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88)
288 천문학
8월의 끝자락. 더위도 한풀 꺾이는 와중에 전력용 변압기 두 번째 시제품이 나왔다.
첫 번째 시제품에서 중신만 교체한 것이긴 해도, 아주 번개 같은 속도였다. 신제품 개발한다고만 하면 눈빛이 반짝거리는 공장장이 65년 전 젖 먹던 힘을 발휘한 까닭이다.
시제품 앞에서 의기양양해 있는 공장장에게 덕담을 건넸다.
“공장장님. 그러다 쓰러지십니다. 살살 좀 하시지, 뭘 그리 서두르셨습니까?”
“아휴, 나는 뭐 벌려 놓으면 잠이 안 와. 이제 이거 끝냈으니까 오늘은 편안하게 잘 수 있겠네. 허허.”
“이번엔 확실할 겁니다.”
“아이, 그럼 확실해야지! 이 부장이랑 다리몽둥이 내기했으니까, 이번에도 손실 제대로 안 나오면 가만 안 둘 거야.”
공장장이 오함마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성능이 잘 나오지 않을 리 없을 것이다. 내 머릿속은 이미 후속 과정에 들어가 있었다.
전기연구원에 시험 보내고, 성적서 나오면 대한전력으로부터 입찰 유자격자 인증 받고, 발전자회사의 발전소용 변압기 입찰 나오면 당당히 받아서 납품하고, 납품 실적 한두 건 쌓이면 철도공사 변압기도 납품하고, 수출도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보낸 돈 입금됐다는 알림 문자 받으며 흐뭇해하는 것까지.
“특성 시험 들어갑니다!”
이규철 부장의 시험 안내 방송이 단잠을 깨웠다. 관건은 손실, 즉 효율이다. 이건 바로 결과가 나온다. 두근두근.
“결과 나왔습니다!”
안내 방송에 시험실 안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어때요? 잘 나왔어요?”
이 부장이 잘 안 보이는 미소를 내보였다. 저건 천사의 미소로다!
“전손실이 319킬로와트 나왔습니다. 1차 시제품보다 30킬로와트 줄어들었습니다. 진짜 엄청나게 줄어든 것입니다!”
319라는 숫자가 귀에 들어온 이후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옆에서 환호성과 탄성을 지르는 것 같은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고쳤노라, 떨어졌노라, 성공했노라.
“공장장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이거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이 성능이면 진짜 대단한 겁니다. 저는 대만족입니다!”
“다들 고생들 했어. 아직 시험 다 끝난 거 아니니까 좀 더 지켜보자고. 그래도 기분 좋긴 하네. 하하.”
대만족하는 나와 달리 공장장이 덤덤한 척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저 정도 손실이면 입찰에서도 치트키나 마찬가지니, 덤덤한 척하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대당 10억이 넘어가는 전력용 변압기는 최저가 입찰보다는 TOC 구매 방식이 일반적이다. 예정가의 100퍼센트로 들어가도 변압기 효율에 따른 경제성이 높으면, 경쟁사가 80퍼센트로 들어갔어도 제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4개 사의 전력용 변압기가 350kW 내외의 손실을 내고 있으니, 319란 숫자는 그야말로 로또 번호나 다름없다.
이런 날 마블링 좋은 투뿔 한우로 전력용 변압기팀을 혼내 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 시험이 다 끝나지 않았다. 3일 뒤 제대로 혼내 주리라.
기쁜 마음에 직원들 혼내 주는 것은 혼내 주는 것이고, 난 일단 후속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특성 시험성적서를 들고 최윤근 상무를 찾았다.
“상무님, 바쁘십니까?”
“아, 회장님. 어떻게 특성은 잘 나왔습니까?”
어떻게 됐냐는 최 상무의 물음에 말없이 그랜저…… 아니 성적서를 내밀었다.
“허허. 이거 장난 아닌데요? 이 성능이면 대한전력이 쌍수 들고 환영할 겁니다. 축하드립니다.”
“이 정도면 글로벌 빅3에 버금가는 수준 아닙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해외시장에서도 재미 좀 볼 것 같습니다. 미국하고 유럽은 몰라도, 그 외 지역은 대한전력 납품 실적만 있어도 반은 먹고 들어갑니다. 허허. 그리고 좋은 소식이 또 있습니다.”
이 사람 이거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또 산타할아버지 행세로군. 대한전력 가서 무슨 얘기를 듣고 왔는지, 운만 띄워도 기대가 잔뜩이다.
“하하. 무슨 좋은 소식을 듣고 오셨길래 그러십니까?”
“대한전력이 작년부터 154변압기를 저손실형으로 교체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는데, 내년 4월부터는 도입을 확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전력이 목표로 하는 손실이 몇인 줄 아십니까?”
모를 것이라고 물어본 질문이니, 대답하지 않고 그저 쳐다봤다.
좋은 소식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개발한 것보다 성능이 많이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변압기 교체계획에서 우리가 앞서 나갈 수 있다는 얘기렷다!
“표준형을 기본으로 1단계 사업 목표가 손실 350킬로와트입니다. 지금 4개사가 딱 그 정도 수준을 개발했으니까 그에 맞춰서 사 주겠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이것보다 30킬로와트 낮은 제품 들고 나오면 어찌 되겠습니까? 허허.”
예상했던 대답에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이거 잘하면 조 단위로 뽑아 먹을 수 있겠다.
“사업 규모가 어느 정도입니까?”
“이게 총 2단계로 해서 2030년까지 세계 최고 수준으로 개발해서 기존 전력용 변압기 전부 다 교체하는 것이 목표인데요. 전부 교체한다 치면 못해도 3조짜리 프로젝트입니다. 변압기 구매 비용만 3조입니다. 이거 끝나면 345랑 765 변압기도 진행할 겁니다.”
“전력용 변압기는 뭐 했다 하면 조 단위는 우습네요. 우리 회사까지 5개 회사니까 단순 나누기해도 6천억이네요. 하하.”
최 상무가 고개를 저었다. 겸손 떨지 말라는 그 표정이다.
“이 정도 손실이면 전량 다 차지해도 될 정도입니다. 6천억이 웬 말입니까? 허허.”
3조짜리 프로젝트를 독식한다라…… 시작이니까 그저 한두 대 정도만 납품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마어마한 시장이 나만 기다리고 있다니!
문자님의 도움 없이 나와 직원들 힘으로 이뤄 낸 성과이지만, 문자님이 아니면 만들기 힘들 성과이다.
이욱현 부장은 현존하는 제일 좋은 자재들을 사용하면 전력용 변압기 손실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했다. 커터칼 잘 잘리게 한다고 다이아몬드로 만들자는 얘기나 똑같은 것이다. 154kV 60MVA 1대 만들어서 9억 받는데, 매출 원가가 10억이면 미친 장사지.
대한전력도 저손실 전력용 변압기 교체 프로젝트를 위해 대당 단가를 9억에서 12억으로 올렸다. 그만큼 성능을 높이려면 돈이 많이 든다는 얘기다.
우리가 개발한 변압기가 성능이 압도적으로 좋게 나온 것도 비싼 자재를 아낌없이 썼기 때문이다. 높은 원가를 상쇄시켜 준 것이 바로 문자님이 주신 자동화설비들이다.
배전용 변압기 제작에 적합한 설비를 우리 일개미들이 잘 개조했고, 그 성과가 이렇게 대박으로 다가온 것이다. 3조라니! 3조라니! 일단 진정하자.
“전기연구원 시험 통과해서 성적서 받는 것이 급선무겠네요. 거기 입회시험은 문제없겠죠?”
“뭐 우리 자체 시험에서 문제없으면 통과될 겁니다. 단락시험은 우리가 할 수 없긴 한데, 잘될 겁니다. 이 부장이 설계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니 말이죠.”
좋다, 좋아. 올해 안으로 시험 끝내고 대한전력 입찰 유자격자 인증까지 받아 내자. 매년이 그랬지만, 올해 보다 내년이 더 기대되는 상황.
역시 우리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은 언제 받아도 기쁘다. 최 상무가 또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랏? 선물이 하나가 아닌 모양이네?
“하하. 좋은 소식이 또 있습니까? 이제 표정만 봐도 알겠습니다.”
“회장님 앞에서는 연기도 어렵습니다. 허허. 제가 전에 말씀드린 것 있지 않습니까?”
“전에 말씀드린 것이라면 대북전력지원사업 말씀입니까?”
“맞습니다.”
못해도 5조짜리라는 그 대박 사업! 지금 정부가 대화하자고 그렇게 제안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북한하고 관계 개선이 될지 모르겠지만, 성사만 되면 대박이다.
“제가 어제 관리본부장 하고 있는 후배하고 술 한잔했는데, 이 친구가 이쪽으로 전문갑니다. 예전에 케도라고 아시죠? 북한에 원전 지어 주는 사업 말입니다.”
“알죠. 저 중학교 땐가 그때쯤이었던 것 같은데요.”
“역시 회장님은 참 젊으십니다. 허허. 아무튼 그 친구가 그 일로 북한에도 오래 있었고, 개성공단 때도 송배전사업 총괄했었지요. 지금도 내부적으로 TFT 꾸려서 사업재개 검토하고 있다고 하는군요.”
“음, 제가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대한전력이 움직인다고 해도 결국 북한이 핵 포기하지 않고, 남북관계 개선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지 않습니까?”
최소 5조짜리 사업은 북한하기 달렸다. 이놈들아, 핵 좀 포기해라. 나도 좀 먹고 살자.
“그렇지요. 이 친구도 그거 때문에 여럿 만나고 다니는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인맥이 아주 화려한 녀석이지요.”
“그래서 뭔가 움직임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내년 봄 중에 정상회담 여는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전까지 북에서 생떼를 부릴 건데, 다 예상하고 있답니다.”
“생떼라면 뭐 핵실험이라도 또 한다는 얘기입니까?”
“네. 조만간에 핵실험을 하든지, 미사일을 날리든지 뭐라도 할 것 같다고 하는군요. 근데 그게 대화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라 오히려 빨리 쏴 주길 바라더군요. 허허.
아따 시발. 이런 마찌꼬바 중소기업의 사장과 상무가 나누는 대화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다.
정상회담으로 남북관계가 한 큐에 풀린다면, 5조짜리 프로젝트가 떡하니 밥상에 올라온다. 아따 마, 화끈화끈하네.
“근데 대한전력 본부장이라도 그런 사정까지 다 알 수 있는 겁니까? 아무리 인맥이 화려해도 정상회담 추진은 극비 사항 아닙니까?”
“허허. 이 친구가 입이 엄청 무거운데 저한테만 넌지시 얘기해 줬지요. 저를 믿으니까 그랬겠지요. 정확히는 얘기 안 하는데, 지금 산업부랑 통일부 왔다 갔다 하면서 일을 맡고 있는 모양입니다. 회장님께서도 비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죠. 입찰공고 나올 때까지 아예 잊고 살겠습니다.”
“근데, 그 친구가 해 준 얘기가 더 있습니다.”
5조짜리 얘기라 그런지 마냥 흥미진진하다. 기사에서나 접했던 업계 관계자 혹은 정부 고위소식통이 여기 있었네그려.
최 상무가 접한 소식은 아주 어마어마했다.
정부 플랜이 내년 여름까지 북미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비핵화와 종전협정을 교환하는 식으로 남북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킨다는 것이었다.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내후년에는 대북지원사업이 시작되는데, 전력사업이 가장 우선순위가 될 것이란다.
“건설업계가 가장 큰 특수를 입겠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을 겁니다. 장기 프로젝트라 급할 건 없지만, 우리도 미리 준비를 해야겠지요.”
“전력용 변압기 시장에 빨리 안착하는 것이 중요하겠군요. 이거 스케일이 너무 커져서 감이 안 잡힙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전해 준 소식. 총 8조원짜리다. 천문학적이란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넘사벽으로 여겼던 국내 빅3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변압기 사업만으로 말이다.
“허허.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준비할 것이 뭐 있는지 꼼꼼히 챙길 테니까, 회장님께서는 우리 행사 잘 챙겨 주시죠. 제가 한 달만 일찍 들어왔어도 작년 창립기념행사에서 술 좀 마셨을 텐데 아쉽습니다. 허허.”
그렇다. 행사의 계절 9월이 다가왔다.
창립 3주년 기념행사. 이번에는 화려한 부대행사도 같이 치러진다. 생각난 김에 그놈 자식 붙잡고 담배나 하나 피우자고.
“한 부장아!”
“부르셨습니까?”
좀비 같은 형상을 한 덕준이가 다가왔다. 자식, 바쁜 티는 다 내고 다니는구만.
“테라스로 컴온.”
내 방 테라스에서 공단 미세먼지 바람을 맞으니 주머니로 손이 절로 갔다.
“나 끊었다니까.”
덕준이가 애절한 눈빛과 달리 금연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올해에만 몇 번을 끊는 거냐? 오늘까지만 피워. 갈 땐 가더라도 담배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악마의 유혹에 1초의 고민도 없이 넘어가 버린 덕준이의 확고한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다들 뭐라고 안 하지?”
“아무래도 이동거리가 있으니까 처음엔 꺼렸는데, 거기가 죽이더만. 놀러 간다 생각하시라니까 좋아하시더라고.”
“덕준아.”
“네, 회장님.”
“나 진짜 이번에 돈 많이 썼다. 기숙사 짓는다고 돈 때려 박아서 개털된 것 알지? 그런데도 시원하게 썼으니까 평생 잊으면 안 된다.”
“우리끼리 이런 말 좀 그렇긴 한데, 정수야, 고맙다.”
창립기념일이자 마이 소울 프랜드 덕준이를 위한 행사에 인색할 수 없는 법이다. 통장은 물론이고, 돼지저금통까지 탈탈 털었다. 우리 회사 특등사수의 결혼을 어찌 그냥 넘어갈 수 있나!
덕준이 너 이 자식. 내가 너 엎고 다니며 콧물 닦아 주면서 키웠는데, 이렇게 가다니! 행복해라,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