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old my country in my previous life RAW novel - Chapter 90
89
“무,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
“네가 정녕 아퀼라를 죽이려 음모를 꾸몄어?”
“모르는 일입니다!”
이제 겨우 첫마디를 물었을 뿐인데, 코락스는 경기를 일으키며 강하게 부정했다.
“시리안이 멋대로 꾸민 짓이 틀림없습니다! 아바마마! 제가 왜 제 동생을 죽이려고 들겠습니까?! 저는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서 술술 자신이 공범이라는 걸 불었다. 이중 누구도 아직 시리안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건만, 그는 이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훤히 알고 있었다.
이보다 확실한 증거가 있을까.
한심해하는 시선이 코락스를 향해 쏟아졌다.
의심받는 상황에는 최대한 말을 줄여야 하는 법이거늘. 이런 기본적인 사항을 저 멍청이에게 알려 줄 만한 제대로 된 측근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후우-.”
같은 감상인지 데니다스의 입에서 온갖 근심이 담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한껏 몸을 부풀려 힘을 과시하던 이리처럼 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이가 다 빠진 시선이 스노우와 세라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종이를 훑었다.
세라의 손에는 스노우와 아퀼라의 약혼 증명서가 있었다. 보상을 요구하기에 앞서, 그녀가 한번 봐야겠다고 요청한 탓이다.
오래전에, 데니다스와 스노우의 부모 사이에 이루어진 이 계약서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새것처럼 좋은 향이 나는 종이에는 멋들어진 글씨체로 ‘알타이르 소속 아퀼라와 스노우는 반드시 혼인할 것을 맹세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그때, 데니다스의 판결만을 기다리던 아퀼라가 돌연 제 잘못을 시인하고 나섰다.
“제가 미덥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일. 아바마마 저는…….”
“아퀼라!”
“저는, 모든 책임을 지고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겠습니다.”
아퀼라는 데니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후계자 자리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텐데, 아퀼라는 조금도 망설이는 기색 따윈 없었다.
휘어지기보다는 부러질 아이.
세라는 못 말리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도 제게 기회가 왔다며 몰래 입가를 씰룩대는 코락스를 한심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털썩, 데니다스가 쓰러지듯 의자에 몸을 묻었다. 드디어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는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이번 사건은 온전히 내 관리 부족이군.”
별안간 모든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참으로 그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나는 이 일을 단순히 한 번의 재판으로 끝내고 싶지 않네. 누가, 얼마나 연루되었는지 명확히 짚어 볼 참이야.”
조심스럽게 운을 뗀 그는 힘이 다 빠진 어조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사건을 파헤칠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니 처분에 관해서는 알타이르에게 맡겨 주지 않겠나.”
이런저런 핑계를 댄 발언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결국 데니다스는 지금 당장은 누구도 처벌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차피 누가 음모를 꾸미든 말든 시그너스와는 관련 없는 일이었기에, 에녹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상관없어. 보상만 확실하면.”
다만 주고받을 것만큼은 확실히 하자 못을 박았다.
“……그래. 확실하게…… 보상하지.”
데니다스는 제 살을 내어주는 심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시종에게 눈짓하자, 빈 종이를 든 시종이 세라의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
보상을 요구한 건 에녹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것을 정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받고 싶은 것을 적어서 내 시종에게 주게. 그것이 무엇이든 군말 않고 주지.”
마지막까지 못마땅한 눈으로 세라를 바라본 데니다스가 다시 한번 자신의 약속을 견고하게 보증했다. 완전히 전의를 잃은 그의 얼굴에는 씁쓸한 패배감만이 남아 있었다.
“가시와 관련된 일은 돌아가서 차근히 조사할 것이다. 그리 알고 다들 돌아갈 채비를 하도록.”
출발은 내일이다.
자리에서 일어선 데니다스가 아퀼라의 부축을 받으며 회의장을 나섰다.
“그때까지 코락스, 너는 외출을 삼가고 방에 처박혀 있어!”
그러면서 코락스를 향해 꼴도 보기 싫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네…… 네! 아바마마!”
바닥에 코가 닿도록 머리를 조아린 코락스는 행여나 누가 붙잡을세라 제 아비를 따라 얼른 회의장에서 도망쳤다.
세라는 패배자가 되어 퇴장하는 두 부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은 저렇게 대해도, 데니다스는 결국 아들을 용서할 것이다. 데니다스의 곁에 선 아퀼라의 운명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스노우를 데릴사위로 들일 수 없어지면, 아퀼라는 더 이상 그의 가장 사랑하는 자식이 아니게 될 테니까. 전통을 끔찍이 여기는 데니다스로서는 장자 계승 원칙을 무시해야 할 정도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게 뻔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아퀼라는 탑에 갇힐 것이고, 코락스는 후계자가 될 것이고, 데니다스는 탐탁지 않은 코락스를 견제하다가 내전이 일어나 전부 죽을 것이다.
그는 대가를 받을 것이다.
아퀼라의 말대로, 과거에 잘못된 판단을 해 다른 사람의 운명을 함부로 꺾어 버린 벌을 말이다.
“…….”
세라는 제 앞에 놓인 종이에 정해진 답을 적어 내렸다.
아마, 저 쩨쩨한 영감이 선뜻 원하는 걸 주겠다고 했던 이유도 이 안에 무엇이 적힐지 알고 있으니 했던 선택이겠지.
그토록 바라던 스노우를 놓아줄 정도로 다급했다면, 아퀼라를 자식으로서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대체 왜 결말이 그렇게 되는 건지 여전히 알 수가 없었다.
“…진짜로 인과응보가 있네.”
낮게 중얼거린 세라가 반듯하게 반으로 접은 종이를 데니다스의 시종에게 넘겨주었다.
시종은 무엇이 적혔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왕을 따라 회의장을 나섰다.
“깔끔하네.”
개운한 표정의 에녹 또한, 드디어 상황이 끝났다며 좋아할 뿐 세라가 무엇을 적었는지 묻지 않았다.
모두가, 세라가 저 종이에 스노우의 이름을 적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로지 단 한 사람.
“종이에 뭐 적었어~?”
스노우 본인만이, 세라가 무엇을 적었는지 궁금해했다.
당연했다.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세라 로젠바움이 구태여 제 손으로 자신을 구제해줄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 또한 ‘지혜’로 엿본 것일까. 아니면 스노우의 판단력인가.
무엇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 세라가 악당처럼 입매를 비틀어 대답했다.
“저 영감이 죽어도 주기 싫을 만한 거.”
***
알타이르는 날이 밝자마자 떠났다.
개선장군처럼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것에 비해, 돌아가는 뒷모습은 패잔병처럼 초라했다.
두 길드 간 조약에 의한 공식적인 방문이었음에도 데니다스의 요청에 의해 시그너스의 배웅은 따로 없었다.
요란한 뿔 나팔도 불지 않았고, 꽃을 뿌리는 화동도 없었으며, 언제나 그가 가는 길 위로 깔리는 붉은 융단도 자취를 감췄다.
말에 오른 알타이르 길드원들은 조용히, 누구에게 들킬까 두렵다는 듯이 은밀하게 시그너스를 떠났다. 세라는 그들이 머물던 건물의 꼭대기 층에서 떠나가는 이들의 뒷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행여나 좋은 구경을 놓칠까 봐 꼭두새벽부터 들이닥친 그녀는 여유롭게 티타임까지 즐기는 중이었다. 아마도 이 건물 어딘가에, 그녀처럼 꽁지가 빠져라 사라지는 알타이르의 모습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제법 될 터였다.
“참 재미있지 않니?”
천년의 체증이 내려간 얼굴로 불청객의 퇴장을 구경하던 그녀는 알맞게 식은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곧 미간을 좁히며 차 맛이 좋다며 감탄했다.
비제가 엄선하여 들여온 찻잎은 과연 향미가 좋았다. 차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세라가 느끼기에도 꽤 높은 품질의 물건임을 단번에 알아챌 정도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될 거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텐데.”
역시 우리 애가 일은 잘하지.
뿌듯한 미소를 지은 세라가 우아한 귀족 흉내를 내며 차향을 음미했다.
“그러게요.”
그에 세라의 맞은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은 상대의 앞에는 마찬가지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이 놓여 있었다. 벌써 차를 절반이나 마신 세라와는 달리, 상대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애꿎은 찻잔만 만지작대고 있었다.
“……설마, 보상으로 저를 달라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 손의 주인공은 홀로 시그너스에 남게 된 아퀼라였다.
얼떨결에 알타이르가 시그너스에 지급해야 하는 보상으로 지명된 그녀는 하루아침에 가족과 동료들을 떠나보내고 혈혈단신으로 경쟁 길드의 소속이 되어 버렸다.
“그래 보이더라.”
그에 재미있는 기억이 떠오른 세라가 개구쟁이처럼 키득거렸다.
세라가 적어 낸 종이를 확인한 데니다스가 가던 길을 돌아와 다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오던 순간이 아직도 눈에 훤했다.
에녹의 면전에 아퀼라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던진 중년의 남자는 시뻘겋다 못해 퍼렇게 질린 채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더랬다.
‘내, 내 딸을 달라고?! 이 도둑놈들이……!’
그 한마디에 상황을 파악한 에녹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부드럽게 상황을 넘겼다.
‘무엇이든 군말 없이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내 딸을 내놓으라고 하는 건!’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부드러운 협박으로 잘, 넘겼다.
‘어억, 어어억……!’
설마 아퀼라를 빼앗길 줄은 몰랐던 데니다스는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아바마마!’
쓰러지는 그를 가장 살뜰히 챙긴 이는 단연 코락스였다.
아마도 그는 눈엣가시 같은 여동생이 길드에서 축출당했다며 속으로는 어깨춤을 추고 있었을 것이다.
병신. 제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게 어떤 가시밭길인 줄도 모르고…….
마음속으로 한껏 코락스를 비웃어 준 세라가 여태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아퀼라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아퀼라. 거래할 때, 제일 멍청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
어느새 마지막 한 모금을 들이켠 세라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을 했다.
“값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요.”
과연 정직한 아이답게 책에서나 나올 법한 모범적인 대답이다.
“아니.”
하지만 세라가 원했던 답은 아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걸 흥정하는 사람이야.”
탁,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친절하게 자신이 셈한 계산법을 해석해 주었다.
“어차피 내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약혼만 파투 나면 어디 가지도 않을 사람. 뭣 하러 판돈으로 끌어오겠니?”
“……그래서 저를 달라고 하셨다고요?”
“약혼 증서에는 ‘알타이르 소속의 아퀼라’와 결혼하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세라는 스노우를 시그너스 소속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둘 사이의 약혼을 무효화시켜야 했다. 이제 와서 약혼 증서를 확인한 이유였다.
역시나 약혼 증서에는 스노우가 어디에 소속되어 있든 ‘알타이르 소속의 아퀼라’와 결혼해야 한다고 못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면 세라가 그 종이에 스노우의 이름을 적는다 하더라도, 언젠가 데니다스가 약혼 증서를 휘두르며 결혼을 요구할 수 있는 빌미는 여전했다.
그래서 세라는 약혼 증서에 적힌 전제 조건 자체를 뒤틀어 버린 것이다.
아퀼라가 더 이상 알타이르 소속이 아니게 되면, 스노우가 어디에 있더라도 결혼해야 할 대상이 사라지니까.
그냥 소소한 말장난 같은 거였다.
“…….”
모든 설명을 들은 아퀼라는 말없이 세라만 바라봤다.
입을 반쯤 벌리고 있던 아이는 언뜻 배신감이 서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사람을 물건처럼 다루는 일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응. 싫어해.”
세라는 두 번 생각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제삼자가 다른 누군가를 대신해 멋대로 인생을 건드리는 행위를 경멸했다. 그게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분 더러운지 잘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필요하다면 해야지. 별수 있어? 내 마음까지 다 챙기면 큰 사람이 될 수가 없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앞에 난 지름길을 뻔히 두고 돌아가는 선택 따위 하지 못한다.
그녀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자존심이나 정의 따윈 없었고, 오로지 결과만이 전부였다. 다만, 이번에 선택한 지름길은 원래 정해져 있던 것에서 자신이 원하는 걸 조금 더 가미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너도 앞으로는 좀 영악하게 굴어.”
세라는 아퀼라에게 부러지기보다는 휘어지는 법을 가르쳐 주고 싶었다.
이 세상은 부러진 사람의 귀함을 알아주기엔 너무나도 가혹했고, 한 번 부러지고 말기에 아퀼라는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였다.
“하지만 그러면 스노우 오라버니께서는…….”
“뭔 상관이야. 영원히 객식구로 살라지. 뭐.”
내 알 바인가?
차갑게 코웃음을 친 세라가 스노우 따위 알게 뭐냐며 깔깔거렸다.
스노우에 대한 염려라곤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통쾌한 웃음에, 아퀼라가 조심스럽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의문을 드러냈다.
“두 분은, 진짜 연인 사이가 아니……신 거죠?”
“그래? 네 눈엔 어때 보여?”
“…….”
아퀼라는 헷갈리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라에게 사랑의 심오함을 가르쳐 준 장본인답게, 그녀는 빤히 보이는 답을 두고도 자꾸만 이리저리 의미를 부여해 가며 복잡하게 해석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여튼, 귀엽다니까.
일부러 알쏭달쏭하게 미소 지은 세라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안 마실 거면 일어나. 오늘부터 네가 지낼 곳을 안내해 줄게.”
“어어, 네에-.”
절뚝거리며 앞장을 서자 후다닥 일어선 아퀼라가 얼른 뒤따랐다.
외벽을 지나 곧장 길드 내부로 들어온 두 사람은 길드 회관으로 향했다. 오늘도 텅텅 비어 있는 회관의 2층, 이제는 익숙한 방문을 열어젖혔다.
당장 누가 들어가 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된 그곳은 어제까지도 세라가 머물던 방이었다. 모든 것을 새것으로 갈아 끼운 방은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전부 끝낸 모습이었다.
“길드 회관에 있는 손님용 방인데, 전부 새것으로 갈아 놔서 깨끗해. 준비 없이 이곳에 온 거니까 옷은 저쪽에 걸려 있는 걸로 입으면 돼. 너에게 크기는 할 텐데. 어차피 갈아입을 옷도 없을 테니까 그냥 입어. 만약, 길드에 대해서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옆방에 사는 사람한테 물어봐.”
“……옆방에, 누가 사는데요?”
“스노우.”
“……!!!”
낯선 환경에 잔뜩 굳어 있던 아퀼라의 얼굴에 크게 화색이 돌았다.
저렇게나 좋을까. 세라는 이름만 들어도 표정이 바뀔 정도로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저한테, 왜…… 잘해 주세요?”
아퀼라가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뀨우우……. 그러자 아퀼라의 어깨에 매달려 있는 검은 덩어리가 함께 고개를 갸웃거렸다.
먹구름처럼 보일 정도로 거대했던 검은 덩어리는, 아퀼라가 후계자 자리를 내놓겠다고 선언하는 순간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세라는 뿌듯한 얼굴로 주먹 크기만큼 줄어든 검은 덩어리를 툭, 건드렸다.
“잘해 주는 거 아닌데.”
뀨웃?!
덩어리가 화들짝 놀라 아퀼라의 뒤로 숨었다.
“앞으로는 알아서 적응해. 알타이르를 떼어 냈으니 내 볼일은 끝났거든. 정식으로 시그너스 길드원이 되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처럼 가시 토벌을 하면서 돈을 벌든지, 아니면 가게 밑천 마련해서 장사라도 해 보든지.”
무관심을 가장한 자유를 선사해 준 세라가 휙, 정 없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저, 저기……!”
아퀼라가 다급히 그녀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고개만 돌려 대답을 대신하니 여전히 말간 빛을 잃지 않은 눈동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언니라고, 불러도 돼요?”
좋은 애였다.
피식, 바람 빠진 헛웃음을 지은 세라가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마음대로 해.”
자신을 붙잡은 손을 털어 낸 그녀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회관을 나섰다.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이번에야말로 흐릿하고 공기가 눅눅했다.
회관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랜만에 왼쪽 팔뚝이 뜨거워졌다.
그녀의 형량이 줄어들고 있다는 표시였지만, 지금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알타이르가 시그너스 영역에서 완전히 벗어났을 것이다. 이로써 비틀렸던 운명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멈췄던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으니 알타이르를 기다리고 있는 건 내전에 의해 서서히 붕괴하는 결말뿐이다.
세라가 바꾼 건 그 붕괴에서 아퀼라만 쏙 빼낸 사소한 변화다.
이 사실을 알면 날 원망하려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휘적휘적 걸어간 세라는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숨어 있지 말고 나와. 짜증 나니까.”
그리고 아퀼라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쌀쌀맞은 목소리로 상대를 불러냈다.
“냉정해라~. 그래도 한때 애인이었던 사이에 너무 차가운 거 아니야?”
그러자 골목길 기둥 뒤에 숨어 있던 스노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세라의 앞으로 걸어온 그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섰다. 말투는 장난스러웠지만,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만큼은 웃음기 하나 없이 진지했다.
“…….”
“…….”
막다른 길에서 만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유독 꼴 보기 싫은 금발을 바라보며, 세라의 눈매가 신경질적으로 좁아 들었다.
다른 이의 비틀린 인과를 처리했으니 이제는 제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