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85
085 처음 뵙겠습니다
글을 쓰고 싶다.
이 생각이 든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글을 읽고 쓰는 게 너무 좋아서 전업 작가라는 길을 선택했으나, 막상 직업이 되니 억지로 쥐어 짜낼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엔 더 그랬지.’
최근에는 돈을 벌기 위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소설도 마구잡이식으로 내던졌다.
유명세 덕분인지 반응은 어이없을 정도로 좋았으나, 정작 나는 글을 뽑아내는 기계가 된 것만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던 것.
‘대표님은 알고 계셨나?’
어쩌면 최진철 대표가 반쯤 강제로 휴가를 보냈던 이유가 이것일지도 모르겠다.
강바다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 전까지는 무언가에 계속 쫓기는 기분이라서 이런 내 상태를 자각할 수도 없었으니까.
‘다음에 한 번 여쭤봐야겠네.’
두두두두-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내 손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건 이거대로 신기한 기분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보통 글을 쓸 때면 무아지경에 빠진 것처럼 다른 생각이 파고들 틈이 전혀 없었으니까.
‘···근데 지금은 뭔가 달라.’
한동안 공장처럼 글을 찍어낸 여파일까. 마치 글을 쓰는 뇌와 생각하는 뇌가 따로 움직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글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강하게 활성화된 두뇌가 미친 듯이 아이디어를 뽑아냈다.
단순 카페인의 효과라기에는 지나치게 좋다. 마치 마약이라도 먹은 듯한 기분이랄까.
‘뭐, 비슷하긴 하지.’
여행하는 동안 하도 많이 쳐다봐서 그런지 지금도 눈앞에 강바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망막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 한구석에서는 당장이라도 1층으로 내려가 강바다를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으음···.”
타탓-
문득 타자를 치던 손이 멈췄다. 잠깐 내려가서 얼굴만 보고 올까.
휙휙-
간신히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냈다. 토라진 예나의 마음을 달래준다고 한참이나 고생했던 강바다를 괴롭히면 안 되겠지.
게다가 한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면, 언제 다시 일을 시작할 수 있을지 스스로도 장담할 수 없다.
‘지금은 한 글자라도 더 쓰자.’
이 신묘한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이. 나와 강바다, 그리고 예나까지. ‘우리 가족’의 이야기를 써내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그저 우리에게 벌어진 일과 나의 감상을 적어놓은 일기장에 불과하다만.
언젠가 쓸 일이 있을지도.
그런 직감이 들었다.
* * *
“오빠아아-!”
작업실 문을 열자 나를 발견한 예나가 얼른 뛰어왔다. 무릎을 굽히며 손을 활짝 벌리자 망설임 없이 품에 안겨드는 그녀.
“오빠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우웅.”
원래도 우리를 반겨주기는 했으나, 강바다와 둘이서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뭔가 더 격해진 느낌이었다.
돌아온 당일에는 어디를 가든 따라가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통에 달래주느라 애를 먹었다.
‘같이 또 여행 다녀와야겠다.’
비자 문제 때문에 해외여행은 어렵겠지만, 국내에도 좋은 관광명소가 많으니까.
최근에는 만화에 푹 빠진 모양이니, 코믹콘처럼 특별한 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도 괜찮겠지. 시간 내서 한번 찾아봐야겠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아, 태리구나.”
생각을 정리하던 그때 이태리가 말을 걸어왔다. 한창 작업하던 중이었는지 얼굴 여기저기에 물감이 잔뜩 묻은 모습.
예나도 비슷한 꼴인 걸 보면 평소처럼 공동 작업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호흡이 참 잘 맞는단 말이지.’
지난 몇 달간 예나와 이태리는 공동 작업을 계속해왔고, 이제는 서로를 떼어놓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뭘 하든 자매처럼 죽이 척척 맞아서 그런지 실력이 날로 일취월장해졌다. 최근에는 예나가 웹툰 작업까지 눈독 들이고 있다던가.
“그래, 별일 없지?”
“음···. 그게 말이죠.”
“응?”
평상시처럼 그냥 안부 삼아 던진 말인데, 뭔가 고민하듯 턱을 매만지는 이태리. 눈치를 보니 예나 쪽으로 자꾸만 시선이 간다.
무슨 의미인지 알아챈 나는 품에 안고 있던 예나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예나야, 오빠 잠깐 나갔다 올게.”
“예나도 같이.”
“화장실 가는 거야. 화장실.”
“······.”
지이잉-
예나가 정말이냐는 듯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나를 노려봤다. 새삼 표정이 참 다양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은 내색하지 않았다.
‘···바다 씨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퇴근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라 먼저 왔더니, 새삼 그녀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여기 있었으면 눈치껏 예나를 데리고 자리를 비워줬을 텐데.
똑똑-
그때 누군가 노크를 했다. 고개를 돌리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며 빼꼼히 고개를 들이미는 여성.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실례합니다. 잠시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오세요.”
밖에 새워둘 수도 없어서 일단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녀가 입은 옷을 보는 순간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보육원 선생님들에게 지급되는 연한 빨간색의 앞치마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로 오신 선생님인가 보네.’
최근 강태양과 강별의 지원으로 보육원 사정이 넉넉해지면서, 시설로 들어오는 아이들의 수가 크게 늘었다.
정식 절차를 밟고 들어오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예나의 소문을 듣고 구구절절한 사연과 함께 문 앞에 유기되는 아이들이 많아진 것이 원인.
우리 원장님께서는 최대한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셨고, 그러다 보니 아이들을 관리할 선생님이 부족해졌다.
‘원생이 거의 100명 가까이 된다고 했지?’
기존의 5배 이상으로 불어나 버린 원생을 원장님과 박미경 선생 둘이서 감당하는 것은 무리였으니. 이번 기회에 대규모 채용을 했다고.
박 선생님은 새롭게 고용된 요리사들과 함께 영양사 역할에만 전념하고, 아이들을 관리하는 선생님을 대폭 충원했다던데.
‘너무 어린 거 아닌가?’
눈앞의 김하영은 아무리 많이 쳐줘도 20대 초중반으로 밖의 보이지 않는 외모였다.
아직 앳된 티가 많이 나서 교복을 입혀 놓으면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
딱히 원장님의 눈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무래도 육아 경험이 있는 박 선생님에 비해서는 신뢰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처, 처음 뵙겠습니다. ‘김하영’이라고 합니다!”
그런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김하영이 대뜸 90도로 인사를 해왔다. 이에 당황한 나는 얼른 손을 내저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원장님께 무슨 말씀을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도···.”
“예나가 놀라니까 그만두세요.”
문득 옆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이태리가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김하영을 쏘아보고 있었다.
‘뭐지?’
거기서 나는 뭔가 기시감을 느꼈다.
이태리가 웹상에서 ‘순애짱’이라는 별명으로 활동할 때부터 특이한 성격인 건 유명했으나, 그게 결코 싸가지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실제로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독특하다는 느낌이었지, 남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모습은 전혀 상상이 안 갈 정도였으니.
“무슨 일로 오셨죠?”
“그게···. 이제 곧 저녁 시간이라 예나를 데리러 왔어요.”
“분명히 제가 데리고 간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작업 중에 들어오시면 방해된다고도 몇 번이나 설명해드렸고요.”
“그래도 밥은 제때 먹여야죠!”
“하아···.”
이태리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부여잡았다. 허나 어리숙하던 김하영 역시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한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대충 맥락을 보아하니 우리가 여행을 떠난 사이 줄곧 이 상태였던 모양인데.
“태리야, 아직 작업할 거 많이 남았어?”
“그건 아니지만···.”
“그럼 일단 밥부터 먹자.”
“으음. 사장님이 그러시다면야.”
이태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김하영은 고맙다는 듯 내게 고개를 숙이더니, 불쑥 예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예나야, 선생님하고 밥 먹으러 가자.”
“오빠는?”
“예나 먼저 밥 먹고 있을래? 오빠는 화장실만 들렀다 갈게.”
“우웅. 빨리 와! 언니도!”
“알았어.”
···어라?
이어진 예나의 행동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평소처럼 같이 가자고 조를 줄 알았던 그녀가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 심지어 김하영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서기까지.
낯을 많이 가리는 예나가 저렇게 덥석 다른 사람의 손을 붙잡다니. 김하영하고 지낸 지 기껏해야 일주일 정도밖에 안 됐을 텐데.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의문을 삼키는 사이, 이태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사뭇 심각하게 말을 꺼냈다. 그 모습에 덩달아 진지해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봐.”
“방금 나간 김하영 선생님 이야기에요. 아무리 봐도 저 사람 뭔가 좀 이상해요.”
“어떤 점이?”
“하아, 이걸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이태리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그녀가 이렇게 행동할 정도면 정말 심각한 문제겠지.
“혹시 예나가 관련된 거야?”
“맞아요.”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네. 그럼 일단 밥부터 먹고 오자. 바다 씨가 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겠어.”
“네, 그동안 저도 생각 정리 좀 해둘게요.”
“그래.”
머릿속에서 몇 가지 안 좋은 시나리오들이 떠올랐으나, 나는 애써 불안감을 삼키며 방을 나섰다.
.
.
.
꽤 많은 시간이 흐르고.
예나가 그림을 그리겠다며 작업실에 틀어박힌 동안. 나와 이태리, 퇴근한 강바다가 한 방에 모여 앉았다.
“우리 예나한테 계속 접근한다고요!?”
강바다의 톤이 한껏 높아졌다. 그녀는 전에 없이 사나운 표정이 되더니, 금방이라도 자리를 뛰쳐나갈 것처럼 몸을 부들거렸다.
“바다 씨, 일단 진정하고 이야기를 들어보죠.”
“···알겠어요.”
후우-
조심스럽게 손을 잡아주자, 강바다가 길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최근 예나에게 불순한 의도로 접근하는 사람이 워낙 많아서 다들 예민해진 상태였으니, 그녀의 행동을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확증도 없이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조심스럽기는 한데···. 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두 분의 의견을 듣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잘 생각했어. 뭐가 의심됐는지 말해 봐.”
“김하영 선생이 보육원에 온 건 일주일 전이었어요. 공교롭게도 두 분이 여행을 가신 당일 날이 첫 출근이었죠. 그날도 저는 예나랑 같이 작업을 하는 중이었는데···.”
강바다를 기다리는 동안 말할 내용을 정리를 해뒀는지, 김하영의 수상한 행동을 막힘없이 털어놓는 이태리.
“계속 예나를 따라다닌다고?”
“네. 물론 명목상으로는 김하영 선생님 관리 대상에 예나가 포함되어 있기는 한데요. 아무래도 좀 유명무실하잖아요?”
“그야 그렇지.”
예나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행동 양식이 전혀 다르니까.
하루의 대부분을 그림 그리는 데 투자할뿐더러, 주간에는 휴학한 이태리와 함께 지낸다.
저녁에는 나와 강바다가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므로, 정말 필수적인 커리큘럼이 아닌 이상 예외처럼 취급받는데.
“거기까지는 어떻게든 선생님의 열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근데 며칠 전에는 저희가 작업하는 걸 훔쳐보고 있지 뭐예요?”
“작업을 훔쳐봤다고?”
“그렇다니까요! 작업하다가 잠깐 쉴 겸 고개를 돌렸는데, 문틈 사이로 눈이 딱 마주친 거 있죠? 진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왜 그랬는지는 물어봤고?”
“자기 말로는 저녁 시간이 다 됐는데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없고, 뭔가 열중하는 것 같아서 말을 못 걸었다는데···.”
말끝을 흐리는 이태리.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그럴듯한 변명이라 그런 듯했다. 이태리도, 예나도 한번 집중하면 좀처럼 주변 소리를 못 들으니까.
“물론 그것뿐이면 제가 말을 안 했죠. 진짜는 이다음이에요!”
소름이 돋는다는 듯 자신의 팔을 한 차례 쓸어내린 이태리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