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45)
045 명확한 전선
“박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최대한 밝고 활기찬 목소리로 금성전기 박준희 사장 전화를 받았다.
박 사장도 정보가 빠삭할 테니 조합의 지랄질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난 걱정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전달해 주고 싶었다.
“어머, 놀래라.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좋은 일이면 저도 같이 알자구요. 사업이 엄청 잘되시나 봐.”
“잘되든 안 되든 항상 기운 넘치게 지내야지요. 그나저나 어인 일로 이 멀리까지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자동권선기요! 언제 팔기로 결정하실 거예요!”
나보다 더 기운이 넘치는데? 자동권선기 보고 나더니 몸이 달았나 보군. 아직 팔 때가 아니니까 우리 좀 더 친해지자구요.
“하하. 안 그래도 요즘 계속 회의 중입니다. 만들기가 워낙 까다로워 저희 것 채우기도 힘든 상황이고, 보통 물건이 아니다 보니 판매에 회의적인 중역들도 있고 말이죠. 회사 일이라는 것이 사장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사장님과 약속한 것도 있고 해서 제가 책임지고 준비하겠습니다.”
보이지 않으니 마음껏 구라를 풀자. 아직 열 대 다 만들지도 못했으니 마냥 구라는 아니잖아?
“아휴. 사람 이렇게 설레게 해 놓고 이러시기 있습니까? 약속한 것 잊지 마세요. 약속 지키나 안 지키나 지켜보겠습니다.”
은은한 협박인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됐기 때문일까? 박 사장이 좋은 대화 스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겠지? 친구였으면 죽이 잘 맞았을 것 같다.
“하하. 저는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입니다.”
“이거 녹음 중입니다. 하하. 그나저나 요새 조합 때문에 정신없죠?”
“역시 알고 계시네요. 나주 내려오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이라 딱히 걱정되지는 않고, 그저 지켜보고 있습니다.”
“실은 그것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자동권선기야 사장님 믿으니까 기다리면 되겠죠.”
뭔가 정보를 주겠다는 신뢰감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호의가 계속되니, 이 사람을 믿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이 생길 정도이다. 확실히 보통내기는 아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경계심만큼은 버리지 말자.
“사장님들이 결국 움직이더라구요. 엉덩이 무거우신 분들이라 어지간하면 잘 움직이지도 않는데…….”
“조만간에 대한전력 본사까지 와서 집회도 하겠다고 하던데, 사장님도 오십니까?”
“제가 그렇게 한가해 보이세요? 호호. 업체들 반발이 좀 있으니까 뭐라도 하겠다는 것 같은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네, 뭐 저도 신경은 안 쓰는데, 왜 귓가에 모기 윙윙거릴 때 그런 것 있잖아요? 모기를 잡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고 뭐 그런 상황입니다.”
“모기 잡는다고 괜히 귀 내리치지 마시구요. 우선 배정이 변압기에만 주는 것도 아닌데, 다른 업계가 가만있겠어요? 지금이야 사장님 혼자이지만, 올해부터 공장 계속 늘어날 텐데요. 조합이 그러는 것은 업체들 나주 내려가면 조합 탈퇴할 것 뻔하니까 붙잡아 보려고 그러는 거죠.”
의견 일치! 제대로 된 사업가 박 사장의 해석이 나와 정확히 일치한다. 안 그래도 하는 일도 없고, 힘도 없는 조합이 해 봐야 별것 없다. 다른 업계 조합들과 연대라도 하면 모르겠지만, 그럴 일은 결코 없다.
“그런데요, 몇몇 회사는 이를 빡빡 갈고 있으니까 경계는 하셔야 할 것 같긴 해요.”
“조합 이사장네 회사랑 동서라는 김 사장 그 사람들 맞죠? 태양전기도 포함이겠네요.”
뻔하지. 원래 여론이라는 것은 활동력 강한 소수가 만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보나 마나 조합에서도 몇몇 강경파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겠지. 어디 누가 이기나 해 보자.
“귀신같으시네요. 시끄러워서 좋을 거 없긴 한데, 뭐 사장님께서 어련히 잘하시겠죠. 참! 사장님! 저도 나주 내려갑니다.”
“나주 오신다구요? 그래요 놀러 오세요. 제가 곰탕 한 그릇 사 드리겠습니다.”
“나주에 공장 차린다구요! 지금 서너 개 업체가 이전 생각하고 있는데, 그 정도면 내려가도 충분하겠다 싶더라구요. 처음엔 사람 걱정이 좀 있긴 했는데, 사장님께서 자동권선기 팔 것이니까 이제 문제 될 것이 없죠.”
이건 또 무슨 희소식인가!
“그렇습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여기 사막처럼 널찍하니 좋습니다. 양팔 벌려 대환영입니다.”
“아무래도 한두 푼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서 당장은 힘들어요. 내년쯤 생각하고 있는데, 우선 배정 때문에 최대한 빨리 내려갈 생각이에요.”
“그러지 말고 한번 내려오세요. 제가 피 같은 노하우 전수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당연히 알려 주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우리 서로 돕고 살기로 했잖아요!”
“그럼 곰탕은 사장님이 사시는 걸로 하시죠.”
“맛있는 집이나 알아 두세요!”
혁신산단에 동종 업체가 많아지면 나한테는 좋을 것이 없다. 우선 배정 20퍼센트를 서로 나눠 먹어야 하니 말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꿀 빠는 것에만 매달릴 수 없지.
이왕 오는 업체라면 금성전기같이 좋은 회사가 오는 것이 낫다. 동종 업체가 많아지면 자재 업체들도 따라 내려올 것이니, 자재 수급도 원활해질 테고 말이다. 이건 좋은 소식이 맞다.
“참!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님 좀 아십니까?”
“강 사장님요? 에이, 사장님 걱정 안 하시다더니, 은근히 걱정하셨네요?”
순간 내가 옷을 입고 있나 살펴봤다. 바가지 하나로 겨우 가린 채 알몸으로 서 있는 기분이다. 박 사장 역시 눈치 백단이네. 그런데 진짜 걱정은 안 했다니까!
“강 사장님 한번 만나 보세요.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실 거예요. 성격이 엄청 시원시원하셔서 저랑은 잘 맞는데…….”
은은하게 뒤끝도 있군. 자기랑도 잘 맞으려면 시원시원하게 대하란 뜻인가. 자꾸 경계를 허물라고 하니 도리어 경계가 생기네 이거. 좀 더 지켜보지 뭐.
“안성파워 사장님과는 친분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럼요. 강 사장님이 변압기보다 다른 쪽에 더 주력하셔서 요즘은 뜸하긴 했지만, 자주 만났어요. 강 사장님도 조합 움직이는 것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아마 도움 많이 주실 겁니다.”
“사장님보다 더 시원시원하신 분이라니 어서 만나 보고 싶네요.”
“하하하. 저 조만간에 나주 내려갈 테니까 시간 비워 두세요!”
박 사장과 대화를 하면 뭔가 말리는 기분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지. 안성파워 강 사장이 박 사장과 친하다면, 섣부르지만 좋은 사람일 것 같다.
어디 보자. 예전에 굴러다니던 명함 주워다 보관해 놨으니 어디 있을 텐데……. 여기 있다.
“네, 여보세요.”
“안성파워 강호창 사장님이시죠?”
“네, 맞습니다만.”
“안녕하십니까? 프라임일렉트릭 지정수라고 합니다. 나주혁신산단 입주 기업인데 혹시 아시는지요.”
“아! 네네, 지 사장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안 그래도 언제 얘기나 좀 나눠 볼까 싶어서 연락해 볼까 그러는 참이었습니다.”
나도 속이 훤히 보이지만, 강 사장도 참 맘에도 없는 말 잘도 한다. 사업가의 대화라는 것이 늘 이렇다.
처음엔 호의적인 척 얘기하지만, 말 한마디 한마디에 경계와 의심이 잔뜩 묻어 있다. 그러다 친밀함이 쌓이면 가식을 털어 버리면서 서로 콩고물을 털어 준다.
이 이상은 진척되지 않는다. 친밀함이라는 것이 이익이 생겼을 때나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이 없다면 아무리 친해도 서로 개 새끼 소 새끼하는 것이 이 바닥 생리이다.
박준희 사장과도 나름 거리를 두려고 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박 사장이야 특이한 사람이니 예외로 두자.
강호창 사장이 박 사장은 아니니, 사장들 문법에 따를 필요가 있겠군. 천천히 간을 보면서 와꾸를 재 보자.
“제가 계약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계약하셨다는 얘기 듣고 언제 찾아뵙고 인사나 드리려고 했는데,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하. 뭐 다들 바쁜데, 이해해야죠. 전화 잘 주셨네요. 제가 지금 볼일 보는 중이라 전화 길게 하기는 그렇고, 이번 주 수요일에 나주 내려가니까 그때 점심이나 할까요? 괜찮습니까?”
“시간 내주시면 제가 고맙지요. 제가 그럼 그날 오전 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래. 그럼 그때 보자구요.”
짧은 통화였지만, 확실히 청량감이 있다. 다들 괜히 시원시원하다고 한 것이 아니군. 대번에 밥부터 먹자고 하는 걸 보면 일단 감은 좋다.
변압기가 주력은 아니지만, 나름 이 바닥에서 대기업이니 강 사장을 내 편으로만 만든다면 적지 않은 힘이 될 것 같다.
안성파워는 변압기부터 시작해 업종을 확대해 가며 이 바닥에서 처음으로 매출 천억을 돌파한 회사이다. 고만고만한 업체들이 난립한 이 바닥에서 매출 천억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년에 매출 얼마나 했나 볼까? 어휴, 1,250억이나 했네. 어마어마하군. 내년에는 누군가가 우리 회사 정보를 보고는 어마어마하다고 놀랄지도 모른다. 후훗.
강호창 사장이 박준희 사장과 친하고 공장장 말대로 직원들에게 돈 잘 쓰는 사람이라면 그가 이끄는 안성파워도 좋은 회사임이 분명하다.
이 바닥에도 몇 안 되기는 하지만 좋은 회사들이 분명 있다. 박준희 사장이 이끄는 금성전기도 그중 하나이지. 안성파워에 이어서 금성전기도 나주로 온다라…….
‘나주 대 수도권’, ‘좋은 회사 대 나쁜 회사’로 전선이 확연해지겠군. 나주로 내려오는 회사들을 내 편으로 만든다면, 관수는 말할 것도 없고, 민수 시장에서도 나쁜 회사들을 화끈하게 조질 수 있겠어.
작은 하마를 건들이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보여 주겠어! 조합아! 보고 있니?
“덕준아, 이 구도 괜찮지 않니?”
“그렇게 전선이 갈라진다면 나쁠 것은 없지. 근데 중전기조합 애들도 나주 내려올 수 있잖아?”
“인건비 쥐어짜는 놈들이 내려올 수 있을까? 걔네들은 절대 수도권 못 벗어나. 그렇다고 여기 와서 신입 뽑아 봐야 죄다 도망갈걸? 그놈들은 함부로 못 내려와.”
나쁜 회사들은 무조건 최저 임금으로 기본급이 시작한다. 얼마 안 되는 급여이지만, 잔업이 많다고 홍보한다. 그것이 좋은 회사 척도라도 되는 양 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은 잔업하면 1.5배 받으니까 개꿀이네 하며 달려온다. 그렇게 한 달 받아 가는 돈의 절반 가까이가 잔업비로 채워진다.
잔업이 없어 월급이 줄면 오히려 일이 없어서 회사 어떻게 되나 걱정을 해 주기까지 한다.
“세상이 이리 달라졌는데, 아직도 그렇게 회사를 운영한다는 것이 참 놀랍다야.”
“그놈들은 업무 효율과 생산성을 높여서 이익을 내겠다는 고차원적인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 나쁜 회사가 괜히 나쁜 회사가 아니라니까.”
“아니, 요새 통상 임금이니 해서 상여금으로 장난치는 짓도 못 하잖아? 이제 상여금도 잔업 수당 계산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놈들이 어떤 놈들이냐? 직원들 줄 돈은 아까워도, 컨설팅 받는다고 노무사한테 돈 퍼 주잖아. 요새는 아예 취업 규칙에서 상여금 조항을 빼 버린데.”
“뭐? 그런데도 직원들이 가만있어?”
“상여금은 그대로 주는 거지. 대신 상여금이 기본급으로 인정 못 받으니까 잔업 수당에서 재미를 보겠다는 거지. 직원들도 월급 명세서 보고 하나하나 따지고 들진 않잖아.”
“하여간 독한 새끼들이야. 사업을 말이야, 대국적으로 해야지.”
그거 말고도 또 있다.
외주화이다. 직접 생산이 원칙이지만, 원칙 따위는 개나 주고서 많은 공정을 외주로 돌려 버린다. 비싼 잔업비 주느니 외주로 돌려서 사 오는 것이 더 싸게 먹힌다는 계산이다.
혹시나 자재 빼돌릴까 봐 아예 외주 인력을 공장으로 불러와 일하게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렇게 하고도 더 쥐어짜기 위해 법인을 쪼개 버린다. 5인 미만 법인으로 근로기준법 적용을 피해 버리는 것이다.
연차라도 빼먹자는 생각이다. 한 회사를 법인 네 개로 쪼개는 것까지 본 적이 있다.
“니미럴. 연차를 더 줘도 모자랄 판에! 그러고 보니까 우리 회사 엄청 좋은 회사네?”
“기본 연차에 2주씩 더 주는 회사가 어딨냐? 연차 없는 회사도 많아.”
“그런 짓까지 해? 아무리 법이 그렇다고 해도 그러면 안 되지.”
난 태양전기 들어와서 공휴일이 법적으로 보장된 휴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까무러칠 뻔했다. 법적으로 5월 1일 근로자의 날과 일요일만 휴일이란다.
나머지 빨간 날은? 그냥 평일이다.
중소기업에서 횡행하는 공휴일 연차대체라는 환상적인 복지 제도이다. 공휴일 빼 버리고 연차 3일로 생색을 낸다. 전 국민이 다 쉰다는 7월 말 여름휴가 말이다.
깜짝 놀랐다. 불법과 편법이 난무하는 현실에 놀랐고, 현실에 순응하며 개미처럼 일만 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에 또 놀랐다. 나만 이상한 것인가?
확실히 내가 이상한 사람인 것 같다. 이상한 놈이니 회사도 남들과 다르게 이상하게 운영할 생각이다. 태양전기 시절,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서 담배 피며 내쉬었던 한숨을 없애 주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회사를 지켜 내야 한다. 그래서 아군이 필요하다.
나주로 내려올 회사들은 올해 대한전력 입찰에서 내가 조합의 지랄질을 밟아 버리고 우선 배정 받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야 내년에 같이 꿀을 빨 수 있지 않겠는가!
땅은 마련됐다. 내가 밭갈이 잘 해서 아군들 수확 잘 해야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