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14
014 우리 귀여운 매제
“말은 편하게 해도 되겠지?”
“네, 물론입니다.”
“거기 앉아라.”
전체적으로 마른 체형.
완벽한 각도로 넘긴 가르마.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각진 안경까지.
강태양의 첫인상은 깐깐한 중년의 이미지였다. 사진으로 대충 알고 있었음에도. 실제로 보니 훨씬 더 까다로워 보인다.
‘···아무리 봐도 흑막 같단 말이지.’
만약 그를 웹소설에 등장시킨다면 머리 좋은 ‘이인자’ 캐릭터로 만들지 않을까. 힘만 좋은 두목을 뒤에서 조종하는 책사 역할로 적절해 보인다.
물론 현실에서의 그는 대한 그룹의 일원으로서, 굳이 바지사장을 둘 필요도 없는 상황이지만.
‘눈빛 한번 살벌하네.’
맞은편에 앉은 강태양이 나를 노려봤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벨 수 있었다면, 지금쯤 난 갈기갈기 찢겨나갔으리라.
‘내가 끼어들어서 화가 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높다.
만약 강태양이 마약을 운용하고 있고, 이를 강바다에게 숨기고 싶다고 가정한다면. 중간에 끼어든 내 존재가 심히 거슬리겠지.
조용히 처리하기에는 강바다의 시선을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 테고, 그렇다고 가만 내버려 두자니 불안할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강태양과 거래를 하는 것.
그의 일에 관여하지 않고 입을 닫는 대신. 강바다와의 교제를 허락받는 거다. 오면서 예상 시나리오도 어느 정도 짜뒀다.
‘대본을 읽는다고 생각하자.’
긴장할 필요도 없다.
어지간한 질의응답은 전부 준비해뒀다.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나는 그저 상대의 질문에 맞춰 준비한 대사를 꺼내기만 하면 된다.
‘어떤 질문이 나올까.’
최근 시사나 경제. 혹은 본론인 마약부터 꺼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예상범위 안이고, 당황할 이유는 없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너 동정이냐?”
“예?”
“동정이냐고 물었다.”
“······.”
이건 예상 못했는데.
지금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혹시 지금 농담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왜 대답이 없지?”
“그게···.”
“네놈 설마 우리 막내랑···.”
“안 했습니다!”
“그럼 딴 년이랑은 했다는 소리냐!?”
쾅-!
책상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강태양. 주머니에 총이 있었다면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겨눌 기세였다.
‘이게 뭔···.’
누가 보면 오빠가 아니라 아빠인 줄 알겠네. 아무리 봐도 다혈질 같은 이미지는 아니었는데. 겉과 속이 이렇게 다를 수가.
“해본 적 없습니다.”
“지금 나를 바보로 아는 거냐? 그 얼굴로 동정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이건 칭찬인가?
칭찬인지 욕인지 애매해서 뭐라고 반응을 못하겠다. 뭐, 일단 얼굴은 합격점이라는 뜻이겠지. 어떻게든 예선은 통과한 모양이다.
“네놈, 바다랑 결혼식 올리기 전까지는 그 동정을 유지하는 게 좋을 거다. 알아들어!? 아니, 결혼한 이후에도···.”
“대표님, 진정하십시오.”
그때 뒤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던 비서가 말을 꺼냈다. 어찌나 차가운지, 강태양이 움찔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비서에게 손수건을 건네받아, 자신의 안경을 닦기 시작했다. 그 나름대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방법인가 보다.
‘···캐릭터 한번 확실하네.’
나중에 써먹어야겠다.
현실 그대로 황녀의 직계 가족으로 등장시키면 어떨까. 겉으로는 차갑지만, 속으로는 누구보다 그녀를 아끼는 츤데레 캐릭터로.
‘예상이랑 전혀 다르잖아?’
황당한 상황이지만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덕분에 가족 내에서 강바다가 어떤 존재인지 확실히 알겠다.
후계자들의 피 튀기는 각축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유의미한 발걸음이었다.
“···너무 흥분했군.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녀석이로군. 제 발로 찾아올 때부터 범상치 않은 놈이라고 생각은 했다만, 혹시 이 상황을 예상한 건가?”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강바다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평범한 일상에서 멀어질 것을 각오했으니까.
웹소설 작가로서의 짬밥이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니라서. 갑자기 내 눈앞에 상태창이 나타나거나, 이세계로 전이된다고 해도 금방 적응할 자신도 있고.
‘진상 손님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
그동안 온갖 아르바이트를 병행면서 마주쳤던 진상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에 비하면 강태양은 신사다.
적어도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아 올리거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들이밀며 자신의 의견을 강제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웃었다.
이게 내가 가진 최고의 무기다.
“···쭉정이는 아니군.”
“감사합니다.”
강태양이 안경을 밀어 올리며 눈을 빛냈다. 그것만으로 팔불출 같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사업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재밌는 사람이네.’
나는 차분히 그를 관찰했다.
앞서 과장스럽게 행동한 것도 전부 나를 떠보기 위한 연기였던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런 자연스러운 분위기 전환이 가능할 리가 없다.
‘···과연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건가.’
현대판 황실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집안이다. 이런 이중적인 모습까지 반영한다면, 제법 매력적인 캐릭터가 나오겠지.
제국의 그림자라는 설정이라면 어떨까. 제국을 위해 암중에서 일을 처리하는 역할이라면 딱 어울릴 것 같은데.
“왜 거기 있었지?”
“유통책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이유는?”
“그쪽에는 제가 봉사활동을 다니는 고아원이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해를 끼치기 전에 치워둘 생각이었습니다.”
“나를 이용해서?”
감히?
그런 말이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여기서 대답을 잘못하면 곧바로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유통책을 제압해서 경찰에 넘기는 게 나의 첫 번째 계획이었고, 두 번째는 강바다를 통해 처리하는 것이었으나. 이걸 곧이곧대로 말하면 안 되겠지.
“대표님께 드릴 선물로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건방진 놈.”
말과는 다르게 강태양의 얼굴에는 미묘한 웃음기가 서렸다. 예상대로 비굴한 것보다 당당한 걸 더 좋아하는 타입 같다.
“맹탕보다는 낫군. 막내가 워낙 착하고 속마음이 여려서, 항상 누구한테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걱정했거든.”
“···그렇군요.”
“지금까지 막내한테 접근했던 녀석들이 한둘이어야지. 외모, 배경, 지식. 뭐 하나 떨어지는 것이 없는 애니까.”
“이해합니다.”
이 양반 완전 팔불출이다. 강바다가 비교적 착한 편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누구한테 이용당할 만한 성격은 절대 아닌데.
‘오히려 반대에 가깝지.’
물론 남자라면 누구나 욕심낼 만한 사람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내가 의심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이 상황에서 내가 꺼낼 수 있는 카드는 하나뿐이다. 강태양은 그녀를 자기 딸처럼 여기는 모양이니, 최대한 이용하는 수밖에.
“바다 씨는 보육원 아이들한테도 인기 만점이었습니다. 형님도 아시다시피 아이들의 눈이 워낙 솔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언니가 예쁘다고 막 달라붙어서···.”
“음, 기특한 녀석들이군.”
역시 강바다와 관련된 이야기에서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풀어진다. 은근슬쩍 ‘형님’이라고 불렀는데도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을 보니 확실하다.
이쯤 되면 처음의 격한 반응도 연기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컸다. 강태양의 허락을 받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지도 모르겠다.
“바다 씨가 손뼉을 치니까 창고가 싹 비워지는데, 무슨 요정이 마법을 부리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을 때 주임원사님이 비슷한 마법을 펼치셨···.”
“그만, 알겠다.”
“예.”
약 30분 정도, 쉴새 없이 강바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던 나는 군말 없이 입을 다물었다. 멈출 때를 정확히 아는 것이 도박사의 기본 소양이다.
“아무튼. 이 일에서는 손 떼라. 위험하기도 하고, 외부자가 함부로 끼어들 일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헌데···.”
“보육원 주변은 확실하게 청소해주마.”
“감사합니다.”
이만하면 강태양으로부터 내가 바라던 것 이상을 얻어낸 셈이다. 이 문제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
“그만 가라.”
“다음에 뵙겠습니다.”
“동정 유지해라. 안 그럼 죽는다.”
“···예.”
훠이훠이-
강태양이 손을 휘저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에 나는 두말없이 고개를 숙인 후 방문을 나섰다.
‘생각보다 잘 풀렸네.’
동정 유지가 조건이라니.
이건 내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가짜 결혼을 할 때부터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던 일이고, 어기는 순간 강바다 선에서 정리될 테니까.
전쟁과 환란 속에서도 명맥을 지켜왔던 우리 가문의 역사가 내 대에서 끊기는 건, 선조들께 참으로 죄송한 일이다만.
‘···그래도 피는 이어질 겁니다.’
나에게는 여동생이 있으니까.
그 성격에 시집은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외모는 썩 괜찮은 편이니, 내가 혼수만 도와주면 어떻게든 되겠지.
‘뭐, 아무튼.’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
지금부터가 시작이겠지만 첫 단추로는 썩 나쁘지 않았다. 비로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 * *
“흠.”
톡, 톡, 톡.
김하늘이 빠져나간 방 안. 강태양은 의자를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어느새 사업가로 돌아온 그의 얼굴에서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장비서가 보기엔 어때?”
“괜찮아 보입니다.”
“더 자세히.”
“비굴하지도 않으면서도, 챙길 건 전부 챙겼습니다. 일희일비하지도 않았고요. 눈치도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장비서의 말에 강태양이 의외라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장비서가 높은 평가를 주는 건 오랜만이네?”
“딱히 높은 건 아닙니다만.”
“그 정도면 높은 거지. 맨날 쓰레기다, 분리수거도 안 된다. 그런 평가만 하잖아?”
“전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사람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런 면에서 김하늘 씨는 자신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흐음-
강태양이 무언가 고민하듯 자신의 턱을 매만졌다. 그가 보기에도 김하늘이 썩 괜찮은 인상이었기 때문이다.
– 대표님께 드릴 선물로 적당하지 않겠습니까?
여유롭게 웃으며 말을 꺼내는 김하늘의 표정이 아직도 눈가에 아른거렸다.
대한 그룹이라는 이름을 빼고 보더라도. 마약이나 클럽 운영 등, 자신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짐작하고 있을 텐데도 그런 자신감을 보이다니.
처음에는 순진한 막내를 꼬신 괘씸한 녀석에게 적당히 겁이 나 좀 주려고 했는데, 되려 마음이 흔들릴 줄은 몰랐다.
“근데 그 녀석 정말 막내를 좋아하기는 하나?”
“그래 보입니다.”
“무슨 근거로? 돈 빼먹으려고 붙은 놈일 수도 있잖아. 아니면 어떻게든 한번 자빠트려보려고 난리 치는 놈일 수도 있고.”
지금껏 그런 놈들을 수도 없이 봤던 강태양은 쉽사리 김하늘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에 장비서가 입을 열었다.
“여자의 직감입니다.”
“···장비서 답지 않게 왜 그래?”
“즐거워 보였거든요.”
“응?”
“김하늘 씨가 아가씨 이야기를 꺼낼 때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습니다. 정작 본인은 인지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만.”
“······.”
장비서의 말에 강태양은 침묵을 삼켰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막내도 결혼할 때가 되긴 했지. 장비서.”
“네.”
“우리 귀여운 매제에게 선물 하나 보내주자고. 괜찮은 거로 몇 개 추려봐.”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