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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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목을 닮은 눈동자가 가까웠다. 질문을 던진 에녹이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때마다 끝이 얽힌 속눈썹이 세라의 것을 스쳤다. 그 감각에 미친 듯이 심장이 간지러워 벽에 등을 바짝 붙여 조금이라도 더 거리를 벌렸다. 그에 에녹이 귀엽게 논다는 듯 웃었다. 그 미소 한 번에 어지럽게 엉키던 생각들이 단번에 날아가 버렸다.
별안간 배 속이 뜨겁게 달궈지더니 그 열기가 등과 어깨를 덮고 두 뺨까지 올라붙었다. 당황한 세라가 비스듬히 시선을 피하며 습관성 부인을 했다.
“내가…….”
“네가.”
“언제 숨었다고…….”
“아아, 숨은 게 아니야?”
세라의 말이 잠시 쉬어 갈 때마다, 에녹이 그녀의 말을 따라 읊었다. 아니라는 걸 다 알고 있지만 속아 넘어가 주겠다는 투였다. 더더욱 민망해진 세라가 아예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자 벽을 짚고 있던 에녹의 두 팔이 아래로 미끄러져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그대로 깍지를 껴 제 쪽으로 끌어당긴다. 순식간에 가슴이 맞닿았다. 애오옭! 본의 아니게 두 사람 사이에 납작하게 깔리게 된 체첸이 항의하듯 날카롭게 울었다.
“내가 오해했네. 그렇지?”
하지만 세라는 그쪽을 신경 써 줄 겨를이 없었다. 그녀와 재차 이마를 맞댄 에녹이 보기에도 간지러운 미소를 그린 채 속삭여 왔기 때문이다. 이마에 닿은 온기, 맞닿은 가슴을 통해 전해져오는 근육의 움직임, 허리를 단단히 감은 손, 목소리, 뺨을 간지럽히는 숨결…. 평소에 아무렇지 않게 닿았던 에녹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모조리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진짜 왜 이러지…?
어디 병이라도 걸린 걸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문제는 그녀가 이상해진 만큼 에녹도 이상해진 것 같다는 거였다.
“너는 도망칠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괜히 쫓아왔나 보다.”
안 그래도 모든 게 낯설어서 미쳐버릴 것 같은데, 에녹이 오늘따라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으슥한 곳이라 대놓고 주의를 끌지는 않았지만, 워낙 눈에 띄는 머리칼 때문에 가끔가다 한 명씩은 꼭 의아한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곤 했다. 그러다 에녹과 붙어 선 이가 세라라는 것을 확인하면 그러려니 하고 가던 길을 갔다.
언제나와 같은 반응이었으나, 그마저도 민망해졌다.
“맞아. 네가 오해한 거야…….”
그러니까 좀…떨어져 줄래?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세라가 은근슬쩍 그를 밀어냈다. 하지만 손바닥에 와 닿은 몸은 거목처럼 단단해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더 깊이 몸을 맞춘 에녹이 그녀의 귓가에 제 입술을 바짝 붙여 속삭였다.
“싫어. 사과할래.”
“히익……!”
뜨거운 혀가 세라의 귓바퀴를 쓸었다. 한줄기 전류가 세라의 한쪽 어깨를 타고 자르르 퍼져나갔다. 펄쩍 튀어 오를 정도로 놀란 그녀가 에녹을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정면으로 시선을 마주친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익어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왜 이, 왜 이래……!”
“왜 이래……?”
하하, 귀여워.
그런 그녀를 놀리듯 낮게 웃음을 터뜨린 에녹이 귓가에 제 얼굴을 묻었다. 단단한 콧대가 말캉한 귓불을 뭉그러뜨리는 감각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어 세라의 체향을 흠뻑 머금은 그가 만족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코끝에 와 닿는 보드라운 여인의 살결을 마음껏 희롱하던 영웅이 입술을 벌렸다.
그의 몸이 세라를 향해 완전히 기울고, 강건한 어깨 너머로 놀란 두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
귓가에 에녹의 흥분 섞인 숨결이 들러붙었다.
뜨겁고, 꿈틀거리고, 질척하고, 부드럽고, 그러다 깨물리기도 하고……. 여러 감각이 한데 뒤섞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그 행위가 길어질수록, 세라는 제 몸을 이루는 모든 뼈와 근육들이 형체 없이 녹아내려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도 까맣게 잊었다.
다리 사이가 왈칵 젖어 들면서 배 속이 수런거렸다. 겨우 버티고 선 무릎 뒤에서 힘이 쭉, 빠져나가려던 찰나 고개가 돌아가고 입술이 겹쳐졌다.
그리하여 에녹과 세라는 완전히 하나로 겹쳤다.
이제 그의 뒤에서 본다면, 한껏 구부정하게 구부린 등만 보일 뿐, 그 너머에 안긴 자그마한 여체는 보이지 않았다. 포식하는 짐승처럼 고개를 묻은 영웅이 연신 맛있게 품 안에 든 먹잇감을 먹어 치웠다. 젖은 살을 물고 빠는 소리, 간혹 참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여인의 신음, 조금 더 입술을 벌려달라는 흥분 섞인 속삭임, 바짝 힘이 들어가 날개 뼈가 도드라진 등. 그 모든 것들이 한데 뒤엉킨 골목의 공기가 야릇하게 달아올랐다.
지나칠 정도로 자극이 강한 행위에 세라의 혼란이 더해졌다. 이보다 더한 짓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대체 이게 뭐라고, 왜 이제와서. 라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의도치 않게 시작된 그 포식은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 끝이 났다. 입맞춤은 세라의 눈이 완전히 풀려버릴 정도로 깊었으나, 떨어져 나온 영웅의 두 눈엔 여전히 갈증이 들들 끓고 있었다. 붉게 달아오른 입술을 길게 핥아 주는 몸짓에서 진득한 미련이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당장 그녀를 넘어뜨리고 싶다는 양 어둡고 번들거리는 눈빛이었다.
아쉬운 티를 풀풀 풍기며 세라를 놓아준 에녹이 이미 단정한 머리칼을 괜히 제 손으로 빗어 내리며 입을 열었다. 군청색의 바다를 미끄러져 내리는 손가락에는 세라의 목에 걸린 것과 똑같은 모양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세라의 심장이 다시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오늘 휴가 마지막 날이지? 캠프로 돌아갈 거야?”
“……으, 응.”
“난 오늘은 길드에서 자야 할 것 같아.”
“으, 응….”
“혼자서 잘 수 있겠어?”
“…….”
넋 놓고 같은 대답만 내놓던 세라가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 멈칫거렸다. 이 나이 먹고 혼자서 잠들지 못할 리가 없었으나, 순간적으로 ‘아니.’하고 대답해버릴 뻔했다.
“당연, 하지. 너는 새삼스럽게 그런 걱정을 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세라가 겨우 표정을 갈무리했다가.
“그래? 나는 못 잘 것 같은데. 서운하네.”
“…….”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바로 또 무너졌다.
겨우 가라앉았던 세라의 얼굴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 솔직하고 즉각적인 반응에 에녹이 끙끙 앓듯이 귀엽다고 중얼대고는 따뜻하게 달궈진 뺨을 앙, 하고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내일 봐. 세라.”
그러고는 떠나갔다.
“…….”
세라는 그의 잇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뺨을 어루만지며 멍하니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꼭 폭풍이 그녀를 휩쓸고 지나간 것처럼 얼얼하고, 헛헛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달달 떨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면서, 세라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이상한 감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대체 뭐지…? 나 왜 아무것도 못 하겠지…? 이 무력감은 뭐냔 말이야….
정신을 빼앗기다 못해 영혼까지 빨아 먹힌 듯한 그 모습에 체첸이 한심한 얼굴로 쯧쯧 혀를 찼다.
“우웩. 아주 녹아내리네, 녹아내려. 어? 손만 갖다 대도 자지러지면서 도도한 척은 왜 했대?”
“닥쳐…….”
핀잔에 맞서는 말투만큼은 근엄했으나, 흐물흐물하게 풀려버린 얼굴에는 어떠한 권위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상해. 전부 이상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괜찮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소리 좀 들었다고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의식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세라의 품에서 빠져나온 체첸이 난간 위로 내려앉아 한 차례 몸을 털었다.
“정신 바짝 차려, 이것아.”
그러고는 독기라고는 쏙 빠져 흐물거리는 얼굴을 향해 경고했다.
“일이 있어서 왔으면 거기에나 집중해야지. 네가 지금 이런 데서 연애 놀음이나 하고 있을 때야?”
본질을 잊지 말라 쏘아붙인 고양이가 지붕 위로 폴짝 뛰어올라 유유히 떠나갔다.
한창 간지럽던 분위기에 기꺼이 찬물을 들이붓는 발언이 아닐 수 없었다. 졸지에 노는 사람 취급을 당해버린 세라가 어이없다는 듯 밉살맞은 뒤꽁무니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야, 이래 봬도 할 일은 다 제대로 하고 있거든?!”
내가 지상에 올라와서 얼마나 많이 굴렀는데…!
뼈 빠지게 굴러다닌 덕분에 5억 년이던 형량이 채 1년도 되지 않아 1억 년까지 줄어들었고, 망할 뻔하던 시그너스 길드는 더욱 부강해졌으며, 운명이 뒤틀려 죽을 위기였던 이들도 멀쩡히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덕에 올해 재개된 중앙 가시 공략은 완전한 끝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알타이르 길드가 운명대로 사라진 덕분에 지원군들도 많이 도착했고, 현재까지 사상자 하나 없이 모든 게 순조로웠다.
중앙 가시를 잃으면 안타레스 교의 위상도 한풀 꺾일 테니. 그들을 완전히 뿌리 뽑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이 없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비야.”
괜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체첸의 말을 애써 떨쳐낸 그녀가 자리를 떠났다.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임시 캠프로 돌아가는 마차에 몸을 실은 세라는 제 막사로 돌아가자마자 침대에 콕 처박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에녹이 정리해 둔 푹신하고 보송한 이불에 파묻혀 뒹굴거리니 찝찝하던 기분이 금세 나아졌다. 하루 종일 빈둥대며 침대 위를 굴러다닌 그녀는 제 목에 걸린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내내 에녹에 대해 생각했다.
정확히는 자신이 이 반지를 끼고 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상상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저녁을 건너뛴 세라는 무언가를 챙겨먹기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오늘 밤은 에녹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그의 자리를 남겨 두고 눈을 감았다.
“……!”
그러다 또 악몽을 꾸고는 내쫓기듯 잠에서 깨어났고.
“시체다…! 시체가 걸렸어…!”
밤사이, 시그너스 길드에는 또다시 새로운 시체가 내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길드 외벽이 아니라, 중앙 가시 토벌대가 머무는 임시 캠프 한복판에.
“저번에도 이러더니. 또…?”
“그때 그거 우리 길드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어?”
세라는 수군대는 사람들 틈에 멀거니 서서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바라봤다. 처참한 꼴로 최후를 맞이한 남자의 얼굴은 이번에도 그녀가 지난밤 꿈속에서 쫓았던 이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의 몸에 새겨진 상처, 손목에 채워진 은빛 팔찌. 전부 세라가 본 적이 있는 것들이다.
눈을 뜬 채 숨이 멎은 남자의 얼굴에는 어김없이 온화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 미소가, 꼭 그녀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정말 네 생각대로 모든 게 순조로울 줄 알았느냐고.
“…….”
은연중에 묻어두었던 불길한 예감이 기습적으로 세라를 덮쳤다. 며칠 째 붕 떠 있던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고, 시끄럽던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현장에서 멀어진 세라가 자기도 모르게 힘주어 쥐고 있던 반지를 손에서 놓았다.
꿈에서 깨어나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