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12
211
“웃기지 마.”
세라가 음산하게 대꾸했다. 그녀는 자신이 지나쳐 온 수많은 에녹을 떠올리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겨우 도망쳐 왔더니 그것들을 또 봐야 한다고?”
결코 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팍팍 느껴지는 말이었으나 진은 단호했다.
[어쩔 수 없어. 세계수가 너무 세게 후려치는 바람에 그 애의 내면이 조각조각 흩어져 버린 거라.]“그럼 잘못한 사람이 모아야지! 왜 내가 해!”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문제 해결 방법에 세라가 발로 땅을 쿵쿵 찍으며 역정을 내었다. 그녀는 실로 억울했다. 세계수의 힘을 옮겨 받자고 한 사람은 진, 에녹의 내면을 조각낸 건 세계수인데 왜 고생은 자신이 해야 하는지…….
[너밖에 방법이 없었다니까? 남의 무의식 속에 들어갈 수 있는 게 뭐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너니까 할 수 있는 거야. 너니까.
칭찬인지 후려치기인지 모를 말에 세라가 멈칫하는 사이 진이 이때다 싶어 그녀를 붕붕 띄워주었다.
[내가 들어갔잖아? 갈라진 인격이고 뭐고 만나기도 전에 가루처럼 갈려서 사라져 버렸을걸? 에녹처럼 예민하기 짝이 없는 놈들은 무의식도 사납거든.]하지만 너를 봐.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지? 자, 그럼 이제 누가 책임자지?
진이 너보다 더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그녀에게 양심 없이 책임을 떠넘겼다.
“사나워? 여기가 그런 호락호락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세라는 자신이 겪은 일을 고작 단어 하나로 퉁치려는 진을 향해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알기나 하느냐며 아르릉 이를 드러냈다.
[그래도 모으고 나면 좀 나을 거야. 인격이 섞일수록 우리가 아는 에녹과 비슷해질 테니.]진은 침착하게 지나친 과거 대신 찬란하고 희망찬 미래 지향적인 대화를 지속해 나갔다.
[그렇게 하나하나 모으다 보면, 저주에 걸린 부분도 찾을 수 있겠지.]그럼 저주도 해결해버리면 되는 거야.
아, 물론 네가.
진이 대수롭지 않게 덧붙였다.
“말이야 쉽지……!”
물론 세라에게는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하나 상대하기도 벅차 죽겠는데 모으긴 뭘 모아!”
그게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듣다 못한 세라가 자꾸 애매한 설명만 덧붙이는 진에게 빼액, 소리를 질렀다. 남에게 일을 떠넘길 거면 적어도 명확하기라도 해야지. 효율. 효율. 아주 노래를 부르던 녀석이 왜 이럴 때만 흐리멍덩한 설명으로 시간을 잡아먹느냐고.
[걱정 마. 그렇게 어려운 방법도 아니니까.]남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진이 뚫린 입으로 아주 쉬운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잘도 지껄여 댔다. 여기까지 와서도 에녹이 저러고 있으면 뾰족한 수가 없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속았다는 기분을 감추지 못한 세라가 다시 한번 하늘을 향해 한 소리 하려던 때였다.
[대충 방심하게 만들어서 다른 인격을 만나게 해줘. 왜, 그런 말 있잖아. 같은 얼굴을 한 누군가를 만나면 죽는다. 자기랑 똑같은 얼굴을 한 다른 인격을 마주하게 되면, 알아서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날아가 붙을 거야.]아마도?
마지막에 붙은 애매한 단어가 거슬렸지만 여태까지 중에 그나마 생산적인 해결책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쉰 세라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시 문 앞에 섰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운 그 에녹들을 다시 만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찔해졌지만, 그래도 밑도 끝도 없이 헤매기만 하던 이전보다는 훨씬 나았다.
서로 만나게 해야 한다는 말이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되뇌며 문고리에 손을 얹은 세라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답지 않게 자신감이 없는 목소리로.
“근데, 내가 뭘 하잔다고 걔네가 들을까? 내가 누군지도 못 알아보던데…….”
반면, 진은 자신감에 가득 차 확신했다.
걔네는 네가 손만 잡아줘도 자지러질걸.
말하기도 입 아프다는 듯 콧방귀를 뀌는 말을 끝으로, 세라가 달칵 문고리를 돌렸다.
***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한다…. 안 한다….”
에녹은 오늘도 손끝에 꽃물이 들 정도로 꽃잎을 떼어내고 있었다. 이미 그의 발밑에 쌓인 꽃잎이 수북이 쌓여 무릎까지 파묻혔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좋아한다…. 안 한다…. 좋아한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는 거다. 그게 너무 신경 쓰여서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은 에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좋아하나? 싫어하나? 좋아하면 어떤 의미로 좋아하는 걸까? 싫다면 얼마나…? 나에게 회생의 가능성이 있나? 어떤 모습을 보여야 좋아해 줄까?
……근데 그 사람이 누구였지?
“…….”
쉴 새 없이 꽃잎을 잡아 뜯던 에녹의 손길이 공중에 멈춰 섰다. 누구를 위해 꽃을 뜯고 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다시 꽃을 뜯기로 했다.
“안 한…?”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파삭! 어디선가 뻗쳐 나온 손이 꽃을 빼앗아 갔다.
“어…….”
눈 깜짝할 사이에 목표를 잃은 에녹이 허술한 소리를 냈다.
처음이었다. 언제나 혼자였던 공간에 다른 누군가가 존재하는 건 말이다.
자아라는 게 생겨난 이후로 평생 꽃잎만 뜯었던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타인이란.
“이딴 거 백날 뜯고 있어봐라.”
엄청나게 불친절했다.
“…….”
그럼에도 에녹은 불쾌하기는커녕 거짓말처럼 눈앞에 나타난 여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도리어 까칠하게 번쩍이는 자수정 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덜컹,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누구세요?”
“기억 안 나?”
공손하게 물었는데도 여자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내가 뭔가를 잘못한 걸까. 에녹은 여자가 자신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자의 미간이 구겨지자마자 참을 수 없이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밑도 끝도 없이 기억을 해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게 해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를 했다. ‘네!’ 하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순간 등 뒤의 벽으로 몸이 거칠게 밀쳐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라서 눈을 한번 깜빡이자마자 자그마한 손이 어깨 바로 밑의 벽면을 쿵! 하고 내려쳤다.
키가 작아서 겨우 저기밖에 못 짚은 건가. 귀엽다.
무심결에 그런 생각을 한 에녹이 제 몸에 가까이 다가온 앙증맞은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딜 봐. 여길 봐!”
제 턱을 잡아채는 손길에 시선이 휙 돌아갔다.
별무리가 가득 낀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에 제 얼굴이 비쳤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자신과는 달리 여자는 살아있는 불꽃을 품은 듯 또렷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화르륵, 불꽃이 튀는 것처럼 빛이 번쩍이는 눈동자가 이래도 감히 날 기억 못하겠느냐 다그치는 것 같았다.
씩씩대며 그를 노려보던 여자가 입이라도 맞출 듯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
어머, 너무 적극적이야.
제 얼굴을 끌어내리는 억센 손길에 에녹의 심장이 쿵, 하고 발치까지 굴러떨어졌다. 무릎까지 쌓인 꽃무덤 아래로 추락한 심장은 연약한 비눗방울이 되어 뿅, 하고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입술과 입술이 가까워질수록 에녹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발광을 해댔다.
입을 맞춰보면…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다가오는 붉은 입술에 온 정신을 홀라당 빼앗긴 에녹이 상대랑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것도 잊고선 수줍게 눈을 감았다.
파르르. 기다란 속눈썹을 연약하게 떨어댄 그가 여자를 향해 입술을 쭈욱, 내민 그때였다.
“지금이다!”
사냥감을 붙잡은 포식자처럼 눈을 번뜩인 세라가 불시에 에녹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어……!”
마침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던 에녹이 손쉽게 중심을 잃고 끌려왔다. 반사적으로 번쩍 뜬 에녹의 두 눈에 여자의 존재감에 가려져 있는 줄도 몰랐던 또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다. 자신과 똑같은, 그러나 정의감에 가득 찬 자신만만한 얼굴을 마주한 순간.
“으-.”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거부감에 에녹이 있는 대로 미간을 구겼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는지 자신만만한 미소로 만연했던 얼굴이 그를 따라 와락 구겨졌다.
왜 자기가 기분 나쁜 티를 내고 난리지? 재수 없어….
면상을 보는 것부터도 짜증이 나는데, 중심을 잃고 휘청댄 몸이 상대에게 부딪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처음 보는 여자와는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비비려고 했던 것도 잊은 채, 에녹은 저 재수 없는 인간과 손끝이라도 닿을 생각을 하자 없던 결벽증도 도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바엔 죽음을 택하겠다.
갑자기 고개를 든 급진적인 충동에 몸을 맡기자마자, 그의 온몸이 비눗방울로 변해 사라졌다.
“우욱.”
마찬가지로 헛구역질을 한 정의의 용사도 한 줄기 빛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주인을 잃은 전쟁터에 남아있는 사람은 세라 혼자뿐이었다.
“이걸로 또 둘 보냈다.”
대수롭지 않게 상황을 보고한 세라가 무심히 다음 방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피곤한 낯으로 목을 좌, 우로 비트는 기계적인 움직임에서는 제게 농락당한 남자에 대한 동정심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너 되게, 잘한다.]숨죽여 사태를 관망하고 있던 진이 나직하게 감탄했다.
방금 되게 순진한 남자 후려치는 사기꾼 같고 좋았다는 말은 결코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뭐가 불만이야? 네가 시킨 거잖아.”
일을 잘하고도 욕을 얻어먹는 기분이 든 세라가 까칠하게 받아쳤다.
[내가?!]그에 진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펄쩍 뛰었다.
내가 대충 서로 만나게만 하라고 했지.
언제 가지고 놀라고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