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75)
275 밑천
대기업에 물건 팔아 돈 받는 일.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바라는 일일 것이다. 1차 하청만 돼도 은행 가서 거만하게 굴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그 용기를 갖기 위해 버려야 할 자존심과 혈압 관리를 생각하면 과연 남는 장사일까 싶기도 하다.
처음에야 세상을 다 가진 듯 기쁘겠지. 꼬장꼬장한 품질 관리에 짜증은 나지만, 엄청난 주문량에 지려 버리고, 납품하자마자 바로 이뤄지는 결재에 아예 질질 쌀 것이다.
그렇게 1~2년 기저귀 차면서 행복에 만취했다가, 서서히 조여 오는 단가 인하 압력에 대기업의 매운맛을 맛보게 된다. 단가 인하 요구만 있으면 다행이지. 대리, 과장한테 지문이 지워질 정도로 손바닥 비벼대면, 이것이 쓰거운 건전지 맛인가 싶을 것이다.
“회장님. 그런 건 갑질 축에도 못 낍니다.”
삼미건설에서 실사 나온다고 한 날이다. 아침 일찍부터 공장 마당에 물 좀 뿌려 놓고 기다리면서 대기업 갑질 얘기를 꺼내니 최윤근 상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무님도 갑질을 당해 보셨습니까? 감히 누가 대한전력에 갑질을 합니까?”
“허허. 이게 서로 계약 관계로 엮이면 갑질을 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여지라도 있지요. 그런데 기자 놈들은 쥐뿔도 없으면서 갑질을 하니 사람 미치지요.”
“하하. 어찌 보면 기자들이 최고죠. 근데 상무님도 기자들 상대하셨습니까?”
“처장 되기 전에 대외협력으로 1년 있었는데, 진짜 징글징글했습니다. 지금이야 본사가 나주 내려와서 덜한데, 삼성동에 있었을 때는 상전이 수십 명이었지요. 허허.”
기자실로 출근하는 기자들이 머리에 그려졌다.
마감 시간 앞두고 온갖 짜증을 다 내다가, 마감 치고 나면 소파에 널브러져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고. 점심시간 맞춰 기자실로 찾아온 홍보팀 직원한테 밥 얻어먹고, 시간 남으면 마사지도 한 번씩 받고.
“경제부, 산업부 기자들은 아주 가관이에요. 오밤중에 술집 달려가서 계산해 주는 게 하루 마무리였지요. 허허.”
“달리 기레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죠 뭐. 그래도 그렇게 밑밥 깔아 두면 일 터졌을 때 기사도 막아 주고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대기업 갑질은 회사 좀먹으면서 그러니…….”
“기자들한테 받는 스트레스를 그렇게 푸나 봅니다. 허허. 대한전력 있을 때도 빅3들은 저들이 갑이라고 생각하지요. 대한전력한테도 그럴 정도면, 중소기업한테는 보나 마나겠죠.”
자산 순위로는 랭킹 3위 안에 드는 대한전력에게도 거만하게 구는 우리나라 대기업들의 용맹함이 대단하다.
“대한전력도 갑질을 당할 정도입니까?”
“허허. 뭐 갑질이랄 것도 없지만, 윗선들끼리 얽혀 있으니까 아랫급들이 그거 믿고 거만하게 나오는 것이죠. 우리야 정년 보장돼 있으니까 조용히 있는 거고, 대기업은 그렇게 해야 승진한다고 믿으니 어디 가서든 뻣뻣하게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허허.”
머슴살이를 해도 대감집에서 하라고 하더니, 진짜 대감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싶다. 우리 회사 실사하겠다고 올 사람들은 어떤 머슴인지 기대된다.
잠시 후 차 두 대가 들어왔다. 에스클은 이든테크 김상현 사장일 테고,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말없이 보여 줬다는 저 차는 삼미건설 직원이겠군.
“어서 오세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악수와 함께 명함 교환식이 진행됐다. 이철원 과장, 한태영 대리. 직위로 보아하니 까칠하게 나올 것 같은 예감이 스며들었다.
“공장이 참 크고 좋네요. 일단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까 바로 점검 진행하겠습니다.”
“저기 과장님. 시원한 사무실에 가서 얘기하시죠.”
김 사장이 삼미 직원들을 사무실로 안내했다. 영업 출신이라 그런지 분위기를 능숙하게 잘 끌어가네.
7월 중순 무더위를 피해 회의실로 들어가니 시원한 에어컨 바람과 설계 대장 김진욱 이사가 손님을 맞이했다. 또 한 사람. 입사한 지 일주일째인 이욱현 부장도.
“어! 이 차장님!”
이철원 과장이 이 부장을 보더니 반갑고 놀라운 표정을 짓는다. 형이 왜 거기서 나오냐고 묻는 가상의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 과장, 여기서 만나네?”
서울에서 나주까지 3~4시간이 족히 걸리지만, 우리나라 참 좁다. 이 바닥은 더 좁다. 여기서 서로 아는 사람이 상봉할 줄이야.
“부장님, 과장님과 아는 사이입니까?”
“그럼요. 현성에 있을 때 자주 봤죠.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요.”
이 과장이 놀란 표정을 잠재우고는 상황 파악에 나섰다.
“차장님. 현성 그만두고 여기로 오신 겁니까?”
“월급쟁이가 대우 잘해 주는 곳으로 옮기는 거야 일상이지. 하하. 뭐 현성 분위기 알잖아? 못 있겠더라고.”
“차장님이 오실 정도면 엄청 좋은 회사인가 봅니다? 하하.”
이 부장의 등장으로 삼미건설 직원의 예봉이 무뎌진 느낌이다. 최 상무가 쐐기를 박겠다고 나섰다.
“과장님, 유 상무님 잘 계시죠?”
“유의태 상무님요? 아, 네. 잘 계시죠.”
“허허. 그제 연락해서는 직원들 가니까 대접 잘해 달라고 하더군요. 유 상무가 저랑 대한전력 동기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상무님께 대접 잘 받았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하…… 하.”
이 과장의 말과 몸짓에서 예의 바름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견장 색깔이 녹색에서 노란색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이다.
실사가 시작됐다. 제품을 제때 잘 만들 수 있는지 확인하는 절차이니 문제가 될 것도 없다. 간혹 기선 제압한다고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최 상무와 이 부장이 내 양옆에 앉아 있으니 뭐.
“사양서랑 시방서, 기본설계까지 다 이상 없구요. 상세설계도 볼 수 있습니까?”
이런 무리한 요구 말이다. 내가 한마디 하기도 전에 최 상무와 이 부장이 가족오락관이라도 하듯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설계까지 확인합니까? 삼미랑 일하면서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간혹 확인할 때가 있긴 합니다. 뭐, 저희야 제품 완성되고 성능만 잘 나오면 되니까 넘어가죠. 하하.”
이 바닥에서 변압기 설계가 길거리 똥개가 물고 지나다닐 정도로 널린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변압기 업체 직원들이 빼돌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기업 직원들이 실사한답시고 설계 받아서 팔아먹는 경우가 많다.
어찌나 팔아먹는지 삼상변압기 설계는 담배 열 보루 값도 안 될 정도로 똥값이다. 8,000kVA짜리 설계면 담배 스무 보루 정도는 되려나? 부수입 올릴 기회가 사라졌으니 이를 어쩐담. 후훗.
기세가 꺾여 버린 이 과장이 조용히 있자, 한 대리가 오랜 침묵을 깨고 마이크를 들었다.
“자재 성적서 확인 잘했습니다. 그런데 코일 보니까 중국산이네요?”
“네, 중국산 맞습니다. 전기연구원 성적서 보시면 아시겠지만, 국산과 차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능이 더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중국산이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돌한 대리 같으니. 성적서를 못 믿으면 뭘 믿겠다는 것인지 원. 그냥 가기 뭐해서 태클 거는 것이라고 생각해 주지 머.
“아무래도 중국산이라고 하면 인식이 안 좋긴 하죠. 그래서 제조사 측에서 매년 전기연구원에 시험 의뢰해서 성적서를 새로 받고 있습니다. 대한전력 기자재로도 등록돼 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리님. 이거 성능보장제라 완성품 성능이 요구치에 안 나오면 구매 안 하면 그만입니다. 프라임일렉트릭에서 성능 충족시킨다고 하니까 믿어 보시죠.”
김 사장까지 한마디 덧붙이니 한 대리가 잠자코 마이크를 내려놨다. 이 정도면 밥값 했다는 표정이랄까? 그래, 열심히 해서 승진 잘해라.
“한 대리, 또 뭐 없지?”
“네.”
“그럼 현장 좀 둘러보겠습니다.”
대기업 돈 받아먹겠다고 하면 시작 전부터 사람 피 말리게 할 정도로 태클을 남발한다더니, 오늘 실사는 휘슬 한 번 울리지 않았다. 좌상무 우부장의 힘이 크긴 크네. 회사 성장의 비결은 혈연, 학연, 지연이라더니만…….
기선이 제압된 삼미건설 직원들에게 현장실사는 게임 엔딩 수준이었다.
마침 대한전력 시험 신청을 앞두고 변압기 부하를 걸어 둔 검사부에 들어갔을 때는 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여기가 호남 최대 찜질방이라우.
“와! 열기가 엄청나네요. 부하시험 맞습니까?”
“네, 대한전력 주상변압기 납품 시험 앞두고 있어서 자체 시험 중입니다.”
시공간이 왜곡될 정도의 열기에 7월 중순의 무더위까지 겹치니, 3초 삼겹살 생각이 날 것이야.
“근데 무슨 변압기가 이리 많습니까? 한 천 대 됩니까?”
이 과장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질문을 던졌다. 관수 시장에서 우리 회사가 어떤 위치인지 전혀 모르고 있군. 고작 천 대?
“하하. 이게 7월 1차분인데, 다 해서 2,600대 정도 됩니다. 연초에 많이 나올 때는 한 납기에 8, 9천 대 정도 나오니까, 이 정도는 일도 아닙니다. 다음에 물량 많을 때 초대 한번 하겠습니다. 진짜 열기가 대단합니다.”
초대 손님들이 더 이상 있고 싶지 않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땀을 비 오듯 흘리고 있는 우리 검사부 직원들을 뒤로하고 뒷마당으로 탈출했다.
뒷마당에서는 중국으로 보낼 변압기 포장이 화끈하게 이뤄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타정기 들고 목재에 미친 듯이 못 때려 박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나무짝을 지게차로 실어 컨테이너에 밀어 넣고 있다.
“수출도 하십니까?”
이만한 사업체 유지하려면 수출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는 걸 알면 꽤 놀랄 것이야.
“작년부터 시작했는데, 매출 신장에 꽤 도움이 됩니다.”
“작년에 무역협회에서 수출의 탑 신청하라고 연락 왔는데, 신청 안 했습니다. 3천만 불 수출탑은 받고도 남는데, 혜택도 없고 돈만 내라고 해서 말이죠. 허허.”
최 상무의 든든한 마무리가 이어졌다.
이 정도면 우리 회사 대단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줬지 싶다. 잘게 쪼개 버린 회사들의 개별 재무제표로는 감히 예상치 못한 것들을 봤으니, 불신 따위는 집어던지고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과장님, 다 확인하셨습니까?”
“네. 잘 봤습니다. 변압기 잘 만들어 주시고, 중간 중간 서류 제출만 잘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네,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로 만들어 납품하겠습니다.”
지키지 않을 립서비스로 실사가 마무리됐다. 요구하는 성능이 100이면 101이나 102 정도만 나오게 만들면 그만이다. 말로나마 슈퍼울트라캡숑킹왕짱 변압기 만들어 주겠다고 하는 거지 뭐.
“점심시간 다 됐는데, 남도음식 맛보러 가시죠.”
“하하. 좋지요.”
귀빈들에게 주는 기념품 몇 개 챙겨서 안겨 주고, 갓 잡은 나주 한우만 취급하는 고깃집으로 보냈다. 서울에서 손님이 왔는데 고기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야지.
대낮부터 고기 냄새 진하게 풍기며 회사로 돌아왔다.
“상무님, 부장님 덕분에 실사가 별 탈 없이 끝난 것 같습니다.”
“허허. 대한전력도 그렇지만, 대기업들이 실사하겠다고 와서는 온갖 시비 다 걸죠. 그나마 친한 동기 녀석이 거기 가 있었으니 망정이죠.”
“상무님은 진짜 인맥이 대단하십니다. 하하.”
“그게 제 밥벌이 밑천 아니겠습니까? 허허.”
최 상무의 유들유들한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인맥이 화려해서가 아니라, 농담 섞어서 편하게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됐다는 것 때문에 말이다. 가족이 점점 늘어나네.
가족 후보 이 부장도 한마디 하지?
“이철원 과장이 예전에 초짜 시절에 현성 와서는 시건방 떤 적이 있었습니다.”
“하하. 아이고, 호되게 당했을 것 같은데요?”
“현성 분위기 아시죠? 군대보다 더한 곳이에요. 그런 데 와서 갑이랍시고 모가지 뻣뻣하게 굴었으니 아주 난리 났죠. 그러면서 친해지긴 했는데, 그게 여기서 힘을 발휘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이거 설계하라고 모셨는데, 로비스트로 만든 것 같습니다. 하하.”
“저도 뭐 그게 밥벌이 밑천이죠.”
좌상무 우부장의 밑천이 어찌나 두둑한지 얼굴만 봐도 돈을 버는 기분이다.
빅3들아, 기다려라. 이번 연습 잘 끝내고 전력용 변압기 시장에서도 돌풍을 일으켜 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