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85)
285 유전자의 힘
월요일 아침부터 공장이 분주하다. 여기저기서 청소하고 물 뿌리고 대청소가 펼쳐졌다.
인천에서 귀한 손님이 오시는데, 치약 미싱은 못해도 물청소 정도는 해 줘야지.
준희 누나 부모님이 오신다고 해서 유난 떠는 것은 아니다. 변압기 업계 원로를 맞이하기 위한 노력이다.
박정호 사장이 설계를 보고는 잘못된 점을 꼭 집어 주는 광경을 그리는 것은 지나친 상상일까? 잠깐의 자문으로 변압기 성능이 크게 개선되는 소설 같은 상황. 현실이니 그럴 리가 없겠지만, 괜히 설렌다.
망상을 무참히 깨부수는 진동이 전해졌다.
“응, 누나. 출발했어?”
“어, 이제 출발하려고. 도착하면 1시쯤 될 것 같네? 점심 먹고 우리 회사 공장 갔다가 거기로 넘어가면 3시쯤 되겠다.”
“오케이. 청소 빡세게 해 놨으니까 먼지 쌓이기 전에 와. 운전 조심하고.”
오후 3시라. 마음이 급해진다. 해야 할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군.
“유민희! 컴온!”
내 방으로 들어가면서 민희를 호출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총총걸음으로 뒤따라온다.
캄보디아로 출장을 다녀왔으니, 성과를 내놓아야지.
절친인 박아름 대리와 출장 겸 휴가로 다녀 오랬더니 휴가 3일 내고 일주일을 시원하게 놀아 버리는 패기. 역시 젊음이 좋다. 젊어서 많이 놀아야지.
“뭘 그리 주섬주섬 들고 왔냐? 뭐 나 줄라고 선물이라도 사 왔어?”
가벼운 농담이라 생각하고 한 말에 아차 싶다.
이런 게 위력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하던데…… 나이를 먹고, 앉은 자리가 높아지면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법이지. 꼰대가 달리 꼰대가 아니니.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반성하고 있으려니, 민희가 비닐 쇼핑백 하나를 책상에 올렸다. 향긋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다.
“회장님, 선물입니다. 헤헤.”
“뭐야? 진짜로 선물 사 온 거야? 얼레? 담배네?”
“피우시는 게 폴리스먼트 맞죠? 저랑 아름이, 아니, 박 대리님 거랑 두 보루 샀어요.”
혼낼 일도 없겠지만, 혼낼 일이 생겨도 까방권이다. 짜식!
“역시 내 건강 챙겨 주는 직원은 너밖에 없다. 상점은 너 알아서 챙겨 가.”
“상점은 됐어요. 뭐 이제 쓸 일도 없는데요. 앞으로 박 사장님 계속 볼 텐데 괜히 머리끄덩이 잡히고 싶지 않네요. 헤헤.”
“하하. 네가 박 사장님을 잘 모르는구나. 엄청 대인배야.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거야. 아마 머리끄덩이는 아니고 죽빵 정도?”
“워메, 무서운그.”
민희 입에서 진심일 때 나오는 사투리 감탄사가 나왔다.
나주 생활 3년 차가 되니까, 이 동네 사투리 용례에 대해서 감이 잡혀 온다. 상당수는 회사에서나 외지인들 앞에서 사투리를 안 쓰려고 했다. 괜한 노력 같아서 특이하다 싶었다.
그 이유를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억양이 강한 경상도 사투리에 비해 고치기 쉬워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아픔이 담겨 있어서 그렇다는 설명.
광주에서 40년 넘게 산 한 직원이 해 준 얘기였다. 지금은 안 그렇지만, 예전엔 전라도 출신에 대한 차별이 있어서 외지인들 앞에서는 티 안 내려고 한다는 말 말이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웃어 넘겼다. 3년을 살아 보니, 내 앞에서 사투리 쓰는 사람보다 안 쓰는 사람이 더 많았다. 표준어인 척해도 그 특유의 뉘앙스 때문에 대번에 알아채지만서도.
이 좁아터진 나라에서 뭘 그리 구분 짓고 갈라놓으려 하는지 원. 하여간 다이내믹 코리아다.
“회장님! 출장 갔다 온 거 말씀드려요?”
“어, 그래. 담배 잘 피울게. 그리고 박 사장님이 저녁 한번 사준다고 하더라. 중국 출장 멤버라고.”
“하하. 대기하고 있을게요. 그때는 암 소리 안 하고 밥만 먹을게요. 헤헤.”
담배 선물 때문에 잡담이 길었다.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낌새가 느껴지면 바로 브레이크를 당겨야지.
“그래서 출장은 어땠어? 크메르트랜스 공장도 둘러보고 온 거지?”
“네네. 혁신산단이나 중국 공장 보다가 거기 가 보니까 진짜 공장 같지 않더라구요. 우리 공장 한 동 정도 겨우 되려나? 근데 거기가 캄보디아 변압기 공장 중에서 제일 좋은 곳이라고 하더라구요.”
“뭐 제조업이 없는 곳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거래 조건은 어때?”
민희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이 얘기를 해 주네.
“물량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한 달에 40피트짜리 컨테이너 하나나 두 개 정도구요. 단가도 나쁘진 않아요. 50키로가 880달러니까 100만 원 정도거든요? 중국에 수출하는 것보다 낫긴 하죠.”
“여운이 느껴지는데? 단가는 좋은데 뒷돈을 좀 과하게 요구해?”
“와, 진짜. 회장님은 대박이다. 어떻게 다 알고 계세요?”
그냥 찍은 것도 내가 하면 신내림의 위력으로 받아들여진다. 후훗.
동남아 전역에 국산 변압기가 수출되지만, 좀 사는 나라 빼고는 혀를 내두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는 뒷돈 없이는 수출 자체가 안 된다는 곳으로 유명할 정도다.
뇌물로 시작해서 뇌물로 끝나는 곳이 많다. 세관, 출입국 관리, 검역, 이 CIQ 통과부터 돈다발이 건네져야 하고, 말단 공무원부터 고위직까지 두루 갖다 바쳐야 한다. 수입처는 터무니없는 리베이트를 대놓고 요구한다.
어디 얼마나 요구했는지 드러나 보자.
“그래서 얼마를 달라고 해? 보내는 건 FOB지?”
“아니요…… CIF에 리베이트 7프로 얘기하데요. 계산해 보니까 중국에 수출하는 거랑 별 차이도 없어요. 중국은 물량이라도 많지.”
“아무리 못해도 10프로는 빠지는 거네? 거기다 CIF니까 CIQ에 줄 뇌물까지 생각하면…… 이거 남는 장사냐?”
민희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중국 말고 다른 지역으로 첫 수출이라 기대를 했을 텐데, 혁신적인 계약 조건에 혀를 내둘렀을 것이다.
“제가 뭐 할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아서, 일단 회장님하고 얘기해 보고 의사 전달하겠다고 했어요. 운송 조건은 FOB도 고려해 볼 수 있다고는 하는데, 리베이트 7프로는 무조건이래요.”
“변압기 몇 대 사는 걸로 팔자를 고칠라고 하는구만. 만약에 계약한다고 하면 내가 캄보디아 가야 하는 거야?”
이번엔 아쉬움에 곤란한 표정까지 더해졌다. 왜 또?
“계약 의사가 있다고 하면 여기로 오겠대요. 공장 견학도 할 겸.”
“그건 뭐 나쁘지 않네.”
“그게…… 우리가 초대하는 것이라 체류비를 부담해야 한대요.”
“하하. 고것들 귀엽네.”
갑질해야 한다는 건 어디서 배웠는지 원. 그런 것 배우지 말고 쓸고 닦고 조여서 GDP 높이는 법이나 좀 배우지.
“그래서 우리 해외영업 유민희 님 생각은 어때? 수출 진행했으면 좋겠어?”
“아니 뭐. 조건이 추접스럽긴 해도, 우리가 손해 보는 단가는 아니라서요. 수출을 늘려야 하니까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하거든요.”
추접스러운 조건은 또 뭐야. 표현 재미있으니까 합격이다.
“좋아. 우리 해외영업 담당자님께서 그렇게 생각하시면, 그렇게 해야지. 공장장님이랑 생산 상의해 보고 결정해서 알려 줘. 아니다, 일단 김 이사님한테 얘기해서 설계부터 확실하게 뽑아.”
“네? 저 또 구박하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죠?”
“내가 그렇게 추접시러워 보이냐? 이번 건 잘 처리하고, 경험 쌓아서 네 말대로 수출 늘려야지. 아세안 평정하고 무슨무슨 스탄 이름 단 나라도 가고. 점점 넓혀야지. 할 수 있지?”
“아, 네. 그럴 생각이긴 했는데, 어째 좀 찝찝한데요? 진짜죠? 혼내려는 것 아니죠?”
이 녀석을 진짜 혼내야 하려나? 썩 좋은 조건이 아님에도 캄보디아 수출을 기꺼이 허락한 것은 수출이 우리 밥그릇이기 때문이다.
전력용 변압기로 한몫 제대로 당기려면 수출이 답이다. 수출은 인프라와 영업망이 생명이다. 몇 푼 안 되는 배전용 변압기로 기반을 다져 놓고, 한 대에 10억 넘어가는 놈들 팔아재끼는 것이다.
목표는 2년 뒤이다. 2년간 대한전력 피 빨아먹으면서 트렉레코드 쌓고, 그걸로 동남아 일대를 휘젓는 것이다. 이 바닥 빅4가 되겠다는 선언. 그렇게 차근차근 이뤄 가자고.
“얘기 다 했으면 가 봐. 나 바쁘다.”
“헤헤. 열심히 해서 동남아 시장 석권해 보겠습니다!”
“잘해 봐. 직원 필요하면 얘기하고.”
아직 반도 이루지 못했지만, 계획대로 성과가 나는 것이 보이니 어깨에 살짝 뽕이 들어간다.
첫 수출로 중국을 선택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가장 어려운 시장인 중국을 뚫고 나면 동남아 국가들은 알아서 손을 내밀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대로 이뤄지니 뽕 안 맞고는 못 배기지.
이제 캄보디아를 시작으로 아세안 10개국 정도는 양팔 벌려 환영하겠지. 카탈로그랑 지명원부터 글로벌하게 만들어야겠구만.
작년에 ‘삼천만불 수출의 탑’ 대상자였는데, 뽀대가 안 나서 신청조차 안 했다. 적어도 ‘일억불 수출의 탑’ 정도는 받아야지!
또 혼자 뽕에 취해 정신 못 차리다 보니, 약속한 3시가 됐다.
“정수 씨! 저 아빠랑 같이 출발해요.”
“어머니는?”
“엄마는 어차피 얘기 길어질 것 같다고 집에 있으신대. 이따 저녁 먹을 때 모시러 가면 돼. 인사는 그때 해.”
누나와 전화 통화를 끊고 2분도 안 되어 차 한 대가 들어왔다. 걸어서 3분 거리. 달리 이웃사촌이 아니다.
나름 차려입고 온 누나가 차에서 내렸다. 오후 3시의 햇빛을 받고 환하게 빛난다. 누나는 환하게 웃고 있지만, 난 아주 제대로 경직됐다. 아따, 이게 뭐라고 이리 떨리냐.
뒷좌석에서 유전자의 강력한 힘을 확인시켜 주는 박정호 사장이 내렸다. 달리 부녀지간이 아니다.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이 외모를 질투했던 이유를 알겠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누가 봐도 누나의 아버지로 보이는 박정호 사장에게 다가가 본능적으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지정수입니다.”
말 몇 마디 더 붙여야 할 것 같은데, 마땅히 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게 참 어렵다. 그냥 인사만 하면 아쉽게 느껴지고, 몇 마디 붙이면 건방져 보이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고. 우리말의 존비어 문화가 이리 사람을 어설프게 만든단 말이지.
“반가…… 와…… 요. 얘기 많…… 이 들…… 었어…… 요.”
박정호 사장이 숨넘어가듯 인사말을 건네며, 악수를 청했다.
“얘기하시는 거 잘 못 알아들겠지? 그래도 엄청 좋아지신 거야. 지금은 혼자 걸으시고.”
뇌출혈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겨우 회복했다더니, 말이나 행동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혈압이 문젠데, 고혈압의 주된 원인은 스트레스일 것이다. 누나가 태양전기 최홍집이나 광진변압기 최웅민한테 이를 갈았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이 바닥에서 이름 날린 실력자가 작은 회사 차려서 차근차근 키워 가고 있는데, 양아치들이 물량 뺏겠다고 시장을 더럽혔다. 스트레스를 얼마나 받았을지 훤하다.
그걸 화끈하게 되받아친 누나의 능력도 대단하다. 아예 이름을 지워 버린 나도 제 역할을 했다. 우린 이렇게 만날 인연이었나 보우.
“공장 한번 보여 드릴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좋아요. 준희한…… 테 얘기 많이 들어서 기…… 대가 됩니다.”
누나가 슬쩍 와서 귀띔을 했다.
“이게 어떨 때는 아무렇지 않게 술술 얘기하시는데, 어떨 때는 말이 잘 나오시나 봐. 표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듣는 건 문제 없으니까 편하게 얘기하면 돼.”
생각하는 대로 말이 안 나오니, 얼마나 답답할까 싶다.
스트레스. 진짜 스트레스는 백해무익이다. 문자님과의 만남이 조금만 빨랐어도 박정호 사장의 고통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나와 어떻게든 만날 인연이었다고 생각하니, 더 아쉽게 느껴진다.
공장 투어를 가려는데 저 멀리서 공장장이 몹시 반가운 얼굴로 뛰어왔다. 젊은 시절 함께 필드를 누볐던 추억이 가득한 얼굴이다.
“아이고, 박 사장님. 저 박호연입니다. 기억하시겠습니까? 태양전기에서 공장장 노릇 했던.”
“허허. 알지요. 여…… 기서 이렇…… 게 만나네요. 반…… 가워요.”
“제가 사장님 쓰러지셨다는 얘기 듣고 맘이 많이 아팠습니다. 나 때문인가 싶기도 하고. 제가 최 사장 보필을 못해서 그렇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박정호 사장이 손사래를 치며 누나를 툭툭 쳤다.
“공장장님,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아버지한테 여기 얘기해 드릴 때마다, 공장장님 좋은 분이라고 했거든요. 아버지가 말씀이 불편해서 그렇지, 저랑 똑같이 말씀하셨을 거예요.”
“아이고.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시니 보기 좋으십니다. 허허.”
스트레스 안겨 준 사람들은 일언반구도 없고, 그 밑에서 일한 사람이 미안해하는 상황.
미안한 마음을 가질 사람이라면 애당초 양아치 짓도 안 했겠지. 선량한 사람만 미안한 감정을 알고 마음 졸이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양아치는 선처고 나발이고 밟아 주는 것이 답이다.
“자, 공장 들어가시죠.”
박정호 사장의 표정이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로 놀라움을 자아냈다.
각종 설비를 속 시원하게 다 보여 줬다. 변압기 업계 산증인이기도 한 사람이니, 놀람의 정도가 극에 달했을 것이다. 살짝, 아니 많이 뿌듯하다. 이쯤에서 다시 한 번, 문자님 감사합니다.
공장 순회공연이 끝나자 누나가 다음 행선지를 지목했다.
“아버지가 전력용 변압기 얘기 들으시더니 계속 그 얘기만 하셨어. 설계 보고 싶어 하시는데, 괜찮겠어?”
“아이, 그럼. 우리 설계진도 오늘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럼 바로 갑시다.”
떨리고 어색했던 기분이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그냥 기대된다.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