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290)
290 축포
눈을 떴다.
어제 폭음과 폭주의 쓰나미에도 귀신같이 7시에 일어났다. 공장 짬밥이 7년을 향해 가니, 생체 알람이 얄짤 없다.
성수기에는 1박에 500만 원에 달한다는 이 방, 혼자 쓰기엔 너무 넓다. 혼자보단 둘이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사람들은 농담조로 준희 누나랑 방 같이 쓰면 되지 않냐고 했지만, 진짜 그랬다간 온갖 구설수에 시달릴 것이다. 결혼만 하면 다 익스큐즈해 주지만, 그 전엔 남녀유별이 엄격한 이상한 풍토다.
혼자의 삶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가끔 깊은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열일 하느라 진이 빠져 겨우 퇴근했는데, 불 꺼진 집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씁쓸함이 확 밀려온다. 어제오늘처럼 빡세게 놀다 잠들었을 때도 그렇다. 눈 떴을 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참 좋으련만.
어제 술자리에서 희철 사장은 색다른 의견을 제시했었다.
“정수야, 다시 오지 않을 기회야. 혼자일 때 맘껏 즐겨야 한다고! 덕준이도 행복할 거고, 너도 이제 결혼하면 행복하겠지만…… 암튼 그런 게 있어! 지금을 즐겨!”
“하하. 결혼을 하라는 겁니까, 말라는 겁니까? 형님, 행복하시죠?”
“야이, 나는 지금 엄청 행복하지. 황 사장한테 내가 행복해한다고 꼭 얘기해 줘.”
결혼 후 펼쳐지는 삶은 이세계 같은 것인가? 희철 사장의 애매한 표정만으로는 알기 어렵다. 체험만이 답이겠군.
서른네 살이 되니, 나도 모르게 결혼에 대한 생각이 진해졌다. 물론, 죽을 때까지 펑펑 쓰고도 남을 충분한 돈을 벌었으니 가능한 생각일 것이다.
현실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결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청춘들에 비하면, 호사스러운 고민일지 모른다. 우리 직원들만이라도 결혼과 편안한 노후를 꿈꿀 수 있도록 내가 구제하리다! 땀만 부지런히 흘리라고, 내가 그 땀을 비싸게 사 줄 테니까.
창립 3주년 행사 이틀째도 아주 바쁘다. 오전엔 필드를 밟으며 백돌이의 위엄을 보여 줄 참이다. 스크린으로는 백타의 벽도 가뿐히 넘는데, 왜 필드만 나가면 OB와 친해지는 원.
“하하. 지 사장, 이래 가지고 오늘 파백할 수 있겠어? 이러다 계백 장군 되겠어? 하하하.”
“아, 진짜. 오늘은 너무 짜게 잡아 주는 거 아닙니까? 멀리건도 안 주고 너무 짭니다!”
“하하. 캐디한테 이쁨 받는 것도 실력이라고.”
골프 구력 20년이 넘는 강호창 사장이 옆에 붙어서 내내 뻐꾸기만 날린다.
주말 골퍼에게는 구찌가 필수라더니, 아주 멘탈을 흔들어 놓는다. 머리 올리고 나서도 여전히 백돌이에 머물고 있는 것은 강 사장 때문이다.
99타나 101타나 도긴개긴이지만, 자릿수 차이가 주는 위압감은 상당하다. 파백하고 나면 강 사장부터 무찌를 테다.
“정수 씨, 오늘 한 부장님 결혼한다니까 마음이 심란해? 하하. 오늘도 백돌이 샤워장 가서 혼자 씻어야겠네? 화이팅!”
“나도 레드티에서 치면 90타는 나온다니까.”
백돌이 구박은 누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것이 칭찬과 격려보다 구찌가 남발되는 실전 코리안 주말 골프의 참된 모습이다.
필드만 나오면 구찌 중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은 여전하군. 강 사장 따라다니면서 못된 것만 배웠어 아주.
오전 라운딩을 가볍게 끝내고 멋진 옷이 아닌 그냥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페셜 이벤트 주인공을 위한 준비. 이제 출동해 보자.
9월 초에도 한낮에는 여전히 덥다. 그러나 덕유산 자락에 자리한 잔디밭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결혼하기 딱 좋은 날씨군.
서울과 광주에서 출발한 버스들이 덕준이와 오윤경 기자 친지와 친구들을 실어 날랐다. 어수선하고 북적거리는 잔디밭. 웨딩홀 느낌 그대로다.
“어이, 새 신랑!”
딱히 할 일이 없어 보이는 덕준이를 불렀다. 신부는 새벽부터 화장하고 치장하느라 바쁘지만, 신랑은 분칠 몇 번 하면 끝이니 그냥 서서 어리바리댄다.
“이거 너무 오바한 건 아니지? 그냥 예식장 빌려서 할 걸 그랬나 싶고.”
“내가 우리 한 부장 결혼하는데 평범하게 보낼 수 없지. 바람 선선하고 얼마나 좋냐?”
“암튼 진짜 고맙다야. 내가 평생 안 잊을게.”
덕준이답지 않게 며칠 전부터 고맙다를 연발했다. 결혼 앞두면 이리 변하는 것인가!
“평생 고용계약서 썼으니까 이러지. 넌 이제 평생 노예 되는 거야.”
“뭐 씨댕. 까짓것 노예처럼 굴러야지.”
이놈 자식 결혼하는데 뭘 해 줘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축의금 3만 원으로 끝낼까 하다가, 기분 좀 냈다. 결혼식 비용은 당연히 내가 부담했고,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증여해 줬다. 증여세까지 깔끔하게.
남들은 아무리 친구라도 너무 과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덕준이는 태양전기 우진택한테 뺨 맞은 것만으로도 이미 값을 다 치렀다.
함께 고속버스 타고 나주 내려갔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 지난한 시간을 생각하면 과하기는커녕 약소할 뿐이다. 나는 수천억 부자가 됐는데, 동거동락한 전우이자 투자자에게 그 정도쯤이야.
진짜, 있는 돈 탈탈 털었다. 그 대가로 덕준이가 자기 영혼을 양도했으니, 이제 노예처럼 부릴 테다.
“근데 진짜! 진심으로 축가 불러 주고 싶었는데, 꾹 참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내가 축가 불러 줄까?”
“정수야, 제발. 내가 진짜 죽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일할게. 이왕 참은 거 끝까지 잘 참아 주라.”
“내가 친구를 위해서 축가 불러 주겠다는데, 그걸 참아야 하는 거냐?”
“진짜 그러지 말자. 우리 장모님이 심장이 약하셔. 네가 참아야 해.”
그렇게 친구 놈과 결혼 전 마지막 대화가 끝났다.
행복해라, 잘 살아라 등등의 미사여구가 일체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눈빛으로 진심을 전했고, 덕준이는 마음으로 받았다. 짜식.
결혼식이 열리는 1시가 가까워지면서 소란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서울에서 피로연을 미리 치르고 왔기에 새로 참석한 하객은 많지 않았지만, 우리 직원들과 초대 손님들만으로 화개장터가 열렸다.
띠링.
덕준이 부모님께 인사하려고 움직이려는 찰나에 핸드폰 알림 소리가 났다. 혹시? 설마?
기대감이 끓어오르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핸드폰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재난문자로구만, 쳇.
-[기상청] 12시 39분 북한 함경북도 길주군 지역 규모 5.6 지진 발생/여진 등 안전에 주의 바랍니다.
북한에서 지진이 났다고? 이 자식들 핵 한 방 날렸구만.
“회장님! 재난문자 보셨습니까?”
최윤근 상무가 달려왔다.
“상무님 말씀대로네요. 이거 좋은 징조로 받아들이면 됩니까?”
북에서 핵이든 미사일이든 쏠 것이라던 최 상무의 정보가 그대로 들어맞았다. 그게 대화로 가는 전초전이랬다. 이제 술술 풀려서 대규모 프로젝트를 띄울 일만 남은 것인가!
“허허. 혹시나 했는데, 우리나라 대북소식통들 장난이 아닙니다. 이제 남북미 서로 거친 말들 내뱉으면서 강경한 척하겠지요. 그게 대화하겠다는 신호라고 했으니, 지켜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하하. 평소 같으면 이러다 전쟁 나는 거 아니냐 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마음이 편해집니다. 우리도 이제 대북사업으로 한몫 제대로 챙겨야지요?”
“허허. 그럼요. 만반의 준비를 다 해 놓겠습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최 상무와 국제 정세를 논했다. 북한에서 핵 날린 것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정수 씨, 뭐가 그리 좋아서 싱글벙글이야? 친구 결혼한다니까 너무 슬퍼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여기저기 인사하기 바쁘던 누나가 내 옆으로 와서는 웃음의 정체를 깨물었다. 미래를 약속한 사람일지라도 비밀은 지켜야지.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라고 감히 말할 수 있나.
“기분 좋은 날이잖아? 마음껏 웃어야지. 덕준이 부모님한테 인사드리러 가자.”
“뭐 있는 것 같은데? 영업 비밀이라 이거야? 하하.”
이번엔 내가 팔짱을 끼고는 끌고 갔다. 내 팔짱 공격 한번 당해 봐라.
“아이고, 정수야!”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덕준이 어머니가 잃어버린 아들이라도 찾은 듯 반색하며 소리를 쳤다.
“어머니, 잘 지내셨죠? 축하드립니다. 이제 골칫덩이 막내까지 결혼하니 잠 잘 주무시겠습니다? 하하.”
“아휴, 그래. 우리 아들. 집에 좀 놀러 오지 그랬어. 이게 얼마 만이야?”
“그러게요. 그동안 인사 못 드려서 죄송해요. 덕준이 결혼시키려고 많이 바빴습니다.”
“그래그래. 너도 참 여전하네. 나는 진짜 너 성공할 줄 알았어. 잘돼서 정말 축하해.”
대학에서 덕준이를 알고 나서부터 우리 집 반찬을 책임져 줬던 분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사람 구실 못했으니, 이렇게 결혼식 성대하게 열어 주는 것으로라도 갚아야지.
하객들과 인사해야 하는 바쁜 와중에도 어머니가 내 손을 한참을 붙잡았다. 덕준이를 사람 만들어 준 고마움이랄까?
어머니에게 막내 덕준이는 그냥 착한 아들이었다. 딱히 붙일 만한 타이틀이나 수식어가 없을 때 나오는 마법 같은 표현.
암울했던 시절, 내 옥탑 자취방에서 덕준이와 밤새워 게임하다가 해 뜰 무렵에야 잠이 들었는데, 어머니 전화에 깬 적이 있었다.
‘내가 너 때문에 밤에 잠이 안 온다’로 시작해서 한참 동안 이어지는 잔소리. 괜히 나까지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지.
어머니 수면장애의 원인이었던 덕준이가 나와 함께 비상하면서 그 잔소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어머니는 이제 잔소리 대신 환한 웃음과 함께 ‘우리 아들 덕준이’를 외치며 뿌듯해하신다. 고생 끝에 낙이 있으리.
부모님과 누나, 형에게 인사를 끝내고 잔뜩 긴장해 있는 덕준이에게 다가갔다.
“얼굴 좀 풀어라. 너답지 않게 그러고 있냐.”
“이게 뭐라고 이렇게 긴장되냐. 결혼 두 번은 못하겠다야.”
엄용수가 되지 않겠다는 선언. 그래, 응원한다.
“인마. 너 결혼한다고 북한에서 핵 축포 날렸다더라. 진짜 역사적인 이벤트 아니냐?”
“북한에서 핵을 쐈다고? 그건 뭔 소리야?”
“재난문자 안 봤구나? 북한에서 지진 감지됐대. 결혼 축하한다고 축포 날린 거지 뭐. 이제 전 세계 정상들이 축전 보낼 거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눈치 빠른 덕준이답게 뭔가 캐치했다는 표정이다. 그래, 앞으로 10년, 20년을 먹여 살릴 축포다. 정은이 녀석, 이벤트 한번 제대로네.
“신랑 신부, 입장!”
그렇게 결혼식이 시작됐다. 의기양양한 덕준이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오 기자의 동시 입장에 여기저기서 야유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 되게 잘 어울려. 그렇지 않아?”
누나가 박수치면서 귓말을 건넸다. 부러움이 가득 담겨 있는 말처럼 들렸다.
“누나도 드레스 입고 싶어? 베라킹으로 하나 사 줄까?”
“하하. 그럼 나는 키튼으로 슈트 하나 뽑아 줘?”
가벼운 농담에 몇천만 원이 왔다 갔다 한다. 부자놀이, 이젠 놀이가 아니라 일상이다. 후훗.
주례자로 나선 강호창 사장이 ‘가을을 두드리는 아름다운 9월’로 시작하는 길고 긴 일장연설에 들어갔다. 훈화 말씀과 주례는 짧아야 좋다고 그러더니, 저러고 있다.
“강 사장님, 주례가 너무 긴 거 아니야? 당신이 더 신이 나신 것 같아.”
“아침에 라운딩할 때 그렇게 구찌를 먹이더니…… 저거 두고두고 먹잇감으로 써야겠어.”
“정수 씨. 파백이나 하고 말씀하세요.”
“스크린에서는 90대 넉넉하게 들어왔다니깐.”
주례가 길어지니 잡담에 빠지는 부작용이 생긴다. 주례 빨리 끝내고 축가나 듣자고.
“두 사람의 앞날에 귀감이 될 소중한 말씀을 해 주신 주례 선생님께 다시 한 번 감사 말씀드립니다. 다음으로 두 사람을 위한 축하 공연이 있겠습니다. 요즘 핫하죠?”
잔디밭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호성이 나왔다. 그래, 내가 사촌간볼빨기 부른다고 돈 좀 썼다. 내가 못 부른 축가 제대로 불러 다오.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요.”
아휴, 좋다. 어제 오마이돌스에 이어 사촌간볼빨기까지. 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니지. 아니유 보기 전까진 삶을 이어 나가야지. 내년엔 돈 더 많이 벌어서 꼭 아니유를 부를 테다.
우주를 가져, 말해 좋다고, 처음부터 우리. 히트곡을 쏟아 낸 사촌간볼빨기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꺄악거리는 직원들처럼 소리치지 못한 것은 아쉽다.
“하하. 아까부터 왜 이리 기분이 좋나 했더니, 사촌간볼빨기 와서 그렇지?”
헛다리짚은 누나에게 환환 웃음만 보여 줬다.
오늘 기분이 좋은 것은 사촌간볼빨기가 와서도, 5조짜리 대북사업이 아른거려서도 아니다. 만성신부전이 걸리면 기꺼이 콩팥 하나 내어 줄 수 있는 친구 놈이 결혼해서 그렇다.
덕준이, 이 새끼야. 행복해라. 나도 곧 너를 따라가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