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245
244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진이 황급히 세라를 향해 다가갔다.
“세라. 세라…! 야, 너 괜찮아?”
진이 엎어진 몸을 일으켜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축 처진 고개가 앞뒤로 힘없이 흔들릴 뿐, 세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갑자기 빈혈이 왔다느니 하는 그런 평범한 이유로 이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애가 왜 이래……?
표정을 굳힌 진이 허공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정신을 집중한 그가 ‘지혜’를 향해 물었다.
세라 로젠바움이 갑자기 왜 쓰러진 거지?
진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진다. ‘지혜’가 요정을 답으로 안내했다. 긴 통로를 지난 그는, 마침내 쏟아질 진리를 기다렸다.
“……?”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답이 나타나지 않았다. 통로를 지나고, 또 통로를 지나고, 새로운 통로를 지나도 ‘지혜’는 진에게 그가 물은 질문에 대한 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그저 어둠. 진은 ‘지혜’와 함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의 미로 속을 헤매고 또 헤맸다.
그에 허공을 응시하고 있던 요정이 설핏 얼굴을 굳혔다.
“……? 너 뭐해?”
그때, 새카만 시야 너머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세라였다. 진은 황급히 ‘지혜’에서 빠져나와 그녀를 마주했다. 정신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그녀가 돌연 멀쩡히 깨어나 제 옆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어?”
그녀는 비어있는 앞자리와 어느새 제 곁에 다가와 있는 진을 번갈아 쳐다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자 있는 동안 달리기 연습만 했어? 너 못 본 사이에 되게 빨라졌다.”
그러다 싱거운 농담이나 던지고는 낄낄거렸다. 진은 이 상황에 대해 조금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세라를 낯선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봤어?”
“뭘……?”
“스노우 말이야. 걔가 뭘 들여다보고 잠에 들었는지 한 번만 알아봐 달라니까?”
반면, 금방 평정심을 되찾은 세라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서 해보라는 식으로 빤히 쳐다봐오는 얼굴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꿈에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 괜찮아…? 방금, 정신을 잃었잖아.”
“……뭐, 꿈꿨어? 내가 무슨 정신을 잃었다고….”
혹시나 싶어 물어봤지만 역시나였다. 세라 로젠바움은 방금 전의 일을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분명 말하는 도중 의식이 끊어졌었다. 아무리 정신을 잃은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이렇게까지 위화감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
진의 얼굴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졌다. 질문을 받은 자가 아무 말도 없으니,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하는 눈빛에 실린 감정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진은 점점 심각해졌고, 세라는 알겠다고도 싫다고도 하지 않는 그를 이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세라, 너…….”
둘 사이에 내려앉은 침묵을 먼저 깨트린 사람은 진이었다.
“이만 돌아가.”
평소보다 망설이듯 말문을 연 그는 단호한 축객령을 내렸다.
“어…? 갑자기?”
그에 세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그럼 내가 물어본 질문에 대한 답은…? ‘지혜’ 는…?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듯 미적거리는 그녀를 향해 진이 한층 더 강하게 축객령을 내린 건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가. 지금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진이 세라를 끌어내 등을 떠밀었다. 다급하게 밀어내는 손짓에서 어서, 한시라도 빨리 꺼지라는 의지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왜 그러는데…? 스노우 일 좀 알아봐 달라고 해서 이래?”
“그런 거 묻지 말고 그냥 가! 가서, 당분간 숲에 오지 마!”
찔끔한 세라가 짚이는 구석을 언급하며 일말의 대화를 시도해보아도 막무가내였다. 진은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그녀를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 알았어. 간다. 가.”
이대로 버티면 꼭 큰일이라도 날 분위기였기에, 세라는 석연치 않아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거 도와줄 수도 있지. 쩨쩨하게. 작게 투덜거린 그녀의 형상이 그림자 아래로 녹아 사라졌다.
“…….”
그리하여 혼자가 된 진은 곧장 체스판이 놓여있던 곳에서 벗어나 도서관으로 향했다. 숲이 온 힘을 다해 보호한 덕분에 그곳은 화마의 흔적 없이 말끔한 상태였다.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은 그를 향해 책장들이 반갑게 모여들었다.
“‘그것’ 좀 가져다줄래?”
진은 그중 아무 책장이나 똑똑, 두드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속삭였다. 똑똑, 똑똑, 똑똑, 요정의 부탁이 책장과 책장을 타고 전달되어 도서관 저 깊은 곳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다 마땅히 닿아야 할 곳에 닿았는지 더 이상 소리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자 진을 둘러싸고 있던 책장이 일제히 어지럽게 움직여 뒤섞이기 시작했다. 살아 움직이는 퍼즐처럼 착착 빈자리를 찾아 들어가며 서로 자리를 바꿔댔다. 그 광경을 초조하게 바라보던 진의 눈빛이 한층 심란해졌다. 갑자기 실이 끊어진 것처럼 정신을 잃었던 세라. ‘지혜’에게 영문을 물어도 답을 찾지 못했었다.
‘지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와 진실을 담고 있는 초월적인 정신체. 그러니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지혜’가 원인을 파헤칠 수 없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있다면 단 한 가지…….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책장이 밖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퉤, 요정의 발치에 책 한 권을 뱉어낸다.
[■■■■]제목이 까맣게 그을려 알아볼 수 없는 책.
지상에서는 그 존재도, 흔적도 모조리 지워진 자들의 기록.
읽는 것만으로도 금기를 범하는 이 책은 ‘지혜’로부터 삭제당하고도 사라지지 않고 여태 도서관 한편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원래라면 호수 깊은 곳에 가라앉아 신의 품으로 돌아갔어야 할 물건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버리고, 또 버려도 결국에는 도서관으로 돌아와 기어이 한자리를 차지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진이 세라 로젠바움과 마주했을 때. ‘지혜’는 그녀에게 이 책을 보여주라 일렀다.
그래서 보여줬고, 세라 로젠바움은 금기를 범한 대가로 잠시나마 시력을 잃었다. 그 뒤로, 세라가 다시 한번 책을 보여달라 요청했지만, 그는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녀가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는 이 책을 가까이해서 좋을 일이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 뒤로, ‘지혜’ 또한 더는 책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이 책의 사명은 다 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전 진과 함께 어두운 통로를 헤매던 ‘지혜’는 마지막 순간 대답을 대신하듯 이 불길한 책을 다시 한번 지목했다. 그리고 현재 이 지상에서 이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렇다면…….
“……이걸, 세라 로젠바움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뜻인가?”
그에 진의 정신 깊숙이 동화되어 있던 ‘지혜’가 잘게 진동했다. 그 의지를 알아들은 진의 눈빛이 혼란스럽게 흔들렸다.
그는 신의 축복으로 빚어진 존재이면서, 감히 금기를 범하라 종용하는 ‘지혜’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그 애한테 뭘 보여주고 싶은 건데…….”
‘지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
길드로 돌아온 세라는 가장 먼저 체첸에게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여태 자는 게 정상이라고?”
“그래. 그렇다니까.”
진으로부터 들었던 늦잠의 이유를 설명해 주자, 새카만 고양이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떠억 벌리며 놀랐다. 세라는 바짝 좁아 든 동공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며 무심하게 한마디 덧붙였다.
“중간에 깨어났다던데? 몰랐어?”
“…….”
몰랐던 게 분명한 반응이었다. 세라가 알 만하다는 듯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놀러 다니느라 놓쳤구만.”
“아니거든…!”
“그 꼴을 하고?”
수상할 정도로 강한 부정을 하는 검은 고양이를 향해, 세라는 개소리 그만하라는 듯 그저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세라의 어깨 너머로 들려오는 소음이 지금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켜 주었다.
두 사람이 접선하고 있는 곳은 길드 회관에 있는 스노우의 침실이 아니라,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폴폴 풍기는 시가지 한복판이었다.
약속하고 만난 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우연히 마주친 거였다. 세라는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적당한 음식점을 찾다가, 체첸은 길드원들이 귀엽다고 놓아준 음식을 좋다고 먹어대다가. 시선이 마주친 두 사람은 단번에 서로를 알아봤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 순간 튀어나온 주변 가게 주인이, 체첸의 발치에 질 좋은 육포를 놓아주며 한 말을 똑똑히 들었다. 우리 못난이 오늘도 왔네…….
“이, 이건 그냥…. 이젠 감시자도 없으니까. 아주, 잠깐 주변 탐색을…….”
더는 눈 가리고 아웅 할 수도 없어진 체첸이 커흠, 커흠, 수염을 바르르 떨며 되도 않는 변명을 중얼거렸다. 어차피 세라는 그녀가 지극정성으로 스노우를 돌보든 말든 관심이 없었으므로, 됐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여튼, 난 약속 지켰다. 여름에는 깨어날 거라니까 그때까지 잘 붙어 있든지.”
“…….”
“물론, 그 때까지 네 숨이 붙어 있다면.”
“야…!”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인 세라가 심술궂게 입매를 비틀었다. 그 발언은 안 그래도 언제 지옥으로 끌려갈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던 고양이의 가슴에 비수를 꽂기에 충분했다. 캬아악! 위협적으로 하악질을 한 고양이가 폴짝 뛰어 세라가 몸을 기대고 있는 난간에 올라섰다.
“이 악마! 재수 없게 왜 그런 불길한 이야기를…어?”
본격적으로 따지고 들려던 체첸은 그 순간 세라의 목에 걸려 있는 반짝이는 반지를 발견하고는 그쪽에 관심을 빼앗기고 말았다.
“너 이거, 뭐야? 못 보던 걸 하고 있네?”
“아아. 이거?”
가까이 다가가 앞발로 톡, 톡,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물건을 건드리자 세라가 대수롭지 않은 척 턱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에녹이 줬어.”
하지만 웃고 싶어서 씰룩거리는 입가를 완전히 감추는 데에는 실패했다.
“어어? 네 원수?!”
그 꼴을 목격한 고양이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진다.
“이거… 반지… 아니야?”
마왕이라 불리던 그녀였지만, 인간들 사이에 반지를 주고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그거 아닌가, 사랑하는 사이에 닿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꽉 닫힌 맹세. 그 간지러운 걸 타인에 대한 신뢰라고는 쥐뿔도 없는 저 여자가 나눴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냥 세라 로젠바움이라는 인간이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서, 준다고 순순히 받았다고? 네가?”
그리고 괘씸해졌다.
그녀가 스노우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에는 고작 그런 감정에 얽매여 쩔쩔대냐고 비웃었던 주제에, 본인은 뒤로 제 원수랑 놀아나고 있었다니…!
지난날 당했던 수모가 떠오른 고양이가 씩씩대며 털을 바짝 세웠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그 지랄을 떨어대더니. 뭐야…! 결국 너도 감정이 있었네!”
“허, 참. 감정은 무슨. 그런 거 아니거든?”
그에 세라가 그런 거 아니라며 딱 잡아떼기 시작했다. 반지를 받은 후 진에게 쪼르르 달려가 자랑질을 해대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그녀는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머리채까지 잡고 뒹굴어댄 진과는 달리, 아직 체첸 앞에서는 최소한의 위엄과 명예를 지키고 싶었다.
그래서, 내심 좋으면서 아닌 척. 에녹 혼자 애가 달아 있는 양 도도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나는 별 감정이 없는데, 얘가 그냥 혼자서-.”
정말로 저 멀리, 길드원들과 함께 걸음을 옮기던 에녹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에녹도 비슷한 시기에 세라를 발견했다.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듯 가라앉아 있던 눈에 생기가 스며들더니 곧 사르르 녹아내려 예쁘게 휘어졌다.
그 예쁜 미소 위로, 지난밤 사랑을 속삭이던 땀에 젖은 얼굴이 겹쳤다.
‘사랑해. 세라 로젠바움.’
“……!”
그 순간 쿵,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며, 가슴께가 아플 정도로 조여들었다.
히익, 헛숨을 삼킨 세라가 저도 모르게 체첸을 낚아채 벽 뒤로 숨어버렸다. 별로 힘든 동작도 아니었는데, 전력 질주라도 하고 난 것처럼 숨이 차고 심장이 뛰었다.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뛰어대는 맥박질을, 그녀의 품에 안긴 고양이가 듣지 못했을 리 없었다.
“감정이 없기는 개뿔.”
말과는 달리 솔직한 몸의 반응에, 체첸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정거렸다.
“쟤 혼자서 좋아하는 거라며? 피곤하고 귀찮다며? 그럼 너는 멀쩡해야지. 왜 눈 마주치자마자 이렇게 숨어들어?”
정곡을 찌르는 말들이 안 그래도 당황한 세라의 가슴을 후벼팠다.
“그, 그건…….”
변명을 하려던 그녀는 쉽게 답을 찾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잘 모르는 얼굴이었다. 이상하다. 내가 왜 이러지…? 잘못한 것도 없고, 쫓기는 것도 아닌데 왜 저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도망치듯이…….
“……!”
혼란에 빠진 그녀가 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가까워진 타인이 내뿜는 열기가 훅, 끼쳐 들고. 뛰어온 듯 가쁘게 내뱉는 숨소리는 바로 그다음이었다. 이제 세라는 숨소리만 듣고도 상대가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세라가 꼭 뭔가를 잘못한 아이처럼 느릿하게 상대를 올려보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두 팔 사이 세라를 가둔 에녹이 이마와 이마를 맞댄 채 순진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