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74)
274 아파트 세 채
“또 나주 내려오려면 번거로우니까 아예 이 자리에서 사인까지 끝내시죠?”
전력용 변압기 시장 진출 전에 치러지는 전초전. 삼미건설이 발주하는 8,000kVA짜리 변압기 생산.
먹거리를 물어 온 이든테크 김상현 사장은 한 큐에 끝내기를 요구했다. 영업맨다운 화끈함이다. 이봐, 김 사장. 대화는 간단히 해도 계약서 검토는 꼼꼼하게 하는 법이라고.
“저희가 일단 계약서 검토하겠습니다. 여기 앉아서 기다리시든지, 아니면 김 이사님과 같이 공장 구경하셔도 좋습니다.”
“네, 뭐. 여기서 기다리죠.”
이제 최윤근 상무 타임이 돌아왔다. 이 바닥에서 계약과 입찰에 관해서는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에 이어 이인자로 군림하는 최 상무가 계약서를 자근자근 씹어 줄 것이야.
나와 최 상무가 각자 계약서를 보면서 수정할 사항을 체크했다. 한두 개 체크하고 만 나와 달리 최 상무는 깜지 쓰듯이 빼곡하게 난도질 중이다.
“상무님, 다 검토하셨습니까?”
“네. 몇 가지 수정할 사항이 있긴 합니다. 우선 추가 비용 부담에 관한 조항이 없네요. 다른 것도 그렇지만, 변압기도 중간 중간 스펙이나 설계가 변경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추가 비용은 귀책사유가 있는 쪽이 부담하는 것으로 하시죠.”
역시 최 상무. 내가 체크한 것과 똑같은 걸 지적했다. 내가 괜히 뿌듯하다. 나도 이제 풍월 정도는 거뜬히 읊을 수 있겠군.
“김 사장님. 외형도를 보니까 쿨링팬이 없던데, 이거 확정된 것 맞죠?”
“그럼요. 삼미건설한테서 직접 받아 온 겁니다.”
최 상무가 또 나섰다.
“이게 이 정도 용량이면 쿨링팬뿐만 아니라 센서도 많이 들어갈 텐데, 외형도에 구현이 안 돼 있네요. 나중에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도 사장님께서 비용 부담하셔야 합니다.”
“네, 뭐. 그러죠. 제가 삼미한테서 추가비용 받으면 당연히 부담하는 것이 맞는데, 그게 아니면 그때 논의하는 걸로 하시죠?”
“죄송한 말씀인데, 그렇게 되면 나중에 골치 아파집니다. 계약서에 세세하게 다 기입해 놔야 나중에 탈이 안 생깁니다. 삼미건설에서 실사 나올 때마다 괜한 걸로 시비 걸 텐데, 계약서를 꼼꼼하게 작성하는 것이 좋습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원청 요구사항이 수시로 바뀌는 경우도 많습니다. 계약서는 원칙적인 것만 명시해 놓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협의하는 걸로 하시죠. 신의성실의 원칙에 어긋나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허허.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제조사는 저희 회사 이름으로 나가는 것이 아닙니까? 변압기가 일이 년 쓰고 마는 것도 아니고…… 좀 번거롭더라도 양해해 주시죠. 계약서 문구 해석하는 것 가지고도 문제를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 최 상무 잘한다. 내가 김 사장이었다면, 저 늙은이는 누군데 이렇게 꼬장꼬장하게 나오냐고 욱했을 것 같다.
김 사장도 살짝 불쾌한 듯하지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것처럼 보인다. 계약서상으론 우리가 을이지만, 실질적으론 우리가 갑이니 뭐. 하기 싫으면 다른 업체 찾아보든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대신 물건만 제대로 제때 잘 만들어 주세요. 대기업들이랑 거래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까탈스럽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싸우다가 때려치우는 업체들도 많습니다. 하하. 그런 일 없도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을 같은 갑인 김 사장이 백기를 들었다. 문구 수정을 거쳐 8억짜리 계약서가 다시 만들어졌다. 10번의 훈련을 하면서도 돈을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김 사장이랑 악수 한 번 진하게 하자고.
“이렇게 좋은 경험을 쌓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향후 일정은 어떻게 됩니까?”
“서울 올라가서 삼미건설과 최종 협상하고 계약서에 도장 찍으면 되니까, 빠르면 다음 주 정도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때부터는 이것저것 준비할 것이 많으니까 미리 준비해 두세요.”
“네, 물론이죠. 이번 건 잘 끝내고 앞으로도 좋은 기회 함께 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악수 나누면서 맘에 없는 말들을 내뱉었다. 나도 영업맨 다 됐네. 이걸로 경험 쌓으면 앞으로는 직접 계약해야지. 중간에 거간꾼 끼고 갈 필요가 없다고.
“시간이 애매하긴 한데, 저희 공장 좀 둘러보시고 나서 저녁 같이하시죠.”
“아쉽지만, 식사는 다음에 하시죠. 서울 올라가면 한밤중 되겠습니다. 하하.”
“다음에는 편하게 KTX 타고 오시죠. 전화만 주시면 나주역으로 바로 나가겠습니다.”
회사가 나주에 있으니 좋은 점이 있다. 손님들도 별로 안 오고, 수도권에서 내려오더라도 며칠 묵을 것이 아니라면 일만 마치고 칼같이 올라간다는 점이다. 내 시간을 보장해 주는 혁신산단의 장막. 맘에 들어.
김 사장을 배웅하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계약이야 금방 끝냈지만, 앞으로 할 일이 많다.
“상무님, 이사님. 어떻습니까? 단가가 많이 아쉽긴 한데, 그래도 연습하는 용으로는 무난하다 싶네요.”
“회장님 말씀처럼 단가가 박하긴 합니다. 8,000짜리면 1억 정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아마 분명히 추가돼서 9천 정도로 올라갈 겁니다. 뭐 그래도 우리가 처음 하는 것치고는 나쁜 조건은 아닙니다.”
최 상무가 아쉽지만 만족스럽다는 모순된 반응을 보였다. 다른 건 다 올라도 월급과 변압기 가격은 그대로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야박한 시장에서 무난하면 됐지 뭐.
“상무님. 이제 삼미건설에서 온갖 것을 다 요구할 텐데, 한 부장이랑 같이 잘 대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참에 한 부장 좀 잘 교육시켜 주세요.”
“허허. 걱정 마시죠. 앞으로 전력용 변압기 들어가면 한 부장이 영업해야 할 텐데 잘 가르쳐 놔야죠. 김 이사도 부지런히 가르쳐 놔.”
우리 덕준이. 회초리 맞아 가면서 많이 배워라. 대당 천만 원짜리 파느냐, 일억짜리 파느냐는 회초리 얼마나 맞았는지에 달려 있느니라.
“김 이사님은 설계 잘 뽑아 주세요. 단가 아쉬운 것은 설계로 만회할 수 있지 않습니까?”
“제가 살을 못 빼도 설계 쥐어짜는 것은 자신 있습니다. 하하. 김 사장, 상현이 그놈이 영업쟁이라 허세도 부리고 그런 건 있어도, 이 바닥에 있던 놈이라 말도 안 되는 짓 하고 그러진 않습니다. 그 정도면 계약 잘하셨습니다. 이제 얼마나 잘 만드냐가 중요하죠.”
“네, 말씀 잘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정도 대용량은 만들어 본 경험이 없으니까, 공장장님하고 잘 상의해서 진행해 주세요. 부속 자재들은 수급이 어려울 수 있으니까 박 대리에게 얘기해서 빨리 구매할 수 있도록 해 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어디 유럽 일주해도 걱정 없을 정도로 잘 준비하겠습니다.”
잔소리 그만하란 소린가? 서당 개 주제에 베테랑 앞에서 주절주절 말이 많긴 했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걱정부터 할 필요는 없지. 내가 그토록 원하던 할 일 없는 사장의 길이 머지않은 듯하다.
이틀 뒤에 또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지정수입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욱현입니다.”
현성중공업에서 전력용 변압기 설계로 밥 먹고 살았던 이가 드디어 우리 회사를 찾아왔다.
44살치고는 젊어 보이는 얼굴, 그렇지만 대기업 15년차의 고단함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월급쟁이는 대기업, 중소기업 가리지 않고 힘든 건 매한가지구나.
“김 이사님한테 얘기 들으셨겠지만, 실제로 보는 것만 못하죠. 여기까지 오셨으니, 공장 한번 쭉 둘러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 네. 좋죠. 사장님께서 직접 소개해 주시니 아주 영광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첫째가는 변압기회사에 다녔어도, 우리 공장 보면 까무러칠 것이야. 이제 전력용 변압기 설비까지 갖춰 놨으니 경기를 일으킬지도.
혼자 뿌듯해하고 있는데, 귀가 움찔거린다. 김 이사가 이욱현 씨에게 건넨 말 때문이다.
“이 차장, 회장님이셔.”
“아, 그래요? 회장님 죄송합니다. 명함에 대표이사라고 적혀 있어서 사장님인 줄 알았습니다.”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는 이를 보고 있자니 또 부끄러워진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회장 칭호는 왜 이리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지 원.
30분 정도 소요된 공장 견학은 효과 만점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신기술의 향연 앞에서 현성중공업 15년차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현성중공업 직원이 아니라 사장이었다면, 당장 회사 사겠다고 백지수표를 내밀었을지 모른다.
얼마를 적으면 되려나? 1조는 돼야 하지 않겠나? 20억으로 시작한 이 회사가 1조를 생각할 정도로 컸다니! 감개가 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이다.
이욱현 씨의 입을 겨우 오므리고는 내 방 소파에 앉혔다. 공장과 달리 조촐한 사장실. 주백색 전구 덕분인지 뭔가 있어 보이긴 하다. 그래 봐야 대기업 임원실보다 못하겠지만.
“듣기로는 현성중공업 사표 냈다고 하시던데, 생각 중인 것이 있으십니까?”
“하하. 회장님. 면접 보러 온 사람입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대놓고 우리 회사 오겠다고 물어보기 민망해서 한 바퀴 돌려 얘기했더니, 김 이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끼어들었다. 너무 티 나게 얘기했나?
나와 김 이사의 일상의 대화였는데, 이욱현 씨는 문화컬처였던 모양이다. 놀란 표정으로 김 이사를 쳐다보면서 눈으로 뭔가를 얘기한다. 이 사람도 회사 분위기에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우리 회사 보고 실망했을까 봐 걱정했는데, 괜한 걱정이었습니까? 하하.”
“아닙니다, 회장님. 이런 변압기 공장은 처음 봤습니다. 진욱이 형이, 아니, 이사님께서 공장 보고 놀라지 말라고 해서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표정이 레알 그 자체다. 정말 놀라긴 했나 보다. 변압기업계 전설의 레전드가 될 회사에 대한 소감으로 아주 제격이다. 맘에 들어.
“별말씀을요. 그래서 우리 회사 오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으신지요?”
“저는 오늘 면접이라고 얘기 듣고 왔습니다. 뽑아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하. 제가 고맙다고 말씀드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들으셨겠지만, 전력용 변압기 시장 진출을 앞두고 있어서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도 확실한 건 일한 것 이상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김 이사가 이미 다 얘기했다는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회장님. 제가 작년에 성과급으로 얼마 받았는지 얘기해 줬더니, 이 친구 입에서 아주 거품이 나오더라니까요. 하하.”
툭하면 돈벼락 내리는 회사라는 걸 굳이 얘기 안 해도 되겠군. 이욱현 씨가 기대된다는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다시 긴장하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도 기대된다. 몇 곱절로 뽑아낼 테니까.
“회사 생활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스트레스는 전과 확 차이가 날 겁니다. 우리 이사님이 입사하고 나서 살 엄청 쪘습니다. 이사님 몸매가 회사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게 아닐까 싶네요. 이사님, 동의하시죠?”
“하하. 제가 요새 현미밥 때문에 스트레스를 좀 받긴 합니다. 그래도 일 때문에 스트레스받은 적은 없었던 것 같네요. 회장님께서 아무 말씀을 안 하시니까 그게 무언의 압박처럼 느껴지긴 하지만요. 하하.”
“그럼 앞으로는 말로 압박을 좀 해야겠습니다?”
김 이사가 뭐라고 얘기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이욱현 씨에게 발언 기회를 줬다. 요 며칠 손님들 초빙하느라 텐션이 업 돼 있었지만, 눈치가 없어진 건 아닌 모양이야.
“이거 손님 모셔 놓고 저희끼리만 얘기를 했네요. 이 선생님께서 입사하시면 전력용 변압기 설계를 총괄하실 텐데, 혼자서 벅차실 것 같습니다. 설계 인력을 바로 충원해 드리겠습니다.”
“회장님. 이거 염치없는 얘기일 수 있는데,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후배 데려오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혼자 와도 레드카펫 깔아 주고 꽃 뿌려 줄 텐데 말이야. 아주 맘에 들어.
“얘기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가 요새 좀 뒤숭숭합니다. 대기업이 다 그렇죠. 실적 악화되면 바로 희망퇴직 신청받고…… 제가 그래서 같이 일하는 친구들 중에 똘똘한 녀석 두 명한테 같이하자고 얘기하고 있는데, 혹시 받아 주실 수 있으십니까?”
생각하는 척, 고민하는 척 연기할 필요도 없다. 오라고 사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제 발로 오겠다니 대환영이지!
“혁신산단에 볕 잘 드는 아파트 3채 준비해 놓겠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