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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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는 실로 오랜만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경험을 했다. 자신을 쫓는 암살자로부터 잘 빠져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놈이 제 등 뒤에 서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등 전체에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싸늘한 소름이 돋고, 이성이 너 이제 큰일 났다며 삑삑 울어댔다.
“……방금, 내가 한 말은-.”
뭐라도 주워 담아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더듬더듬 첫마디를 떼었다. 하-. 에녹이 비틀린 웃음을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애인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바람을 피웠네.”
“……! 야, 바람은 무슨 바람! 내가 벗긴 거 아니야!”
진실과 전혀 다른 모함에 세라가 그것만은 아니라며 얼른 반박했다. 이대로 에녹이 지껄이는 대로 내버려 뒀다간 어쩐지 가까운 미래가 몹시 고달파질 것 같다는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걔가 먼저 바지 벗었어!”
위기감을 느낀 세라가 적극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해명했다. 이번에는 굳이 거짓말을 지어낼 필요도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녀도 피해자였다. 세라는 가만히 있었는데, 그곳에 전혀 예상치 못한 게 나타났을 뿐이니까.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고 주장하는 세라를 향해, 에녹이 용의자를 신문하는 수사관처럼 냉정하게 물었다.
“아하, 먼저 바지를 벗었다?”
“그래!”
“그 새끼가 왜 네 앞에서 바지를 벗었지?”
“젖었으니까!”
세라는 곧장 대답했다. 물에 젖었다고 상세히 말하지 않은 이유는 급해서도 있었으나, 그녀가 생각했을 때 사람이 젖을 이유는 그 하나밖에 없었으므로 굳이 필요치 않은 말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때 너는 뭐 하고 있었지?”
“나도 흠뻑 젖은 상태라-.”
하여, 자신이 조금도 음란한 적 없었던 당시의 상황을 몹시 요상하게 묘사해 나가고 있는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에녹의 머릿속에 물에 빠져 볼품없이 쫄딱 젖은 모습 대신, 야릇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말 못 할 곳이 젖어 든 두 사람이 그려지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생략하는 단어 없이 모든 순간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것이다.
“뭘 했길래 그렇게 흠뻑 젖었어?”
에녹의 목소리가 한층 싸해졌다.
해명을 하고 있는데도 더 깊은 진창에 빠진 기분이 들었으나, 세라는 억울한 오명을 벗기 위해 열심히 대화에 임했다.
“호, 호수에 빠졌다니까?”
“같이 빠졌어?”
“그래! 같이 빠졌어!”
“뭘 하느라 같이 빠졌지? 끌어안고 있기라도 했나 보지?”
“그냥 구경을 좀 하다가…….”
“그러니까 구경을 어떻게 했길래 둘 다 빠졌느냐고. 흠뻑 젖을 정도로 빠지려면, 배를 타고 가야 할 텐데?”
“어어, 배 위에서, 진이랑 잠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러니까 왜.”
“그건……. 걔가 먼저 날 건드려서.”
“그래서, 같이 뒹굴기라도 했어?”
“……어음-.”
에녹의 올가미가 점점 세라의 목을 조여 왔다. 그는 대충 넘어가는 것 하나 없이 집요하게 ‘왜’와 ‘어떻게’에 대해 캐물었다. 거짓말과 진실을 반쯤 섞어 맞받아치던 세라가 마지막 대목에서 대답을 못 하고 멈춰 섰다.
그녀가 진과 머리채를 붙잡고 땅바닥을 뒹굴며 싸운 것은 맞지만, 지금 에녹이 말한 ‘뒹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것과 전혀 다른 의미라는 걸 알아서였다. 여기서 다른 식으로 싸워서 떨어졌다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으나, 그럴 경우 진과도 말을 맞춰야 했다.
벌써부터 비협조적으로 나올 진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 눈치 없는 요정은 세라가 아무리 당부해도 에녹이 묻는 순간 진실을 줄줄 쏟아 내겠지.
그렇게 될 바에는 처음부터 그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세라의 선에서 잘 마무리 지어야 했다.
“왜 말이 없어? 떳떳하지 못한 짓이라도 했나 봐?”
에녹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구는 그녀를 지적했다.
그가 착실하게 오해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세라는 그의 오해를 푸는 일이 진실을 알리는 일보다 더 나은 길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세라는 그 질문에 대하여 곧장 ‘아니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에녹이 제게 검은 집을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보다 그냥 세라 한 명 바람둥이 되고 마는 게 이 상황을 가장 매끄럽게 정리할 수 있는 최선 같았다.
막말로 바람 좀 피웠다고 에녹이 뭘 어쩔 것이냔 말이다.
본인도 애인 여럿 두고 놀아난 놈이었으니 오히려 이해해 주지 않으려나?
그런 생각에 가닿자 갈팡질팡하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래. 맞아.”
그와 동시에 세라가 에녹의 말을 수긍했다.
“나 바람피웠어!”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의 부정을 고백했다.
“이해하지? 너도 다른 사람이랑 많이 자 봐서 알잖아.”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좀 더 뻔뻔한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평소의 그녀라면 치를 떨었을 문란함이었지만, 에녹의 기준에서 생각하니 이 정도쯤은 별문제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설마 너는 되고 나는 안 된다는, 뭐 그런 치사한 생각은 아니지?”
그래도 혹시 몰라 에녹에게 너는 이것을 문제 삼지 않아야 한다고 은근슬쩍 의견을 피력했다. 너는 죽고 못 산다는 첫사랑을 가슴에 묻고도 좆을 좆대로 놀리며 살던 놈이니까. 세라가 잠깐 한눈 좀 팔았다고 해서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일말의 걱정을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에녹이 순순히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주었다.
“다른 사람이랑도 자고 싶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그, 그렇지.”
“딴놈이 눈에 들어오면 앞으로도 내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도 돼.”
난 다 이해하니까.
에녹은 바람을 피웠다는 세라의 말을 순순히 받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 괜찮다며 도리어 그녀를 북돋워 주었다.
일부러 반대로 말해 빈정대는 게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그 증거로 등을 찌르던 살벌한 냉기가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맙다.”
싱거울 정도로 쉽게 해결된 사태에 세라가 얼떨떨한 낯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상황을 넘겨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기분이 조금 착잡해졌다.
“몸. 언제 다 나을 것 같아?”
정말로 역지사지의 마음이 통한 걸까?
에녹이 죄인을 신문하듯 싸늘했던 말투를 집어치우고 다정하게 세라의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 그녀와 진 사이에 일어난 일들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 것처럼.
세라는 아까보단 나아진 몸 상태를 확인하고는 대충 어림잡아 대꾸해 주었다.
“하루 이틀 더 쉬면 완전히 나을 것 같은데?”
“잘됐네.”
곧 나을 것 같다고 말해 주니 만족스러워한다. 문 너머에서 그가 몸을 일으키는 기척이 느껴졌다. 세라는 태평하게도 밤이 늦었으니 그가 이만 자러 가는 것이라 넘겨짚었다.
“나도 그쯤 도착할 것 같거든.”
에녹이 당장이라도 요정의 숲에 나타날 것처럼 굴기 전까지는.
“어, 오겠다고? 여기를?”
……왜?
이제 와서 요정의 숲으로 출발하겠다는 말에 세라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요정의 숲이 정확히 어디에 붙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그너스와 굉장히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건 알았다. 에녹이 힘들여 숲을 찾아오느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면 넘어오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인 동선이었다.
“내가 도착하면, 세라.”
에녹은 자신의 방문 이유를 알려 주는 대신, 밝고 희망찬 미래 계획을 내놓았다.
“이번엔 진이랑 셋이서 해 볼까?”
“……어?”
“딱 기다려.”
그건 너무나도 발기 찬 나머지 세라가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심오한 세계의 일이었다. 셋이서, 뭘, 하겠다는 거지……? 빈칸에 들어갈 적절한 단어를 연상해 보던 그녀의 뇌리에 기어코 정답이 스쳐 지나갔다. 세 사람이 함께 뒹구는 살색 향연의 상상도도 함께.
“어어?!”
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광경에 세라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기겁을 한 그녀가 막 나가다 못해 폭주하는 에녹의 문란함에 주먹으로 문을 쾅! 하고 내려쳤다.
“미친놈아!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에녹?”
그러나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는다.
뭐야. 정말 갔나? 불길한 예감이 든 세라가 문에 귀를 바짝 가져다 붙인 뒤 에녹의 기척을 살폈다.
“야, 에녹? 에녹아? 갔니? 너 정말 갔어……?”
똑똑똑. 똑똑.
연신 문을 두드리며 불러 보지만, 문 너머에서는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야. 에녹, 야. 진짜 갔다고? 이렇게? 너 진짜 오게? 여보세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일방적인 물음이 쓸쓸하게 울려 퍼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에녹의 진정성이 느껴져 세라의 얼굴이 절로 창백해졌다. 그냥 해 본 말이겠지? 시그너스에서 요정의 숲까지 거리가 얼만데, 설마 진짜로 이것 때문에 온다고?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있을 것 같아.’
흐읍, 섬뜩한 위기감을 느낀 세라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분명 에녹은 언성 한번 높인 적도 없고, 그런 음란한 제안을 한다고 해도 응하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아주 끔찍하고 무서운 게 이 숲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은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뭔가…….
뭔가 아주 많이.
‘좆된 것 같은데……?’
***
“무조건 안 된다고 해!”
이것이 온 숲을 뒤져 진을 찾아낸 세라가 제일 처음 한 말이었다.
“에녹이 너한테 뭣 좀 같이하자고 하면 무조건 안 하겠다고 해! 알았지?”
“왜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우리 모두가 행복하니까!”
“……?”
“너희 공익 좋아한다며! 공익을 위해서니까 그렇게 해!”
걔랑은 아무것도 하지 마! 나랑도 하지 마! 그냥 하지 마!
그녀는 앞뒤 상황을 전혀 모르는 요정의 어깨를 부여잡고 세뇌하듯 안 된다는 말만 외쳐댔다. 그러면서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연신 주변을 살폈다. 그럴 때면 행여 누군가 엿듣고 있기라도 한 듯 목소리도 낮추었다.
진은 고열이 너무 오른 나머지 세라의 정신이 이상해진 것은 아닌가 의심했다.
“아, 그리고 너, 나한테 검은 집 보여 줬다는 거 입도 벙긋하지 마. 알았어?”
“주문하는 것도 많다.”
거기에 더해 이제는 말도 하지 말라고 하자, 진이 왜 그렇게 사냐는 눈으로 그녀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알았어. 몰랐어?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알겠다고 해야 이 귀찮은 대화가 끝나는 거지?”
“그래!”
“그럼 알겠어.”
약간의 저항이 있었지만 어찌 됐든 급한 불은 껐다.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한 세라가 마침내 그를 놓아주었다.
“팔팔한 거 보니 다 나았네.”
세라에게 잡혔던 어깨를 탈탈 털어 낸 진이 이때만을 기다렸다며 따로 챙겨 둔 물건을 그녀의 품에 안겨 주었다.
“이제 할 일을 해야지? 책 돌려놔.”
“……알았다고. 알았다고!”
지독하다는 표정을 한 세라가 그의 손에서 강탈하듯이 책을 빼앗아 들었다. 탑에 갇힌 왕자님과 공주님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에녹이 떠올라 진정되었던 마음이 다시 심란해졌다.
에이씨. 몰라. 될 대로 되라지.
복잡한 문제는 뒤로 미뤄 버린 세라가 쿵, 쿵, 발뒤꿈치를 찍으며 걸음을 옮겼다. 누가 봐도 화가 난 것 같은 태도에 노파심이 인 진이 짧게 충고했다.
“숲이 너에게 화풀이한다고 해도 이번엔 절대 불 지르지 마라.”
“너는 내가 방화에 미친 사이코인 줄 알아?!”
그녀를 단속하기 위한 의도였다면 실패했다.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없던 마음이 활활 들끓어 올랐다.
확 불이나 질러 버릴까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진을 노려보는데, 그가 철없는 어린아이 상대하듯 한숨을 푹 내쉬며 한마디 덧붙였다.
“공손하게 굴어. 공손하게.”
혹시 알아? 감명받은 숲이 너한테 꼭 필요한 거라도 안겨 줄지.
의미심장한 여지를 남긴 그가 검지로 제 눈가를 톡톡 두드렸다. 세라의 눈에 박힌 별의 조각의 존재를 상기시키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