닌 것만으로도 제 역할을 다 했다는 안이함이 아닐까 싶었다.
5만 원짜리 선물을 주고도 너무 싼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로 회사가 성장했다는 생각에 살짝 뿌듯해졌다.
“과장님!”
사무실 직원 중 유일하게 승진한 김지연 과장을 불렀다.
땡 하면 칼같이 퇴근하는 현장 직원과 달리 사무직들은 내 눈치를 그리 본다.
내가 있든 말든 시간 되면 퇴근하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듣질 않는다. 좋아 보이진 않지만, 회사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데 뭐 어쩌겠나.
“네, 회장님! 저희 안 그래도 퇴근하려고 했어요. 너무 뭐라 그러지 마세요.”
김 과장은 이제 퇴근하라는 잔소리에도 이골이 났다. 부르기 무섭게 차단 신공부터 발휘한다.
“이제 신경 안 쓸 테니까 퇴근 알아서 하세요.”
“어머? 웬일이래요? 평소 같으면 퇴근하라고 들들 볶았을 텐데요. 호호.”
“퇴근하라고 하면 잔소리한다고 뭐라고 하고, 아무 말 안 하겠다고 하면 그것 가지고도 뭐라 하고. 이러나저러나 똑같네요.”
“회장님도 이제 결혼하실 것 아니에요? 제가 미리 훈련시켜 드린다고 생각하세요. 푸하하.”
김 과장이 화통하게 웃어재끼며 잔소리를 달게 받으라 한다.
행복한 결혼생활까지 걱정해 주는 김 과장의 깊은 뜻에 눈물이 앞을 가릴 정도다. 내가 진짜 축의금 얼마 내는지 유심히 보겠어!
“그나저나 명절 선물세트 반응은 어때요? 또 스팸이냐고 안 해요?”
“아휴. 불만 있는 애들은 뭘 줘도 불만이에요.”
“그렇긴 하죠.”
“이거 주고 나면 한 몇 달은 기숙사 재활용 쓰레기통에 캔이 가득해요. 그게 다 좋다는 뜻 아니겠어요? 입맛 없을 때 기름에 노릇노릇 튀겨서 밥이랑 같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요! 김까지 있으면 최고죠.”
김 과장의 설명에 광경이 연상돼 버렸다.
고슬고슬 잘 지은 흰 쌀밥에 얇게 튀겨 낸 스팸이라면 사기적인 조합이지. 점심 먹은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침 고이게 한다. 가만, 내가 침 흘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반응 좋으면 다행인데, 가끔씩은 홍삼이나 건강식품 같은 것도 주면 어떨까 해서요. 아니면 금액 정해 놓고 원하는 물품으로 사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고.”
말을 꺼내는 동시에 김 과장의 잔소리가 두려워졌다. 이번엔 무슨 잔소리를 할 것인가 기대도 된다.
“회장님께서 더 좋은 걸로 주겠다고 하시면 그렇게 하겠는데요, 지금도 충분해요. 직원들한테 아주 잘해 주시고 있다니까요! 제가 말로만 이러지 말고 직원들 만족도 조사라도 한번 해서 결과 보여 드려야겠어요. 연휴 끝나면 바로 해서 결과 가져올 테니까 기다려 보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좋은사장병’ 걸리면 약도 없다는 말 잊지 않고 있습니다.”
명절 떡값이라도 주자고 했으면 아주 호되게 혼났을 것 같은 분위기다.
돈 관리하는 직원이 돈 쓰는 문제에 관해서만큼은 거침없이 얘기하니 더할 나위가 없다. 외규장각 도서 반환하겠다고 하니 극렬하게 반대했다는 프랑스 국립박물관 직원들이 생각난다.
책 생각을 하니, 아니나 다를까 김 과장이 자기 자리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자기계발서 한 권을 들고 왔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책인데!
“회장님! 저 이 책 다 읽었는데, 한번 읽어 보실래요? 방금 하셨던 말도 이 책에 나와 있어요. 좋은 문구들이 참 많더라고요. 직장 생활하는 데 참 도움이 돼요.”
한때 자기계발서가 유행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힐링책이랍시고 시답잖게 청춘 운운하는 책들이 대세다.
고통과 스트레스를 돈벌이로 이용하려는 수작처럼 느껴졌다.
사회 모순과 구조적인 불평등은 모르쇠로 일관하며,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라는 둥, 다락방에서도 꿈을 꾸라는 둥, 청춘이 겪는 실패는 보약 같은 거라는 둥 헛소리 하며 돈 버는 작태가 못마땅하다.
연휴 앞두고 마음이 여유로워서 그런지 오만 생각을 다 하네.
“전 괜찮습니다. 과장님이 종종 좋은 문구 소개해 주세요.”
“네에. 아! 하나 생각났어요. 회계팀이 창의력을 발휘하면 사장이 감옥 간대요. 호호호. 정말 웃기지 않아요?”
“어이쿠. 과장님은 창의력 발휘하지 말아 주세요.”
“호호. 전 시키는 일만 해요. 우리 회장님 감옥 가게 하면 안 되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인 김 과장을 보내고 최윤근 상무를 호출했다.
이 일중독인 최 상무는 제시간에 퇴근한 것을 본 적이 없다.
덕분에 회사가 질적으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오자마자 손본 공정 프로세스가 현장 직원들 손에 익으면서 불량이라는 단어가 사라졌다.
대한전력 납품 2년차 동안 한 번도 불합격 판정을 받은 적이 없지만, 그것은 자체 테스트로 철저하게 가려냈기 때문이었다. 만드는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불량도 꽤 나왔다.
제품 불량은 검사부와 생산부의 갈등을 야기하는 악성 종양이다. 최 상무 덕에 두 부서의 친목이 가능해졌다.
불량은 확실히 줄었다. 불량이 나올 수 없는 매뉴얼. 최 상무가 아니었으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손대는 것마다 선진적으로 바뀌는 것 같은 느낌. 아주 좋다.
“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오늘도 늦게 퇴근하시려고요? 다른 직원들 다 퇴근했는데, 상무님도 일찍 들어가시죠?”
“허허. 그래야죠. 이것저것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네요.”
잔소리는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상무님. 요새 대한전력 분위기 좀 어떤가요? 입찰 유자격업체 중간실사 제대로 해서 피바람 날 거란 얘기가 있던데요.”
“말씀 잘하셨습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편하게 앉아 있던 최 상무가 허리를 앞으로 숙이면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낼 준비를 마쳤다.
“안 그래도 좀 전에도 후배 몇 하고 통화 좀 했습니다. 이춘배 부사장이 가만 안 있을 모양인 것 같습니다. 춘배를 잘 아시겠지만, 아주 원칙주의자 아닙니까? 그런 사람을 잡겠다고 그 사단을 일으켰으니 규정대로 하겠죠.”
예상대로 기분 좋은 대답에 난 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대한전력이 규정대로 해 버리면 남아날 업체들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
“그럼요. 유자격업체 신규 실사만 가도 겨우 합격하는 판인데, 중간실사까지 제대로 해 버리면 대거 탈락할 겁니다.”
“그 정도입니까?”
“말도 마세요. 솔직히 대기업은 대기업이라고 봐주고, 중소기업은 중소기업이라고 봐주고, 너무 봐줬죠. 그래도 우리 회사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최 상무의 말이 더없이 든든하게 들렸다. 대한전력 출신이니 걱정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규정 제대로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라는 뜻이기에 그렇다.
“변압기 쪽도 꽤 타격이 있겠죠?”
“제가 3년 전에 배전분야 평가관으로 업체 좀 돌아다녔지 않습니까? 엉망인 곳이 태반이었지요. 솔직히 불합격 줘도 아무 말 못할 수준이에요. 그런 업체들이 지금이라고 뭐 달라졌겠습니까? 최소한 6개월 이상은 입찰자격 제한받을 겁니다.”
“6개월이라면 올해 8월 입찰 참여 못할 거란 말씀이시죠?”
“춘배도 그걸 노리는 것이겠죠. 지금 말 나오는 것이 변압기부터 시작한다고 하니까, 결과는 3월이나 4월쯤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럼 올해 입찰 못 들어오게 하겠다는 뜻이겠지요.”
좋다, 좋아. 강호창 사장이 전해 준 말과 완벽하게 크로스체크가 됐다.
문제는 고발로 시작된 수사가 빨리 마무리돼야 한다는 것이다.
말로는 무혐의로 수사 종결할 것이라고들 했다. 하지만, 결론을 차일피일 미루기 시작하면 이춘배 부사장이 전면에 나서기 어려워질 것이다.
최 상무가 여전히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어차피 일찍 퇴근하긴 글렀고 다 들어 주자.
“회장님, 제가 봤을 때는 진짜 무서운 것은 직접생산 확인입니다. 그거 걸리면 대한전력 입찰은 포기해야죠.”
“이쪽 업체 상당수가 하청 돌리는 것이야 공공연한 비밀이긴 한데, 그건 대한전력이 점검하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변압기 쪽 실사야 진흥회가 위탁받아서 하는데, 거긴 대한전력이나 마찬가집니다. 대한전력에 있던 사람들이 죄다 거기 가 있지 않습니까? 대한전력이 기침 한 번 하면 진흥회도 꿈틀하는 법이죠. 허허.”
“이러나저러나 부사장님 죽이겠다고 덤빈 업체들은 이번에 호되게 당하겠군요.”
최 상무가 생각만 해도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우리 회사 직원이기 전에 그걸 바랐던 눈치 같다.
“변압기가 대한전력에서는 그래도 규모가 좀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업체들도 많고, 아주 개판이에요. 언제 한번 정리해야 된다 싶었는데, 이번에 기회가 찾아왔다고 봐야지요. 춘배야 그럴 만한 의지와 능력을 갖췄으니까 가만 넘어가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난데없이 압수수색에 검찰 조사까지 받아서 어떻게 되갚아 줘야 하나 싶었는데, 아주 잘된 일 같습니다.”
나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최 상무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저 뜨뜻미지근한 표정은 뭐야?
“회장님. 이건 주제넘는 소리입니다만…….”
“편하게 얘기하세요. 주제넘는지 안 넘는지는 제가 판단합니다. 그리고 전 주제넘는 얘기도 잘 듣습니다. 하하.”
직언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늘 조심스러워하는 저 자세, 아주 맘에 든다. 저런 사람이 우리 회사 오겠다고 먼저 요청할 정도였다니. 나도 참 인복 터진 사람이다.
“아직 뭐 결론이 난 것은 아니지만, 대한전력한테만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우리 회사가 이렇게 당했는데, 가만히 있으면 되겠습니까? 특히 광진변압기 같은 회사는 가만 둬서는 안 돼요. 최 사장이 조합 이사장이라고 얼마나 막무가내였는지 아십니까?”
맘에 쏙 드는 말을 미리 해 주다니! 나야 당연히 가만있을 생각이 없지!
“하하. 저도 저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놈들이 법으로 문제 삼고 나섰다면, 저도 똑같이 해 줘야죠. 근데 최웅민 이사장이 대한전력 가서 행패라도 부렸습니까?”
“행패다마다요. 툭하면 찾아와서 발주량 늘려라, 균등발주해라, 조합 입찰에 혜택을 줘야 한다, 뭐 별의별 소리를 다 했지요. 그나마 본사가 나주 내려가서 뜸해졌지, 삼성동에 있었을 때는 거참.”
“그런데도 대한전력하고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까?”
“술 엄청 사 먹였죠. 어지간한 처장급들을 강남에 비싸다는 룸살롱에 출근부 찍게 할 정도로 데리고 다녔을 겁니다. 그것도 옛말이긴 한데, 아마 성호 기수가 마지막이었을 겁니다. 그나마 성호도 최 사장이 과하게 구니까 거리를 두긴 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붙어먹네요. 허허.”
김성호 본부장도 생각해 보면 머리가 참 안 돌아가는 놈이다. 이용할 사람이 그리 없어서 중전기조합과 손을 잡았으니 말이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말도 안 되는 고발이라니 참.
“상무님하고 이 부사장님은 최 사장하고 거리를 두셨나 봅니다?”
“저도 그렇지만, 춘배도 그런 것을 질색합니다. 김영란법 나왔을 때 다 걸려도 춘배는 안 걸린다고 했었지요. 허허. 그런 사람을 횡령범 취급을 했으니 말 다 했죠.”
괜한 오해 사지 않으려고 이춘배 부사장과 연락을 끊었지만, 지금쯤 부글부글하고 있을 모습이 선하다. 강호창 사장과 최 상무가 전해 주는 소식만으로도 충분히 보인다.
기력을 회복한 이 부사장의 공격과 내가 감행할 공격. 투트랙 전략이 맞아떨어질 그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깡그리 죽이고 올해 입찰에서 화끈하게 재미를 보자고.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