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52)
252 미스터리
준희 누나와 함께 먹는 저녁이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하고 맛있다. USB라는 훌륭한 선물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 자료를 넘겨준 광진변압기 직원이 걱정됐다. 나이 먹고 오지랖이 넓어졌다기보다, 삶에 여유가 생기니 주변을 돌아보는 여유도 생겼다고 할까?
“그나저나 광진변압기 직원은 괜찮을까요? 뭘 믿고 통째로 다 넘겼대요?”
“자료 건네준 직원 걱정은 안 해도 돼요.”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한 누나. 대비를 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연히 걱정이 되죠. 걸리면 해고는 기본이고, 고소로 사람 미치게 만들 건데요. 저 도와주겠다고 그런 봉변을 당하면 안 될 일이죠.”
“중소기업 보안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자료 누가 빼돌렸는지 알 길이 없어요. 그리고 와이로도 충분히 먹였으니까 걱정 마세요.”
편지 보냈는데 띄어쓰기 틀렸다고 첨삭해서 보낼 것 같은 누나가 속어를 구사하니 이상하게 매력이 폭발한다. 간혹 보여 주는 색다른 모습이 사람을 미치게 하는 법인가 싶다.
“와이로? 하하. 그런 말도 쓸 줄 알아요?”
“아휴, 저도 알 건 다 알아요. 누가 들으면 내가 독일에서만 살다 온 사람인 줄 알겠네. 뇌물은 아니고 뭐 딱히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네요. 하하.”
누나가 광진변압기 직원이 왜 기꺼이 자료를 넘겨줬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첫 숟가락을 뜬 마파두부가 바닥을 보일 때까지 얘기가 끝나지 않았다.
“뭐 많이 당해서 그랬을 거라 짐작은 했는데, 아니 그걸 왜 참고만 있었대요? 음담패설만으로도 혈압이 오를 텐데, 그걸 가만히 둬요?”
살짝 화가 났다. 직장 내 갑질도 수명을 단축시킬 정도로 스트레스를 주는데 성적인 괴롭힘까지 받았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진짜 우리나라 좆소기업 월급쟁이들 힘내라.
“회사가 좋아서, 아니면 일이 좋아서 다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요? 돈이 아쉬우니 그렇죠.”
“아니, 아무리 돈이 아쉬워도 그렇죠. 위아래로 훑어보고, 몸 툭툭 건드리고. 그건 성희롱이 아니라 성추행 아니에요? 그걸 참아요?”
누나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표정이 좀 애매하다.
“이게 뭐랄까요. 익숙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 게 있어요. 기분은 나쁘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내가 과민하게 받아들이나 생각하게 되고. 나중에는 스스로를 옥죄기도 해요.”
“에휴. 뭐 저야 공감은 해도 이해는 못하겠죠. 세상 많이 좋아졌다고 해도 아직 멀었나 보네요.”
“그 직원이 형편이 좋지 않다고 해요. 이혼했는데 전 남편이 양육비조차 안 준다더라고요. 거기에 부모 뒷바라지도 해야 해서…… 뭐 기분 나빠도 참는 거겠죠. 그리고 차라리 대놓고 그러면 퇴사 각오하고 신고하자 이러는데, 애매하게 그러면 고민하는 경우가 많아요.”
식구들 먹여살리겠다고, 쓰레기 같은 회사에서 쓰레기 같은 사장이랑 같이 일하느라 고생이 많다. 이 나라는 어렵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 거야?
“최웅민 그놈은 그냥 회사 망하게 하는 정도로 끝내서는 안 되겠네요.”
“그래서 저도 이렇게 열심히 움직이잖아요.”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 받으면서도 생계 때문에 참아야 한다는 말이 참 속상하네요. 그래서 와이로를 얼마나 먹였기에 그래요?”
“정수 씨 덕분에 회사가 커졌잖아요. 호호.”
광진변압기 최웅민 사장의 악행을 얘기하며 흥분했던 누나가 뿌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직원으로 뽑겠다는 겁니까?”
“나주로 내려와야 해서 고민하는 것 같은데, 원하면 언제든지 채용할 테니까 아무 걱정 말라고 했죠. 연봉도 훨씬 많이 올려 주기로 했어요. 광진변압기 월급 보니까 에휴, 말이 안 나와요.”
“혹시나 내려오기로 결정되면 집 걱정은 말라고 하세요. 아파트 전세로 싸게 살게 해 줄게요. 혁신도시가 애 키우기 좋다고도 꼭 얘기해 주세요.”
“그것도 좋죠. 정수 씨랑 프라임일렉트릭이 혁신도시 아파트는 다 샀다고 하더니 그 말이 진짜인가 보네요? 하하.”
최웅민의 악행을 안주 삼아 주문한 요리를 홀짝홀짝 먹다 보니 접시 위에 한두 숟가락 정도의 음식만 남았다.
저걸 누가 먹느냐 눈치 보다가 결국 아무도 안 먹는다는 미스터리. 집에서는 밥그릇에 밥알 붙어 있으면 혼나기 마련인데, 돈 내고 먹는 음식점 요리는 남겨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
누나가 그 묘한 기분에 기름을 부었다.
“그나저나 얘기하다 보니까 다 먹었네요? 식사는 뭐 할 거예요?”
진짜 미스터리가 나왔다. 고기 잔뜩 먹어서 배부른데 식사해야 한다면서 밥이나 냉면을 시켜야 하는 미풍양속.
중국집은 아예 요리류, 식사류로 메뉴까지 나눠 놨다. 요리는 식사가 아니니 짜장면이나 볶음밥을 꼭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 식사에 대한 이 뜨거운 집착. 난 기꺼이 짜장면으로 하겠다.
배불러 이걸 어찌 먹나 싶다가도 짜장면 냄새는 뇌를 마비시킨다. 위장은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다더니, 인체의 신비가 경이로울 따름이다.
“아휴, 배불러. 정수 씨 잘 먹었어요. 이걸로 선물 값 퉁치는 게 아쉽긴 하지만요. 앞으로 지켜보겠어요. 호호.”
“하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배부르니 간단하게 커피 한잔하러 가죠?”
이것도 미스터리다. 간단히 커피나 한잔하자고 해 놓고, 왜 치즈 케이크와 티라미슈를 시켰을까? 후식 배는 따로 있다는 진리를 몸소 실현한 내가 놀라울 지경이다.
“누나 선물 덕분에 좀 바빠지겠네요.”
“저도 틈틈이 자료 읽어 볼게요. 대충 봐도 혼자 볼 양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정수 씨 복수하는 데 한몫 담당해야죠.”
대한전력 물량 터져서 날마다 야근하면서도 나를 도와주겠다는 저 갸륵한 마음. 맘 같아서는 며칠이고 합숙하면서 자료 분석하고 싶다.
“말만으로도 고마워요. 제 일인데 민폐 끼치면 안 되죠.”
“민폐라뇨. 서운한데요. 정수 씨 일이 아니라 우리 일이에요.”
‘우리’라는 말, 단 두 글자이지만 참 좋다. 나와 나, 다른 존재이지만, 동행의 시간이 우리로 만들어 줬으리라.
“무슨 생각 하길래 대답이 없어요?”
누나의 목소리가 망상에 빠져드는 나를 끌어냈다. 우리란 말에 장그래로 빙의할 뻔했네.
“아, 네, 뭐. 누나도 그렇고 강 사장님도 그렇고, 자기 일처럼 나서 주는 것이 고마워서 혼자 감동에 빠져 있었네요.”
“무슨 감동까지. 삼총사라면서요? 삼총사면 서로 그렇게 하는 것이 맞죠. 그리고 고맙다면 앞으로 설비 주문할 때 납품 좀 빨리 해 주세요. 하하.”
“다음에 설비 공급할 때는 진짜! 빨리 납품하겠습니다.”
자동권선기도 그렇지만, 부싱체결기도 납품이 그리 늦었어도 인내해 준 게 고맙다. 그 비싼 가격을 치르고도 재촉하지 않은 것은 굳건한 동료애가 아닐까? 이쯤에서 선물 하나 줄까 보다.
“그나저나 개발은 어떻게 되고 있어요? 소음 잡았어요?”
누나 표정이 밝지 않은 것이 여전히 답보 상태인 듯하다.
“패드는 거의 다 됐는데, 아몰퍼스가 계속 걸려요. 바쁜데 개발까지 하려니 쉽지가 않네요.”
“역시 소음이 걸리는 건가요?”
“네, 맞아요. 소음 줄이려고 별짓을 다 하는데도 안 되네요. 외함 바닥에 고무판까지 깔았다니까요.”
선물로 힌트 하나 더 줄까 했는데, 역시 금성전기다. 해법을 어느 정도 찾아냈군.
“고무패킹을 잘 활용해 보세요. 중신이 외함에서 떠 있잖아요? 그럼 어디를 잡아야 소음이 줄어들지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올 겁니다.”
“오호라. 잠깐만요. 생각 좀 해 보고요.”
커피 마시면서 정적을 즐기고 있자니, 누나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혹시 외함 티너트를 고무패킹으로 감싸는 건가요?”
“글쎄요. 해답은 스스로 찾는 게 좋지 않겠어요? 하하. 그리고 양산 규격 만들어 보니까 33키로가 유독 소음이 높더라고요. 제가 그것도 미리 알려 드릴게요. 우리는 삼총사니까.”
“하하. 알았어요. 저희 이사님이랑 머리 싸매면서 해답 찾아볼게요. 고마워요!”
왜 커피 마시다 보면 몇 시간이 후딱 흘러 버리는지 원.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넘었다.
예상대로 설이 지나고 2월이 찾아오니 결실이 보이기 시작한다. 각자 부지런히 임무를 수행 중인 우리 회사 특수 요원들도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면 딱이다.
일단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씻으려고 준비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도연테크 박민창 사장? 이 시간에 웬일이냐?
“네, 사장님.”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전화 받을 수 있으니까 받았죠. 부담 갖지 마세요. 무슨 일로 전화하셨습니까?”
술 좀 들어간 목소리다. 술만 마시면 어디론가 전화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덕준이가 늘 그랬지. 난 피곤해 죽겠는데, 술 취해서 무한 루프로 반복하는 말 들어 주고.
“제가요, 사장님 말씀 듣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좀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무슨 말 때문인지 기억이 안 난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말을 많이 해서 그런지, 나이 먹고 기억력이 퇴화된 건지.
“아, 네. 무슨 고민이 그리 많으셨습니까?”
“사장님,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예전에 제가 사장님 힘들까 봐 찾아가서 같이 담배도 피우고 그랬잖습니까?”
“하하. 저 힘들었을 때 많이 위로해 주셨죠. 그래도 그때 담배 피우면서 꼭 성공해서 더러운 짓 때려치고 사장님 소리 듣자고 했는데, 지금 그렇게 됐죠.”
“사장님께서 저를 이렇게 도와줬는데, 제가 그 더러운 짓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이제 기억난다. 중전기조합 업체들과 거래하면서 백마진 주냐고 물어봤었지. 장부도 제공해 줄 수 있냐는 부탁도.
그때 박 사장은 껄끄럽다는 목소리로 다른 방법으로 도울 것이 없냐고 말했었다. 그게 계속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회사 운영하고 직원들 월급 주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시죠.”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가 담배 그렇게 피우면서 얘기한 것들이 다 사장님과 저와의 약속 아닙니까? 나는 왜 이러고 있나 싶어서 술 좀 마셨습니다. 우리 도연이한테 부끄러운 아빠가 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도 못 지키고 있는 것 같고.”
하나뿐인 딸 생각하겠다며 회사 이름도 도연테크로 지은 박 사장.
3월에 초등학교 입학한다고 해서 가방 하나 사서 보냈더니 엄청 좋아하더라. 초등학생 가방이 30만 원이나 하는지 놀랍기도 했지만.
“그렇게 안 하면 거래 자체가 힘들어지니 별수 있습니까? 그래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으니, 점점 더 좋아지겠죠.”
“제가 부끄럽다고 느낀 것이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살면서 자식 키워 봐야 걔가 뭘 배우겠습니까!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아니다 싶은 건 안 할 생각입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제가 떳떳한 아빠가 되도록 많이 도와 드리겠습니다. 도연이한테 좋은 세상 물려줘야죠.”
본인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는 것도 핑계일 것이다. 관행이라도 불법은 불법이다. 이제라도 그런 삶을 살지 않겠다고 하니 응원해 주면 그만이다.
“사장님!”
“네, 말씀하세요.”
“사장님께서 요청하면 제가 자료 다 들고 가겠습니다. 아니다. 제가요, 다 들고 가서 국세청이고 경찰이고 다 얘기하겠습니다. 추징금 내라면 내고, 벌금 내라면 내고, 징역 살라고 하면 살고 오겠습니다.”
“아이고, 우리 사장님 술 많이 드셨나 보네요. 사장님이 제 편인데, 내 편 피해 갈 짓을 제가 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이제 그렇게 안 살 겁니다. 벌써부터 초심을 잃었어요, 내가.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지면 초심 잃지 말라는 훈장으로 생각하고 살랍니다.”
“사장님, 누가 들으면 악독하게 사업한 줄 알겠습니다. 사장님처럼 양심적으로 하시는 분 또 없으니까 자책하지 마세요.
“아무튼 지켜봐 주세요. 이거 늦은 시간에 너무 죄송합니다. 편히 주무세요.”
뭐에 쫓기기라도 한 듯 전화가 툭 끊겼다. 술 먹고 전화한 사람의 특징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은 제발 끊으라고 해도 했던 말 계속하면서 전화기 붙잡고, 어떤 사람은 할 말 쏟아 내고는 급똥이라도 온 것처럼 끊어 버린다. 박 사장 속이 안 좋나.
뭐가 됐건, 처벌을 감수하더라도 자료 다 제공하겠다고 하니, 난 쾌변을 기원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