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83)
283 박정호
공장장이 판다로 돌변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임에도 한눈에 보이는 다크 서클. 전력용 변압기 시제품 제작한다고 고생한 흔적을 만방에 과시하는 것 같다.
“공장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판다가 손사래를 쳤다.
“다 끝나야 고생이지. 아직 멀었어! 배전반도 달아야 하고, 아직 손볼 것 많아. 이거 참, 살다 살다 이렇게 큰 것도 다 만들어 보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하하. 테스트 가능하면 다 만든 것이나 마찬가지죠. 자, 이제 기본 테스트하고 제작 마무리하셔야죠.”
판다가 환하게 웃었다.
“이거 테스트할 것도 없어! 내가 154는 처음 만들어 봤지만, 진짜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설계를 빼다 박을 정도로 똑같이 만들었으니까, 아주 잘 나올 거야.”
공장장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으니, 정말 고생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설계를 담당했던 이욱현 부장도 한마디를 곁들였다.
“말도 마세요. 공장장님이 어찌나 귀찮게 하던지요. 이거 내가 만든 게 아닌가 싶더라니까요.”
“하하. 이 부장 왜 또 그래. 설계자 지시 잘 따라 주는 것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
“어지간한 건 알아서 하실 줄 알았죠.”
“이번에 확실하게 배웠으니까 다음부터는 알아서 할게. 걱정 마러.”
공장장이 이 부장 엄청 귀찮게 한 모양이다. 설계자에게 고개 수그리는 현장 최고 책임자. 30년이 넘는 짬이 무색할 정도로 늘 초짜 같은 마음가짐을 가진 공장장이기에 가능할 것이다.
설계가 가장 중요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다. 설계에 모든 것이 다 담길 수 없다. 볼트, 너트를 어떻게 조이냐에 따라 변압기 소음이 달라질 정도이니, 그만큼 작업자들의 감과 실력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설계자와 작업자 간에 알력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왜 만들라는 대로 만들지 않았냐’와 ‘설계가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대립.
우리 회사에서는 그 꼴을 볼 수가 없다. 공장장의 짬도 짬이지만, 그 성품이 회사를 데굴데굴 잘 굴러가게 만든다. 공장장의 힘이자 내 인복이다.
인복이 얼마나 대단한지 갓 나와 뜨끈뜨끈한 시제품 성능 한번 봅시다.
“테스트 들어갑니다! 멀찌감치 떨어져 계세요!”
시험 총책임자 이규철 부장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배전용이나 전력용이나 시험은 똑같지만, 스케일이 넘사벽으로 차이 난다. 전력용 변압기 시험설비 갖추기 위해 들어간 돈만 50억이 넘는다. 본전 뽑으려면 저 집채만 한 놈을 몇 대나 팔아야 하는지 원.
전력이 투입되자 전깃밥 먹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소음이 전해졌다. 변압기 자체에서 나오는 소음과 냉각팬 돌아가는 소리까지.
처음에는 저 소리가 무척 무섭게 들렸다. 전기 무섭다며 겁주는 소리를 어찌나 들었는지, 변압기 가동 소리는 공포 그 자체였다.
“이게 말이여, 220볼트 전기 먹었을 때 찌릿한 정도가 아니여. 이건 찍소리도 못해. 그냥 어버버하다가 뒤지는 거여.”
“그 정도인가요?”
“말도 마러. 이게 살이 붙어 버린다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어?”
“글쎄요. 빨리 떼면 되나요?”
“감전된 부위를 빨리 잘라 내야 해. 한일병원 가 봐. 손발 없는 사람들 수두룩해. 그러니까 전기는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태양전기 입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공장장이 해 준 얘기였다. 오자마자 공포심을 안겨 줬기에 내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시 추억에 잠긴 사이에 소음이 사라졌다. 결과는?
“회장님, 특성은 합격입니다. 효율 값이 잘 나왔습니다. 이 정도면 손실 350 밑으로 들어가고도 남습니다.”
“350이요? 설계상으로는 331인데, 좀 높네요?”
“331까지는 안 될 것 같고, 348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거의 최고 수준입니다.”
대한전력이 요구하는 기준치에 넉넉하게 들어와 흡족해하는 이규철 부장과 달리 난 살짝 심기가 불편해졌다. 설계상 수치가 제대로 안 나왔으니 기뻐야 할 상황은 아니지.
공장장과 이욱현 부장도 달려와 특성 테스트 결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제작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공장장도, 설계에 머릿속에 담긴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이 부장도, 표정이 썩 좋지 않다.
“회장님, 설계 다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정도까지 차이 날 리가 없는데…….”
“이 부장, 아니야. 이거 보니까 철손이 좀 높게 나왔잖아? 코아 만들 때 재단을 잘못했을 수 있어. 일단 내가 저거 뜯어서 다시 살펴보겠네.”
“아니에요. 제가 코아 가공할 때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코아는 잘 나왔어요.”
서로 내 탓이오를 외치는 참회 예식이 또 시작됐군. 직원들이 ‘메아 쿨파’를 외치니, 뭐라 할 수도 없고.
“시험할 게 많이 남았으니까 일단 그대로 진행하죠. 손실이 높게 나오긴 했어도 합격은 합격이니까요. 이 부장님은 설계 다시 한 번 검토해 주세요. 시제품 다시 만들지 아니면 이대로 시험 의뢰할지 그때 결정하겠습니다.”
“네, 죄송합니다.”
이욱현 부장이 입사 후 첫 작품을 잘 만들어 놓고도 대역죄인이 된 듯한 표정을 짓는다.
월급쟁이 짬밥이 저런 것이다. 잘못을 했어도 저렇게 고개 숙이고 나오면 혼내기 힘들어진다. 하물며 잘못한 것도 없으니 더 할 말 없지. 저 양반 군 생활 잘했겠네.
“부장님이 죄송할 게 뭐 있습니까? 저 정도만 해도 충분히 잘 나왔습니다. 침울해하지 마시고 충격시험이나 보러 가시죠. 이 부장님! 충격 준비해 주세요. 이거, 이 부장도 두 명이네요? 하하.”
사장은 분위기 메이커 노릇도 해야 한다. 할 일도 참 많네.
침울해진 공장장과 이욱현 부장을 데리고 충격 때리는 현장에 자리를 잡았다. 독일에서 건너온 200만 유로짜리 고용량 뇌임펄스내전압발생기가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할 때가 됐다.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진짜 위험하면서도 눈을 뗄 수 없는 테스트이다. 어지간한 빌딩 높이만 한 충격기가 번개를 만들어 변압기 후려 패는 광경은 전기의 무서움과 대자연의 놀라움을 선사한다. 흐미, 기대된다.
“충격 들어갑니다. 다들 안전지대에서 움직이지 마세요.”
이규철 부장의 안내방송 이후 충격기가 가동됐다. 충격기가 테슬라 코일처럼 파열음을 내며 번개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찌릿. 쿠와앙.
“와! 장난 아니네! 저건 진짜 번개네, 번개여.”
공장장이 침울했던 것도 금세 잊고 감탄사를 토해 냈다. 찰나에 변압기 때리고는 사라지는 번개에 절로 입이 벌어진다. 근처만 가도 번개와 함께 사라졌을 것이다.
“공장장님은 저거 처음 보셨습니까?”
“대단하네. 쥐똥만 한 충격기도 무시무시한데, 저건 진짜 대단하구만.”
“전기연구원 창원본원 가 보면 저것보다 더 센 것도 있습니다. 그건 30억 넘게 들었다던데…….”
“그건 엄청나겠구만? 이거 시험 보낼 때 꼭 가 봐야겄어. 허허. 근데 저거 몇 번 더 해 보면 안 되나? 아차 하는 순간에 사라져서 아쉬운데 말이여.”
“저거 한 방이면 전기세 몇십만 원 그냥 날아가는 겁니다. 하하.”
몇 분 전까지 참회 예식을 행하던 공장장과 이욱현 부장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 봤는지, 남대문가 봤는지에 대한 대화에 열을 올렸다. 충격기가 주는 시각적 만족도가 대단한 모양이군.
“그새 기분들이 풀리셨나 봅니다? 하하. 충격 시험 결과 보러 가시죠.”
결과는 흡족했다. 뇌충격전압이 빠져나가는 파장이 예쁘게 잘 나왔다. 합격의 연속!
“오늘 할 수 있는 시험은 다 했습니다. 이제 온도상승 시험 준비하겠습니다.”
“부장님, 고생하셨습니다. 나머지 시험도 잘 준비해 주세요.”
다음 시험 준비에 바쁜 이규철 부장에게 작별을 고하고는 공장장과 이욱현 부장을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아직까지는 맹위를 떨치는 무더위가 확 느껴졌다.
“공장장님. 기분 좋게 담배 한 대 태우고 가시죠?”
“담배 좋지. 이것도 이제 그만 피워야 하는데, 끊질 못하네.”
피운 담배가 만 갑이 넘어 박만갑으로 불릴 정도로 담배와 절친으로 지냈던 공장장이 색다른 소리를 한다. 압박을 받고 있다는 뜻이로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피우실 것 같더니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최 원장님이 뭐라고 하세요?”
“하하. 아니 뭐. 여자들은 왜 그리 담배 가지고 그 난리인지 몰러.”
공장장이 환하게 웃는다.
백지원 최봉숙 원장 얘기만 하면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버릇은 여전하네. 재혼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싶다. 다음 달 덕준이를 시작으로 직원들이 줄줄이 혼인서약에 나서는데, 이거 축의금 엄청 깨지겠네.
“공장장님 언제 식 올리십니까?”
이욱현 부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하. 뭐 좋다고 두 번이나 해! 하하하.”
말과는 너무 다른 저 표정. 이 부장은 공장장의 말이 공감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결혼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이거 알 수가 없네.
결혼이 화두로 떠오르자, 자연스럽게 준희 누나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누나 아버지가 변압기 설계로 이름을 날렸다지?
“부장님, 혹시 박정호 사장님 아세요? 금성전기 창업하신 분요.”
“박 사장님요? 당연히 알죠. 설계밥 먹는 사람치고 그 분 모르면 간첩 아닙니까?”
이 부장이 전설의 레전드를 대하듯 답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진다.
“가만가만, 박정호 사장이면 박준희 사장 아버지 아닌가?”
“아! 그러고 보니까 그러네요. 하하. 우리 회장님은 능력자이십니다.”
공장장의 힌트에 이 부장이 답을 찾고는 야시시한 눈빛을 보냈다. 칭찬 같은데, 아닌 것도 같고…….
“근데, 회장님. 박 사장님 얘기는 왜 하신 겁니까?”
“우리 회사가 전력용 변압기 시작한다는 얘기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해서요. 다음 주에 뵈러 가는데 도움 받을 일이 있을까 싶어서 물어봤습니다.”
이 부장이 환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습니까? 박 사장님께서 설계 좀 봐 주시면 최고죠. 안 그래도 아까 특성 결과 때문에 심란했는데…….”
“박정호 사장이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어?”
공장장이 끼어들었다. 공장장도 나름 이 바닥에서 설계로 이름 좀 날린 사람이니, 추앙 분위기가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럼요. 배전 쪽은 모르겠는데, 전력 쪽에서는 1.5세대 정도로 보면 될까요? 1세대 분들 다 돌아가셨으니까 지금은 박 사장님만 한 분이 없죠. 저희 선배들이 설계 잘 안 풀리면 찾아가서 자문 받고 그랬습니다.”
“어쩐지…… 예전부터 금성전기 변압기가 짱짱하다고 소문난 것이 다 이유가 있었구만. 박 사장이랑 친해서 전수 좀 받을 걸 그랬네. 허허.”
“어쩌다 박 사장 얘기 나오면 아쉽다는 선배들이 많았죠. 뭐 본인 사업하겠다고 하시니 어쩔 수 없긴 한데, 계속 전력 쪽 설계하셨으면 변압기 업계도 많이 달라졌을 겁니다.”
이 부장의 계속된 칭송에 끼어들지 못하겠다. 앞으로 바둑 둘 사이가 될지 모르는데, 팔불출이라고 놀림 받을 것 같다.
갑자기 허벅지가 저려 왔다. 누나 전화다. 타이밍 기가 막히네. 담배쟁이 두 명으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박 사장님. 어인 일이십니까?”
“왜 또 그래? 시험 결과가 좋았나 봐?”
“1차 시험 끝내고 담배 피우면서 누나 아버지 얘기하고 있었거든.”
“우리 아빠? 하하. 이거 묘하네. 안 그래도 그거 땜에 전화했는데.”
인천 올라갈 날이 확정됐나 보다. 아직 바둑 못 배웠는데, 큰일이네.
“옷 차려입고 올라가면 되는 거야?”
“아니아니. 아버지한테 말씀드렸더니, 내려오시겠대. 정수 씨네 공장도 한번 보고 싶다고 그러셔서. 어때? 괜찮지?”
“나야 좋지. 안 그래도 손실이 설계보다 높게 나와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거든. 근데 장거리 이동 괜찮으셔?”
“몸 많이 좋아지셨다니까. 요샌 지팡이 없이도 잘 걸어 다니셔. 재활 꾸준히 받으니까 확실히 좋아지신 것 같아. 내가 아빠한테 얘기해 둘게. 설계 봐 달라고 하면 엄청 좋아하시겠네. 하하.”
좋다, 좋아. 변압기 설계 거장께서 직접 오시겠다니! 이놈의 인복은 예상치도 못하게 마구 터지는구나.
“누나!”
“응?”
“진짜 누나밖에 없어!”
“또 흥분한다. 하하. 내가 이번 주 입찰 끝나고 가자고 했거든? 다음 주 월요일 괜찮지?”
공장 물청소 한번 제대로 해야겠다. 플래카드도 하나 뽑아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