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55
154
“……어떻-!”
불시에 허를 깊숙이 찔린 디에고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의 경악 뒤에는 끝끝내 부인하고 있던 절망이 밀려들었다.
지옥이라는 말이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옴으로써,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다 안다.
저 여자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이제 디에고는 세라가 안타레스의 본거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
동시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날아갔다.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걸 실감하는 와중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것이다.
초점 없이 홉뜬 두 눈이 정처 없이 허공을 헤맸다.
……정말, 자신은 실패한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이렇게, 쉽게?
그토록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왔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분명 완벽했다는 결론뿐이다.
쿵, 쿵, 쿵, 쿵.
불길한 최후를 감지한 심장이 바쁘게도 뛰었다.
동공이 크게 벌어지며 눈앞이 새카매졌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하자 가장 먼저 드는 걱정은 자신의 안위 따위가 아니라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실망한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디에고가 서럽게 입술을 움직였다.
아버지. 하고.
“와, 정말 잘됐다.”
체념과 절망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세라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했다.
어떻게 저런 게 에녹 소서의 곁에 있을 수 있지?
타인의 절망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녀야말로 악마처럼 보였다.
“그럼 너는, 마음껏 고문해도 되겠네?”
원래부터 안타레스의 사람이니, 죽든 말든 개의치 않아도 된다.
멋대로 단정 지은 악마가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을 타고 기어 온 검은 뱀이 그의 목을 한 바퀴 휘감았다.
살갗에 닿는 서늘한 비늘의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걱정 마. 난 아직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게 많거든.”
조금도 안심할 수 없는 말을 속삭인 악마가 히죽, 웃었다.
그녀의 미소를 신호 삼아 디에고의 숨통을 조여 오던 검은 뱀이 자그마한 주둥이를 쩌억 벌렸다.
고통을 예감한 디에고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숨조차 멈춘 죄인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
그의 부름에 일순, 벽 깊숙이 움츠려 있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대장이 지시한 대로, 길드 수도 점검 확실하게 끝냈어.”
철야를 한 발레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항상 남김없이 올려 묶던 붉은 머리가 흐트러져 이마와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깔끔한 걸 좋아하는 그녀가 질색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자신이 하고 있는 보고였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구역별로 돌면서 수도 점검해 달라고 요청하고, 사용하는 거 확인했어. 저장고에 채워져 있던 물도 대부분 흘러나갔고. 이 정도 양이면 최소 모든 세대에서 수도를 사용한 게 분명해.”
지금 그녀가 하는 보고는 엄밀히 따지자면 발레리의 영역이 아니었다.
만 하루를 꼬박 새워 남의 집에 물이 나오는지 아닌지 확인하면서 속으로 얼마나 열불이 나던지.
이런 황당한 일을 시켜 놓고 정작 보고받는 당사자가 저렇게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으니 짜증이 두 배로 치솟아 올랐다. 영혼 없이 읽고 있던 서류를 신경질적으로 내린 발레리가 성질을 참지 못하고 한 소리 했다.
“듣고는 있어? 아까부터 뭘 그렇게 읽어?”
“……듣고 있어.”
그에 발레리를 등지고 있던 에녹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러면서 와그작,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가차 없이 구겼다.
길드 회관의 1층. 열어 놓은 창문 앞에 선 그의 앞에는 새하얀 부엉이가 내려앉아 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에녹의 미간이 깊게 팼다. 발레리가 전한 소식, 아니면 쪽지로 전해 받은 소식 중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만약 전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한다면, 발레리는 결코 그냥 넘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런 건 비제나 레니스 시키지. 왜 우릴 시켜?”
인력 낭비도 정도껏이지!
힐난하는 발레리의 말도 귓등으로 흘려보낸 에녹이 빳빳한 새 종이에 무언가를 휘갈겨 쓰며 대꾸했다.
“그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니까.”
“……?”
“하필 물에 녹더라고. 그 약이.”
“약……?”
뭔가 찝찝하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연속이었지만 발레리는 굳이 캐묻지 않았다.
할 만하니까 하라고 했겠지. 하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대체 그동안 어디서 뭘 하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수도 타령이냐고. 지금이 그딴 거에 시간 쏟을 때야? 중앙 가시 공략하겠다며. 그럼 그걸 대비해야 할 거 아니야. 다들 대장 농땡이 좀 그만 피우고 일 좀 하라고 난리야.”
너는 위기 의식도 없니?
발레리는 도무지 중앙 가시에 관심이라곤 없어 보이는 대장을 향해 잔소리를 퍼부었다.
“행사는, 어떻게 됐어?”
에녹은 역시나, 이번에도 듣는 둥 마는 둥 말길을 돌렸다. 수도 점검 다음에는 또 괴상한 행사 이야기였다. 그가 적은 쪽지를 부엉이에 달아 주자 호로록, 울음소리를 낸 새가 날아가 버렸다.
발레리의 화가 울컥 치솟아 올랐다가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하아, 한숨을 쉰 그녀가 애써 좋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 행사라면 중단됐어. 중간에 의사가 튀었대.”
“…….”
이건 의외였는지 에녹이 한동안 침묵했다.
“세라는?”
한참을 지나 의사 옆에 붙어 있어야 할 자원 봉사자이자 자신의 전 노예의 행방을 물었다.
그리고 발레리가 보고를 하러 온 이후 처음으로 그녀를 돌아봐 주었다.
발레리는 어련하시겠냐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몰라. 의사도 없으니까 같이 튀었나 보지.”
“……하여튼 말 더럽게 안 듣지.”
“……? 방금 나한테 한 말이야?”
“아니.”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턴 에녹이 창가에서 몸을 떨어뜨렸다.
그는 발레리를 지나쳐 출구로 향하면서, 이런 일을 예감했다는 듯이 다음 지시를 내렸다.
“행사는 계속 진행해. 약은 바꿔서. 다른 의사를 수배해 뒀으니 그가 알아서 해 줄 거야. 그리고 조만간 길드에 손님이 하나 올 텐데-.”
그러다 돌연, 멈췄다.
“…….”
그리고 뭔가 거슬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표정을 굳혔다.
발레리는 중요한 대목에서 멈춰 버린 그를 채근했다.
“올 텐데, 다음에 뭐? 왜 말을 하다 말아?”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대장? 하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찰나.
“……!”
에녹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쾅! 회관 문을 박차고 달려가는 뒷모습이 속절없이 멀어져 갔다.
대장! 그의 뒤에 남겨진 발레리가 소리쳐 불러 봤지만, 이미 에녹은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결국 또 던지듯 떠넘긴 일 처리를 하게 된 발레리가 불만스럽게 투덜거렸다.
“……뭐야. 왜 저래.”
하지만 불만보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겼나?”
시그너스의 일원이 된 이후 저렇게 새파랗게 질린 에녹은 처음이었다.
***
다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적들이 꼭꼭 감추고 있던 비밀은 모조리 탄로 났고, 은밀하게 스며든 쥐새끼들을 도려냈으며, 그로 인해 병들었던 길드원들은 남김없이 치료했다.
남은 건 그들을 이끌던 우두머리를 붙잡아 몇 가지 핵심을 추궁하는 일뿐이었다.
에녹은 자신에게 맡기라고 말했고, 순순히 알겠다고 했지만 세라는 처음부터 그에게 일임할 생각 따윈 없었다.
에녹이 있으면 흑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세라는 에녹 몰래, 상대를 통해 얻어야 할 아주 귀중한 정보가 있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라는 걸 알고 있어도 혹시나.
안타레스에 앞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묻고 싶어서.
에녹 몰래 세운 당찬 계획은 결론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분명, 한숨이 나올 정도로 쉬운 일이었는데-.
“커헉……!”
세라의 입에서 괴로운 숨이 터져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디에고가 한 손으로 그녀의 목을 부러뜨릴 기세로 졸라대고 있었다.
후욱-. 느른한 숨을 내쉰 디에고가 세라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비실대던 남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힘이었다.
“뭐, 야. 갑자기, 어디서 이런-.”
두 다리가 공중에 뜨게 된 세라가 한층 더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디에고의 손을 떨쳐내려 주먹으로도 때려보고, 손톱으로도 긁어보고 별 지랄을 다 해봤지만, 고통을 느끼지도 못하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뭔가, 달라…….’
세라는 본능적으로 디에고의 무언가가 크게 변화했음을 느꼈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계기가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뀨우…….
구석에서 작은 짐승의 신음이 들렸다.
디에고를 물었다가, 거대한 힘에 튕겨 나가듯 저 멀리 내팽개쳐진 까망이었다.
“…….”
그쪽으로 시선을 옮긴 세라가 눈으로 까망이의 무사함을 확인했다.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반격할 틈조차 없었다는 게 그저 기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그녀가 아니었다.
이거 당장 놓-.
후읍, 숨을 크게 들이켠 그녀가 목소리를 쏟아냈을 때였다.
“……?”
그녀의 입을 통해 뱉어낸 마력이 그대로 디에고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이변을 감지한 세라가 급하게 쏟아내던 숨을 멈추었다.
쌔액, 쌔액, 연신 깊은 숨을 들이쉬는 디에고의 목에서는 겨울 숲에 바람이 스치는 듯한 이상한 소리가 났다. 그르륵, 그륵. 피가래가 끓는 찝찝한 울음을 내기도 했다.
온통 시끄럽고, 소란스러웠다.
“…….”
그러다 갑자기 그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상한 속도로 내쉬던 숨도.
겨울 숲의 바람 소리도.
피가래 끓는 울음도.
그리고 내내 표정을 감추고 있던 디에고가 고개를 들어 세라를 바라보았다.
“……!”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세라조차 이번만큼은 소리를 낼 뻔했다.
잠깐 사이에 다시 본 디에고는 끔찍한 꼴을 하고 있었다.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로 시커멓게 변한 핏줄이 거미줄처럼 뻗쳐 있었고, 뒤로 돌아가 허옇게 뜨여진 두 눈이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하아-.
차가운 숨을 내쉰 디에고가 새카맣게 메마른 입술을 움직였다.
집 밖에 내보낸 아들이 왜 이리 애타게 부르나 했더니-.
그리고 그 입을 통해 흘러나온 건.
또, 너인가.
세라조차 숨이 막힐 정도로 불길한 누군가의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