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50)
250 진한 커피
대한전력 2월 1차 발주를 납기 마감 6일 전에 끝내 버렸다.
“하하. 이게 뭡니까?”
우리 첫 납품을 검사하러 왔던 시험관 이신웅 과장이 산란기가 된 연어처럼 다시 돌아왔다. 대한전력 자재검사처 시험관들이 로테이션을 돌 정도로 시간이 흘렀다는 뜻.
다시 우리 회사를 찾은 이 과장은 검사부에 들어가자마자 크게 놀랐다.
“아니, 다른 회사들은 대부분 연체 먹었는데, 여긴 무슨 깡으로 이렇게 빨리 시험 의뢰를 했습니까? 그건 그거고, 무슨 변압기가 이리 많아요? 아이고, 죽어나겠네요.”
두 번 놀란 이 과장이 진짜로 놀라야 할 것은 처음 왔던 1년 5개월 전보다 우리 회사가 몰라보게 발전했다는 것이어야 한다.
캐파가 무려 4배나 늘어났고, 직원도 5배가 늘었다. 그 덕분에 매출이 8배나 뛰었다. 내 재산도 무지막지하게 늘었다는 것도 자랑이다. 후훗.
“하필 물량 제일 많을 때 우리 회사 시험을 맡게 되셨으니, 이거 무슨 말로 위로를 드려야 합니까? 하하.”
“이거 참. 다음에는 2월은 무조건 피해야겠네요. 이게 다 몇 대입니까?”
“총 9,190대입니다. 시험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일찌감치 시험 의뢰했습니다.”
“9천 대요? 어이쿠야. 며칠 출퇴근해야겠네요.”
크게 놀란 이후 걱정만 하는 이 과장을 적절하게 달래 주는 것이 내 역할이다.
“검사할 양이 많긴 한데,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시험설비 한 세트 더 늘렸고, 검사인원도 크게 늘어났으니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과장님 빨리 퇴근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허허. 지금 2년 차죠?”
“네, 맞습니다. 1년만 더 불량 없으면 시험면제입니다. 시험관님들 고생하지 않도록 시험면제 꼭 받겠습니다.”
대한전력 납품을 2년 동안 불량 없이 처리하면 엑설런트 등급으로 올라가고, 거기서 1년을 더 유지하면 엑설런트 S등급으로 검수시험면제라는 혜택을 받는다. 시험면제만 받아도 엄청난 이득이다. 절약되는 전기 요금만 몇억은 될 것이다. 1년만 더 확실하게 하자고.
금방 끝나는 1차 시험만 이틀이나 걸렸다. 시험관 이 과장은 오히려 걱정이 더 많아진 표정이다.
“2차 시험은 또 어떻게 합니까? 이거 답이 안 나오네.”
“주말 잘 보내시고, 2차 시험하러 오실 때는 꼭 반팔 챙겨 입고 오세요. 아마 몸이 녹아내릴 정도로 후끈할 겁니다.”
“하하. 이거 참. 각오하고 오겠습니다.”
이 과장이 부하 걸린 변압기 9,190대가 뿜어내는 무지막지한 열기를 상상하기도 싫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음 주에 있을 2차 시험도 대단하겠지만, 전국에서 몰려온 트럭에 변압기 싣는 것도 장관일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99억 원 시원하게 꽂힐 것이다. 올해도 시원하게 벌어 보자고.
“시험하느라 고생하셨는데, 저녁 식사나 하시죠?”
제법 친해진 시험관이라 저녁대접 소리도 거리낌 없이 나왔다. 처음 우리 회사 왔을 때 그리 차갑게 굴던 사람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상전벽해다.
“이거 어쩌죠? 선약이 있어서 안 되겠는데요. 2차 시험까지 다 끝나고 나서 식사하시죠.”
“제가 미리 말씀드릴 걸 그랬습니다. 그럼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죠. 어차피 회사 들어가 봐야 또 일하셔야 할 것 아닙니까? 여기서 쉬시다가 퇴근 시간 맞춰서 들어가시죠.”
“하하. 좋죠. 시간 애매하게 남았는데, 시간 좀 때우고 가죠.”
가려는 이 과장을 굳이 잡았다. 이 바닥 일을 시험하러 다니는 사람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친분 쌓으면서 정보 좀 캐자고.
검사부 사무실에 진한 커피향이 퍼져 나왔다. 캡슐커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이를 즐기기 위해 거금 350만 원을 들여 에스프레소 머신 하나 장만한 덕이다.
“프라임일렉트릭은 커피 한 잔도 퀄리티가 다르네요.”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커피머신에서 내린 겁니다. 하하. 혁신산단 오셨다가 커피 생각나면 언제든 들러 주세요.”
“커피 한 잔 마시니까 좀 살 것 같네요. 여기만 해도 이렇게 물량이 많은데, 혁신산단 업체 다 돌아야 하니 아주 죽겠습니다.”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찾아오자 이 과장이 알아서 말문을 텄다. 업체와 유착 생긴다고 물 한 잔 못 먹게 한다지만, 사람 일이란 것이 그럴 수 없는 법이지. 자꾸 보다 보면 친해지기 마련이야.
“다른 업체들은 연체 먹은 데 많죠?”
“솔직히 이 물량에 연체 안 먹는 것이 이상하죠. 프라임일렉트릭 같은 곳 말입니다. 연체도 걸리고 불량도 맞고 해야지, 너무 완벽한 거 아닙니까?”
“과장님 편하게 해 드리려고 시험면제만 생각하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하하. 그나저나 아시아전기는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연체 꽤 걸렸다고 하던데요.”
작년 4분기 관할 구역으로 인천, 김포를 맡은 사람이니 상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생생한 정보를 건네 다오.
“아시아전기는 진짜…….”
이 과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문제가 많았습니까? 연체에 불량까지 말이 많더라고요.”
“거기 갈 때마다 엄청 싸웠어요. 아니, 능력이나 갖추고 물량을 받았어야죠. 어지간한 것들은 눈감아 줄라고 해도 시험해 보면 터무니없이 나오니 별수 없죠. 최소한 철손, 동손은 맞춰 놔야 하는 거 아닙니까?”
“기본도 안 해 놨으면 불량 맞아도 할 말이 없죠.”
“그 사람들은 안 그래요. 직원들 다 와서는 이게 왜 불량이냐고 그러는데, 아휴, 진짜. 제가 많이 참았죠.”
갑 중의 갑인 대한전력, 그것도 납품 검사하는 시험관한테 큰소리칠 줄 아는 그 패기는 인정한다. 그 패기가 회사 말아먹는 하이패스일지는 몰랐을 것이다.
“아시아전기가 과장님한테 이를 간다는 얘기가 있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군요?”
“그딴 소리를 해요? 하아, 진짜. 불량 면하게 해 달라고 봉투 내민 거 신고할라다 봐줬더니, 가지가지 하네요. 불량 때리니까 막 대들더니, 갈라니까 봉투를 줍디다.”
“그거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제가 그런 거 받을 사람입니까? 그래 놓고 나중에 여차하면 찌를 거 뻔히 아는데…….”
이 과장에게서 커피로 찾은 여유가 사라졌다. 불량 판정을 놓고 아시아전기랑 티격태격한 것이 생각나 불쾌했을 것이다. 돈으로 입막음하려는 짓은 21세기가 된 지 한참이 됐어도 여전하군.
“그래도 이번에 중전기조합으로 다시 들어가서 좀 나아지긴 했을 것 같네요.”
“제가 연말에 10월 2차분까지 시험 보고 나왔으니까 엄청 연체됐었죠. 지금 담당한테 물어보니까 연체 많이 줄였다고는 하더군요. 중전기조합 걔들도 지금 벼르고 있어요.”
아이쿠야, 이건 무슨 우물에서 숭늉 나오는 소리인가?
“중전기조합이 또 행패라도 부렸습니까?”
“거긴 진짜 버르장머리를 고쳐 놔야 해요. 아니, 우리가 기준에 맞춰서 시험한다는데 툭하면 처장님한테 전화해서 난리예요. 아시아전기가 중전기조합 들어가자마자 그러니 화가 안 나겠습니까?”
이 과장이 나에게 언성을 높였다. 중전기조합 놈들아, 배전분야 시험 대빵을 언짢게 한 죄 달게 받거라.
대한전력에 납품하는 회사 중 짬밥 좀 되는 회사들은 거만하게 굴 때가 종종 있다.
대기업이었으면 찍소리 못했겠지만, 대한전력이 공기업이니 가능한 짓일 것이다. 그래서 대한전력도 시험관들에게 목에 깁스하라고 교육하는 것일 테다.
“거긴 진짜 여전하네요. 그래서 저희가 새 조합 만들었지 않겠습니까?”
“여기야 문제도 없죠. 처음엔 나주 검사 맡으라고 하면 싫어했어요. 다들 서울 사는데 누가 여기 내려오고 싶겠습니까? 그래도 여긴 스트레스받게 하지 않으니까. 석 달 떨어져 살아도 일이 편한 게 좋습디다.”
“하하. 앞으로도 품질, 납기 문제없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시험이 강화되는 겁니까?”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자재검사 강화하라고 지시사항 내려왔어요. 이참에 저 위쪽 회사들 쓴맛 좀 보게 해 줘야죠. 대한전력 알기를 우습게 아는 놈들이 있다니까요.”
위쪽 회사라면 수도권에 있는 중전기조합 회사들 말하는 것이겠지? 이춘배 부사장이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가하는 모양이다. 좋아, 아주 좋아.
“아휴, 저희는 빨리 3년 차까지 무사통과해서 시험면제받아야겠습니다.”
“제발 프라임일렉트릭은 그렇게 좀 해 주세요. 불량 없어서 편하긴 한데, 이게 뭐 한두 대여야지……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전 일어나야겠습니다. 커피 잘 마셨습니다.”
“커피 생각나시면 언제든 오세요.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이 과장이 차를 타고 회사를 빠져나갔다. 시험관들이 중전기조합 업체들 벼르고 있다는 소중한 정보 감사합니다.
니들은 어떻게든 죽게 생겼다. 내가 무덤 잘 파 놨으니까 묻힐 준비나 하셔. 난 퇴근할 테니까.
퇴근하려고 사무실로 올라가니 박아름 대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왔다.
“회장님! 2차 발주 나왔습니다. 총 6,720대이고, 금액으로는 73억 원입니다.”
“2차 발주가 벌써 나왔어?”
“18일이 주말이라 하루 먼저 나온 것 같습니다.”
“2월에만 16,000대나 쏟아 냈네. 대한전력도 참 대단하다. 박 대리는 공장장님하고 상의해서 생산계획 잘 짜고, 자재 잘 체크해. 수출도 계속 나오니까 당분간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해.”
“네, 회장님. 꼼꼼하게 확인하겠습니다.”
내 방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아 한숨을 내쉬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보나 마나 유민희일 것이다. 역시나.
“어, 그래. 출장 준비는 다 했지?”
“네, 회장님. 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더 좋은데…….”
“또 딴 길로 샌다.”
“네. 근데 하나 더 있는데…….”
“또 뭐!”
“저…… 다음 달에 기대해도 되죠? 이건 그냥 서로 선물 주고받는 거예요. 뭐라 하지 마세요. 헤헤.”
민희의 애정은 여전하지만, 강도는 많이 약해진 것 같다. 밸런타인데이라고 책상에 올려놓은 초콜릿 상자만 봐도 느껴진다. 금박으로 싼 초콜릿에 돈 좀 쓴 것 같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우리나라 4대 명절이 된 밸런타인데이가 언제부턴가 초콜릿 따위로는 성에 안 찬 날이 됐다. 명품 넥타이나 향수가 기본이 될 정도로 과해졌다.
혹시나 민희가 비싼 선물을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초콜릿으로 끝냈으니 양치만 잘하면 될 것 같다.
캐러반의 낙타가 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노력 덕분일까? 간사한 것이 사람이라고, 살짝 아쉬운 마음도 있다.
“목캔디 한 박스 사다 줄라니까 잔말 말고 출장 준비나 잘해.”
“헤헤. 준비랄 것도 없어요. 가서 통역 노릇 잘하고, 창저우트란스퍼 가서도 얘기 잘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가서 희철 사장님이랑 김 사장 잘 보좌하고. 리 종하고 양 종한테 안부 잘 전해 줘. 네 역할이 가장 중요한 것 알지? 잘하고 오면 상점 줄 테니까 실망시키지 말고.”
“넵!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참! 면세 담배도 사 올게요. 헤헤.”
민희가 씩씩하게 대답하며 내 방을 나갔다.
씩씩함 그대로 중국 가서 성과를 낼 것으로 믿는다. 내가 복수에 혈안이 돼 있는 동안에도 회사는 성장 호르몬 분비가 왕성했다.
두 김 사장이 내 뒤를 이어 대륙 진출을 선언했다. 김희철 사장은 폴리머부싱을, 김신우 사장은 코아를 수출하겠다는 각오를 행동으로 옮기기로 했다.
물건 팔러 중국 가겠다는데 좋고말고. 관광도 하고 오라며 일정 넉넉하게 잡으랬더니, 3박 4일로 가겠다더라. 나도 길어야 고작 2박 3일이었는데…… 부럽다.
나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두 김 사장에게 전적으로 맡기기로 했다. 가족들이 알아서 잘하고 있으니, 이제 해외는 출장이 아닌 휴양으로 가도 될 것 같다.
은하무역 김상진 사장이 전력으로 서포트하기로 했고, 현지인이나 마찬가지인 민희도 있으니 뭐. 그러고 보니 김 사장만 세 명이네.
중국에 자재 수출하는 것은 김 사장 트리오에게 맡기고, 난 중전기조합 죽이기에 전념하자고. 회사 대장이 돈 버는 일을 마다하고 잔챙이 소각이나 신경 쓰는 아이러니. 빨리 죽이고 팔자 좋게 좀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