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84)
284 아쉬운 합격
“회장님, 테스트 끝났습니다.”
이규철 부장이 두툼한 파일철 하나 들고 찾아왔다. 전력용 변압기 시제품이 완성된 지 4일째 되는 날 아침, 자체 시험성적서가 도착한 것이다.
“테스트 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결과는 잘 나왔죠?”
“네. 수치상으로 다 합격입니다. 전기연구원 시험의뢰 신청할까요?”
해야 할 말만 하는 이 부장의 간결함은 오늘도 여전하다. 이 부장이 합격했다고 하면 그냥 합격이다.
“시험의뢰는, 뭐 아직 시간 있으니까 천천히 하죠. 손실이 설계대로 안 나온 것이 걸리네요.”
“회장님, 그 정도 손실이면 제가 알기론 우리나라 최고 수준입니다.”
“시제품 등록기간이 석 달이니까 조금 더 지켜보죠. 설계며 제작이며 다시 검토하겠다고 하니깐요.”
“네, 알겠습니다.”
이 부장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갔다.
나도 알지. 기존 4개 업체의 제품보다 나은 성능이라는 것. 이 성능만으로도 대한전력은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고, 전기업계 전문지들은 대서특필할 것이다.
그러나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할 수 없다.
사업에서 투자란 은행 적금이자 정도의 수익 먹자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투자비 회수는 물론 그 이상 가는 수익을 얻기 위해 300억 가까운 돈을 쏟아부었는데, 그냥 좋다 정도로 만족해선 안 되지.
결국 관건은 수출이다. 해외시장에서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느냐가 중요하다.
국내 전력용 변압기 시장 규모가 배전용보다 훨씬 큰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개 회사가 나눠 먹기엔 턱없이 작은 것도 사실이다. 민간 화력발전소 붐으로 잠깐 반짝하기도 했지만, 국내 시장은 많이 좁다.
유럽제보다 성능이 딸려도 중국제보다 믿을 만한 제품. 가성비로 승부하는 것이 우리나라 전력용 변압기의 위상이었다. 난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고 싶다.
유럽제 성능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말이다. 1조짜리 국내시장 말고 30조짜리 해외시장에서 놀아 보고 싶다. 그러려면 효율이 더 높아야 한단 말이다.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체 시험성적서를 들고 3층 연구개발부로 올라갔다.
“이사님! 부장님! 흡연실로 집합!”
호기롭게 설계 주역들을 집합시켰다.
괜한 짓을 했나 싶다. 아침부터 설계진들이 테이블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이며 설계 오류가 있었는지 검토 중이었다. 굳이 잔소리 안 해도 잘할 사람들이네.
“성적서 나왔길래 이거 보면서 같이 담배나 피울까 해서 왔습니다. 하하.”
멋쩍게 웃으며 담배 한 대씩 꺼내 김진욱 이사와 이욱현 부장에게 건넸다. 담배가 아닌 금일봉을 건넸어야 했나 싶다.
“이규철 부장한테 어젯밤에 전달받았습니다. 결과가 다 좋으니까 손실이 더 걸리네요.”
김 이사가 크리스피롤 빨아먹듯이 맛깔나게 담배 한 모금 빨고는 코로 연기를 뿜어내며 총평을 내놨다. 역시 내가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 부장도 질세라 연기와 함께 말을 뱉었다.
“제가 지금 며칠째 계속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코아 설계에서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최대한 빨리 검토해서 수정 설계 내놓겠습니다.”
“코아 설계 수정이라면 중신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인가요?”
“아무래도 코아 치수가 달라지면 권선도 다시 감아야 할 수 있겠죠. 가급적이면 새로 안 만들고 수정만 가능하게 해 보겠습니다.”
“다시 만드는 것이 나을 것 같으면 그렇게 하세요. 돈 걱정하시 마시구요.”
2억 정도 날아가는 것이라 속이 살짝 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미 만든 시제품은 어디로든 팔아먹으면 되니, 아까워하지 말자. 사장은 눈치 주고 압박하는 사람이 아니라 격려하는 사람이니까.
“근데 이 부장, 잘할 수 있겠어?”
격려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김 이사가 초치는 얘기를 던졌다. 잘할 수 있겠냐니, 이건 뭔 개소리야.
“잘해야지. 형도 군것질만 하지 말고 옆에서 좀 봐 주라고.”
“먹으면서 봐 주면 안 되냐?”
이 사람들이 진짜. 머릿속에 전력용 변압기 생각밖에 없는데, 팔자 좋게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 당장 구내식당에 연락해 김 이사 배급량을 줄이라고 해야겠구만.
“회장님. 이게, 설계란 게 말이죠. 새로 뽑는 것보다 수정이 백배천배 어렵습니다. 한 번 계산해서 뽑고 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힘들어지죠.”
“하하. 맞습니다. 한 번 확신에 빠져 버리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죠. 그렇다고 새로 만들어 버리는 것도 설계자가 할 짓은 아니고요. 개발비도 생각해야 진짜 설계자 아니겠습니까? 하하.”
좋은 말이다. 이 부장은 식당에서 무제한으로 먹을 수 있게 해 줘야겠다.
“계산식 다 이상 없이 잘 적용됐는데, 실제 성능이 안 맞아 버리면 이거 미치고 환장하죠. 그래도 이 부장이 잘할 거니까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 부장, 그렇지?”
“어떻게든 새끈한 결과 내놓겠습니다. 하하.”
“이 테스트 결과만으로도 충분한데, 그래도 좀 아쉽긴 합니다. 지멘스급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ABB 정도는 제쳐야 어디 가서 명함 좀 내밀지 않겠습니까?”
“하하. ABB요…….”
연구개발부의 뚱뚱이와 홀쭉이 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잘하겠다고 하는데, 딱히 할 말도 없다. 그저 세계 3대 변압기 메이커 중 하나만 따라잡으라고 격려할 뿐이다. 1등도 아니고 3등 정도는 가뿐하잖아?
“근데 회장님. 오늘 대한전력 입찰일 아닙니까? 조합 안 가 보셔도 됩니까?”
김 이사가 오늘 있을 입찰로 화제를 돌렸다. 그만 갈구고 담배 다 피웠으면 나가라는 소린가?
“이번 입찰은 뭐랄까? 잔잔한 예술영화랄까? 이변이 있을 건덕지가 없어서 맘 조릴 일도 없네요.”
“하하. 900억 확정입니까?”
“낙찰률 98프로 정도에 받기로 했으니까 882억 정도 되겠죠? 성과급 기대되시죠?”
김 이사가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전에 다니던 세원변압기에서 죽어라 설계해서 개발 끝냈더니 찬밥신세가 돼서 나가라는 압박을 견디며 살았던 사람이다.
공장장 소개로 처음 우리 회사 왔을 때만 해도 몸이 호리호리했다. 지금은 ‘많이 먹는 녀석들’에 출연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기름져졌다. 그만큼 우리 회사와 궁합이 잘 맞는단 의미일 것이다. 스트레스 안 받게 하고 돈 잘 주니, 성과 잘 내고 살도 찌고. 좋다.
“회장님. 저도 성과급 기대해도 됩니까?”
“이놈 시끼야. 들어온 지 얼마나 됐다고 성과급 타령이야. 하여간 요즘 것들은 개념이 없다니깐. 회장님, 죄송합니다. 제가 아랫것들 관리를 못했습니다. 하하.”
“형. 나도 낼모레 쉰인데, 이런 소리 들으면서 살아야 돼? 다이어트 좀 혹독하게 시켜 줘?”
이 부장도 회사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하며 바른말 고운말을 거침없이 쏟아 냈다.
대기업 다니다 하꼬방 중소기업으로 오는 것이 쉬운 선택은 아니지만, 이 부장은 대단히 만족했다.
단순히 월급을 많이 받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회사 분위기며, 혁신도시에서의 삶이 맘에 든다고 여러 번 얘기했었다.
특히 처가가 가까워 와이프가 툭하면 처가에 가는 것을 두고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미혼 직원들 붙잡고 결혼 생활이 행복하려면 처가가 가까워야 한다고 설파하기도 했다. 명심하자. 처가는 가까워야 한다.
“담배 다 피웠으니까 저는 가 보겠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에 박정호 사장님 오시는 것 알고 계시죠?”
“네, 그럼요. 주말 동안 설계 붙잡으면서 박 사장님 강의 들을 준비 좀 해야죠.”
티격태격하는 뚱뚱이와 홀쭉이 형제와 작별 인사를 하고 연구개발부 사무실을 나왔다. 문을 벗어나자마자 허벅지에 진동이 느껴졌다.
긴 진동인 것을 보니 전화로군. 짧은 진동은 언제나 오려나.
전력용 변압기를 우리 회사 역량만으로 해 보겠다고 굳게 다짐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문자님이 요새 통 조용하시다. 하안거에 들어가셨나? 늘 지켜보고 계실 거야. 시크한 양반 같으니.
“네, 박 여사님.”
“아오, 진짜. 그냥 누나라고 해!”
“하하. 네, 누님.”
“너 진짜, 이따 각오해. 흐헷. 근데 조합 안 올 거야? 입찰 시작했는데, 올 사람이 안 오면 어째?”
“슬슬 가야지. 별거 없어도 가서 얼굴은 비춰야지.”
“그래, 빨리 와. 다들 지 사장 왜 안 오냐고 난리야.”
이 식지 않는 인기. 이번 입찰이 긴장감 하나도 없이 치러지는 것은 건방지게도 내 덕이다. 가서 박수 한번 받고 와야지.
안성파워 사무실에 위치한 조합에 도착했을 때는 대한전력 배전용 변압기 입찰 세 번째 순서가 막 시작됐을 때였다.
“우리 복덩이 지 사장! 어서 와!”
어린이집 재롱잔치 보듯이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인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마실 나온 것 같은 몇몇 사장들도 여유로워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좀 늦었습니다.”
“전력용 변압기는 잘돼 가? 주상 석권하더니 결국 전력용까지 한 큐에 가는구만. 하하.”
“시제품 제작까지는 끝났는데, 성능이 조금 아쉬워서 수정 작업 들어갔습니다.”
강 사장이 팔짱을 풀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천하의 프라임일렉트릭이 다시 만들어야 할 정도야? 전력용 변압기가 까다롭기는 하지. 그래도 지 사장이라면 한 방에 끝낼 줄 알았더니…….”
“뭐, 알스톰이나 ABB 정도는 나와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 최고로는 아쉽죠.”
이 정도 건방은 충분히 용인된다. 나와 우리 회사가 조합에서 가지는 위상을 생각하면 더 건방져도 될 것이다.
“알스톰요? 와, 진짜. 지 사장님 이번에 사고 한번 제대로 칠 모양입니다? 하하.”
일심전기 유원태 사장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일본 기술로 시작해서 미국 기술 전수받아 성장한 이 바닥에서 세계 최고 업체들과 맞짱 붙겠다는 소리를 했으니, 놀라지 않으면 사짜일 것이다.
다른 사장들도 한마디씩 덧붙이려는 찰나에 조합 이호영 상무가 어수선한 분위기를 정리하고 나섰다.
“3번 입찰 결과 나왔습니다. 우리가 98.7프로로 잡았습니다.”
짝짝짝.
박수 치기도 민망하다. 교통정리가 끝나고 들어가는 입찰이라 그렇다.
중전기조합에 남은 두 업체는 114억짜리 입찰 하나를 가져가고, 나머지 24개는 우리 조합과 중부변압기조합이 사이좋게 나눠 가져가기로 했다. 담합이 아니다. 조합 입찰의 이점이다. 3년 만의 아름다운 입찰.
오후 5시 마지막 29번째 입찰이 들어가면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마지막 것은 중전기조합이 가져가기로 했으니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정수 씨네 회사는 다 해서 얼마 가져가는 거야?”
누나가 부러움과 뿌듯함 가득한 표정으로 귓말을 건넸다. 이번 입찰로 190억가량을 확보한 자의 여유 가득한 질문이다.
“898억요. 총 82,000대니까 한 달에 7, 8천 대 만들면 되겠네.”
“와우. 진짜 우리랑 비교조차 못하겠네. 하하. 물량 터질 때 수출품 넘겨줄 테니까 좀 도와줘. 알았지?”
“공짜로는 못해 주지. 이따 하는 것 봐서. 후훗.”
어깻죽지 한 대 맞고 후속타 맞을 준비 하려는데, 이호영 상무가 좌중을 정돈시켰다.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장님들, 이번 입찰 결과 정리됐습니다. 이미 결과는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도 확정됐으니까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조합 17개 사 중에 혁신산단에 자리한 16개 사는 지역우선배정으로 75억씩 받았고, 일반입찰로 115억을 받았다.
우리 회사는 여기에 개발 우선배정으로 708억을 추가해 총 898억 원!
평균 낙찰률이 98.4퍼센트에 달해 대한전력이 제시한 예정가보다 얼마 차이도 안 난다.
작년 입찰에서 낙찰률 하락으로 50억 넘게 날려 먹은 것에 비하면 꿀 중에서도 지리산 토종꿀이다. 아따, 달다.
“하하. 입찰 잘 끝나서 아주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 좋은데 저녁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지 사장이 사는 걸로 해서. 하하.”
강 사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밥값 계산서를 밀어 넣었다. 파종하자마자 900억짜리 입도선매를 했는데, 소 한 마리 못 잡을쏘냐.
“하하. 자, 가시죠. 오늘 꽃등심 한번 제대로 혼내 줍시다.”
“꽃등심 좋지요! 혼구녕을 내러 갑시다. 하하.”
대한전력의 배전용 변압기, 우리끼리는 관수라고 하는 이 시장에 3년 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싸우기 싫어 봉합한 만들어진 평화가 아니라, 제대로 싸워 이룩한 평화 말이다.
그 평화를 축하하며 꽃등심 건배를 외쳤다. 꽃등심도 아주 달게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