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dirty, so I'm going to start a company RAW novel - Chapter (67)
067 만족을 먹여라
“안녕하십니까? 사장 지정수입니다.”
“네, 이신웅입니다.”
자재검사처 이신웅 과장이라. 과장이면 이쪽 분야 시험 대빵이니 제대로 걸렸네. 행여나 실수라도 한다면 아주 두고두고 찍힐 것이다.
대한전력 직원들은 기본으로 거만을 깔고 있다. 대리급들은 조금 덜하지만, 과장급은 조직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으로 ‘내가 이 존만한 회사까지 와서 고생을 하네’라는 표정을 깔고 들어간다.
인사할 때 대한전력 누구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곧 대한전력인데 회사 이름 말해 뭐 하냐는 것일지도.
예전에 좀 친해졌던 시험관이 해 준 얘기가 있다. 검사 직렬 교육 받으러 가면 고개 뻣뻣이 세우는 방법부터 배운다는 얘기 말이다. 업체 가서 기죽지 말고 오히려 기를 죽이고 오란 뜻이다.
시험관이 검사를 제대로 하냐 안 하느냐에 따라 우리나라 전기 산업이 달라질 수 있으니 자부심을 가지고 검사 철저히 하란 뜻일 것이다. 그러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목에 기브스하고 나타나는 시험관도 적지 않다.
방법은 딱히 없다. 품질로 인정받을 수밖에. 품질이 좋다면 누구도 뭐라 하지 못한다.
“제대로 꼼꼼하게 준비했습니다. 시험 잘 부탁드립니다.”
“양이 엄청나네요. 시간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바로 시험하죠.”
초면이라 그런지, 내가 널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아주 모자이크도 없는 헤어누드 수준으로 너무 잘 보인다.
멀찌감치 서서 1일차 시험을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있어 봐야 딱히 할 것도 없지만,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려면 사장 타이틀을 가진 사람이 대기 타고 있는 것이 좋지.
이규철 과장이 평소와 다른 아주 모태 친절인 같은 모습으로 입을 연다. 시험관이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네.
“품목별로 샘플 30대 특성 시험하겠습니다. 자체 시험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네. 시간 없으니까 빨리 합시다. 무슨 변압기가 이리 많은지 원.”
“일반형주상변압기 샘플 1번부터 특성 시험 들어갑니다.”
치익. 확인. 치직.
“무전기로 하네요? 그래, 이렇게 해야지. 언제까지 구닥다리로 소리 지르면서 하겠습니까?”
책상 앞에 차려진 과대 포장 비싼 과자에 손도 안 대던 시험관이 무전기로 지시하는 모습에 관심을 보인다. 이런 사소한 것들에서 회사 이미지가 결정되는 법. 우리 회사는 뭐든 확실하게 한다고!
검사실과 검사 현장 간에는 사인이 확실하게 맞아야 한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찌릿한 전기 먹고 팔 하나 잘라 내야 할 수도 있다. 전설의 한일병원 무용담이 탄생하는 것이다.
태양전기 시절에는 창문 열어 놓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었다. 스트레스가 만땅일 때라 소리 지르면서 기분을 풀기도 했지만, 시험 끝나면 목이 아파서 황혼에서 새벽까지 노래방 달린 기분이었지. 무전기 얼마나 한다고 진짜.
“철손 시험 끝. 다음 동손 시험 들어갑니다.”
대한전력 시험관 입회 시험 1일차는 변압기의 전기적 특성만 확인하기 때문에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것도 무작위 샘플 추출이라 빠르면 1시간 안에 끝나기도 한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5,200대 앞에서는 특성 시험도 오전 내내 걸렸다.
“여기 특성 시험 결과표입니다.”
“과장님. 이거 자체 시험 결과랑 전반적으로 차이가 좀 나네요?”
점심 직전에 끝나서 밥이나 같이 먹으면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시험관이 뭐 하나 걸려들었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기 시작하니 입맛이 확 달아났다. 다 합격했으면 됐지, 왜 시비를 거시나?
“네. 자체 시험 결과보다 약간 높게 나왔는데요. 그건 자체 시험 후에 충분히 안정화가 되지 않아서 특성이 약간 차이 나는 것입니다. 특성 자체는 이상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정화 다 된 다음에 시험 의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이 과장! 대한전력 시험관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잘 대응하고 있군! 시험관이 업체 처음 가면 트집 잡아서 시비 거는 것은 업계 국룰이자 상식이다. 시험관들도 이렇게 해야 업체 길들일 수 있다고 교육 받았을 것이다.
“뭐 일단 기준치 안에 다 들어왔으니까 넘어가는데요. 다음부터 이러면 불합격 때릴 겁니다.”
“네, 신경 쓰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고 그렇게 하라구요. 제가 뭐 여기만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압기 업체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한 것이니까 앞으로 주의해 주세요.”
슬슬 내가 나설 때가 됐다. 적당히 달래 주면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 불합격도 아닌데 무슨 근거로 불합격 운운하냐고 한마디 질러 주고 싶지만, 참아야 한다.
“저희가 다음부터는 확실하게 준비하겠습니다. 점심시간 다 됐는데, 식사나 하러 가시죠?”
“저는 따로 먹겠습니다. 이따 1시에 올 테니까 온도 시험 준비해 두세요.”
이거 뭐 냉기 계열에 몰빵한 법사도 아니고 더럽게 차갑네.
거마비로 좋게 포장하는 봉투는 생각조차 안 했다. 밥 한 끼 정도는 우리 회사를 위해 고생하는 노고를 생각해 얼마든지 대접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가차 없는 단호박이네.
이게 참 힘든 점이다. 어떤 시험관은 밥 먹을 시간 맞춰서 찾아와 상다리 부러질 밥상을 대놓고 찾지만, 어떤 시험관은 물 한 잔조차 마시지 않는다.
처음 온 시험관은 종잡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하다. 차라리 예전에 전설처럼 전해진 대로 노골적으로 봉투를 요구하는 것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불타는 군단조차 꺾지 못하는 절대자이기에 신경을 안 쓸 수도 없고 참.
“온도 시험 준비는 다 됐고, 외관 검사도 했고, 1일차 다 됐죠? 그럼 3일 뒤에 오겠습니다. 부하 투입해 두세요.”
오후에도 꼬장꼬장한 시험이 한참을 이어 갔지만, 그나마 무사히 마무리됐다. 진짜 중요한 시험들이 2일차에 몰려 있어서 1일차 시험은 수월하게 끝날 줄 알았더니, 이거 60억 벌기 쉽지 않네.
“과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시험관 어떤 것 같아요? 처음이라 그런지 되게 까칠하게 구네요.”
“뭐 저 정도면 처음치고는 양호한데요?”
“오자마자 불합격 얘기를 꺼내는 것부터가 딱 보니까 기선 제압하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요?”
“규정에 맞춰 아무 이상 없으면 되지 않습니까? 저 정도는 일도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우리 제품 아무 이상 없습니다.”
좋아.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는데 무서울 것이 뭐 있나! 걱정 따위 할 필요 없다!
2일차 시험 전날 검사동이 다시 폭풍 찜통으로 바뀌었다.
대한전력 2일차 시험을 위해 부하를 투입했으니, 5,200대가 살려 달라고 외치며 뜨거운 입김을 내품었다. 덕준이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와! 사장님! 검사동에 폭염 경보 발령! 과장님한테 서류 받으러 갔다가 죽을 뻔했네.”
“저번에 한 번 경험해 봤잖아?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되지 않았냐?”
“겨울이면 모를까 이건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열기야.”
“겨울에도 장난 아닐 거야. 그래서 서류 받으면서 출하 어떻게 할 건지 물어봤어?”
새로운 고민인 변압기 5,200대 출하.
오늘 시험 최종 합격하면 성적서는 내일 바로 나온다. 성적서 발송과 동시에 변압기를 내보내야 한다. 자칫 출하 늦어져서 연체료 물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연체료야 얼마 안 하지만, 이건 자존심의 문제이다.
“뭐 과장님은 그냥 꾸역꾸역 실어 보겠다는데? 내가 뭐 부서도 다른데 이러쿵저러쿵할 수도 없고.”
“우리 한 과장님 생각은 어때?”
“음, 성적서 나오고 3일 이내에 다 납품해야 한다면서? 당일에 실어 봐야 다음 날 도착하니까 늦어도 모레까지는 미친 듯이 하역해야 하는데, 말이 5,200대지. 그냥 꾸역꾸역 보내다가는 백퍼 연체 먹을 것 같은데?”
“그렇지! 역시 핵심을 잘 짚었어. 그래서?”
“내가 봤을 때는 검사동이랑 마당에 호이스트 더 달아서 한 번에 여러 대 동시에 하역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좋은데, 당장 어렵잖아?”
“그렇지! 오구오구 잘한다. 그래서?”
“당장 급한 불부터 꺼야 하니까, 시험 끝나는 즉시 포장해서 생산동으로 옮기는 거지. 거기도 호이스트 있으니까 거기서도 하역을 하는 거야. 그럼 검사동에서 차 3대, 마당에서 1대, 생산동 출입구가 6개니까 6대. 한 번에 10대씩 실을 수 있겠네. 그렇게 빡시게 하면 이틀 내로 다 내보낼 수 있지 않을까?”
“빙고! 우리 한 과장 이제 하산해도 되겠네.”
“이거 어째 내가 얘기하고 나니까 원래부터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고 연기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10대씩 싣고, 마당에서 지게차 3대로 정신없이 실어 올리면 좀 더 빨라질 거야. 이거 빨리 돈을 벌어서 공장부터 꾸며야겠어.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네.”
덕준이가 내 머릿속을 염탐이라도 한 듯 똑같은 생각을 풀어냈다. 딱히 오래 고민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고민한 결과물이 똑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신경 써야 할 것들이 계속 쏟아지지만, 직원들이 알아서 척척 잘하니 머리 쥐어짤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이거 회사 아주 자알 돌아간다! 회사 꼬라지 좋다!
“덕준아. 시험관 왔대. 총출동이다!”
2일차 시험은 중요한 만큼 시간도 미친 듯이 오래 걸린다.
대부분의 시험이 부하 걸고 나서 이뤄진다. 부하를 걸기 위해 변압기마다 걸어 둔 부아선과 단락바를 해체하는 데 한세월, 충격과 유도시험을 위해 변압기끼리 연결하는 데 한세월이다. 열이 펄펄 끓는 찜통 속에서 그 짓을 해야 한다.
준비 시간이 길어질수록 시험관의 짜증이 늘어나니, 가용할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야 한다. 시험 빨리 안 한다고 짜증내면서 가 버리는 시험관도 있다. 시험관도 월급쟁이니 퇴근 시간을 지켜 줘야 하는 법이지.
“과장님 안녕하십니까?”
“네, 안녕하세요. 변압기가 워낙 많으니까 열기도 엄청나네요. 에어컨 온도 제일 낮게 좀 해 주세요.”
아무리 중소기업 사장이래도, 보자마자 에어컨 온도부터 낮춰 달라니. 당돌한 녀석일세.
예전에 대한전력 처음 갔을 때 느꼈지만, 이건 대한전력 종특이다. 신입 사원 연수 때 우리 회사 사훈은 거만이라고 배웠음이 분명하다.
60억이 눈앞인데 웃어야지. 좋게 생각하자. 업체와 친해지면 냉정한 판정이 어려우니 거리를 두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하하. 에어컨 제일 낮게 해 놨습니다. 이 과장님 선풍기 좀 갖다 놔 주세요.”
“사장님은 직원들한테 경어를 쓰시나 봅니다?”
뭐 남의 회사 일까지 신경을 쓰실까?
“네, 제가 젊은 것도 있지만, 사장이 직원을 존경하고 대우해 줘야 회사가 사는 것이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좋아 보이네요. 어쩐지 직원들도 얼굴에 그늘이 없어 보이고. 이런 변압기 회사 거의 없던데…….”
이 자식, 츤데레야? 그리 틱틱거리더니 나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하는 것이야? 가장 빡센 2일차 시험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분위기 괜찮군.
“자, 시험 바로 하시죠. 전원 내리고 바로 온도 시험하죠. 충격이랑 유도 시험 준비도 바로 해 주시고.”
프라임일렉트릭식 인해전술을 보여 주겠다!
전 직원이 달려들어 부하를 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안 그래도 찜통인데 60명이 달려드니 심각한 지구온난화로 북극이 다 녹아 버릴 지경이다. 세이브 더 폴라베어!
저들은 분명히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내가 사우나 좀 다녀 봤는데, 지금까지 사우나는 오픈베타였어. 진짜를 맛보면 여기가 데스밸리구나 할 거야’라며 자랑을 할 것이다. 우리 검사동을 가히 데스밸리라 명명할지니라.
60명의 알보병이 1시간이 걸려 시험 준비를 끝냈다. 자체 시험에서 4시간이나 걸렸던 것을 무려 3시간이나 줄여 버렸다. 사람이 희망이다!
“충격 시험 들어갑니다. 다들 멀리 떨어져 주세요!”
20만 볼트가 펑펑 쏟아졌다. 3년을 넘게 봐 왔지만, 충격기가 번개 때리는 것은 너무 무섭다.
충격 때릴 때 근처에 있으면 그냥 아무 말도 못하고 황천길 고속버스를 타 버리는 것이다. 고속버스 안에서 관짝댄스 추겠지.
간혹 전기가 접지 타고 다 빠져나가지 못해 잔챙이가 일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전기가 빠져나간 줄 알고 손댔다가 잔챙이에 맞으면 팔에 해머링이라도 날린 것처럼 묵직한 고통을 준다. ‘찌릿’이 아니라 ‘꽝’ 하고 때리는 고통이다. 전기는 너무 무서워!
“충격 끝! 유도 시험 바로 들어갑니다!”
대한전력 시험 중에서 유일하게 전량을 검사하는 유도 시험. 뜨끈뜨끈하게 달궈진 변압기에 유도전압을 날려 절연이 잘되는지 시험하는 것인데, 전량 시험이라 시간 잡아먹는 귀신이다.
10시에 시작한 시험이 오후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태양전기 시절 아무리 오래 걸려도 3시간을 넘지 않았던 시험이 말이다. 이것도 설비 2세트가 동시에 시험에 투입됐기에 가능했다. 이 쩌는 대륙 스케일!
“사장님, 과장님, 수고하셨습니다. 밤 10시는 돼야 끝날 것 같아서 각오하고 왔는데, 이거 덕분에 빨리 끝났네요. 성적서는 내일 오전까지 발행해 드릴게요.”
시험관이 포로 해방이라도 된 듯이 인사를 건넸다. 5,200대에 질렸다는 표정도 확연하다. 우리 2주 뒤에 이 짓을 또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표정 자체는 꽤 밝아 보인다. 전 직원이 동원돼 시험 시간을 대폭 줄여 줬으니, 덕분에 저녁은 집에서 먹을 수 있을 것이란 기쁨을 준 것일까?
사소한 것 같지만, 시험관을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신경 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 주면 시나브로 맘이 우리 쪽으로 오는 것이겠지. 품질에 이상이 없어야 함은 기본이고.
“과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저희가 물량이 워낙 많아서 시험이 너무 오래 걸렸네요. 시험 시간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준비해 보겠습니다.”
미안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야. 우리가 3년 무사 합격으로 시험이 면제되면 모를까. 방법이 없으니 시험 이렇게 하라고 규정한 너네 회사를 원망하렴.
“우선 배정으로 20프로 받으신 거죠? 전체 물량이 몇 대나 됩니까?”
“네, 7만 대가 넘습니다. 내년 봄부터 발주 물량 줄어들면 시험하시기 좀 수월하실 겁니다.”
7만 대라고 하는 순간 시험관이 욕을 날려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표정을 지었다. 하필 대한전력 발주가 가장 많을 때 우리 회사를 담당해야 하니 그 심정이 오죽하겠나 싶다. 남의 돈 벌어먹고 사는 것이 이리 어려운 것이지요. 월급쟁이들아 힘내라.
시험관이 떠났다.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