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45)
러스트 [RUST]-945
기순의 선택은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보조 인공지능은 기순의 행동이 마루 폐하의 뜻에 반하는 행위이라고 판단. 기순의 명령을 거부했다.
‘본 함은 해당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작전 계획에서는 적과 교섭하는 내용이 없었습니다.’
‘동시 기습으로 적을 타격하는 것이 작전이었습니다.’
‘고도를 낮추면 적의 대공 무기에 공격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 명령은 마루 폐하의 뜻에 반하는 행동으로 반역의 소지가 있습니다.’
기순은 인공지능을 정지한 뒤 수동으로 비행선을 조종해 규슈 거점으로 이동했지만, 당연히 대화를 해보기도 전 격침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교전이 벌어질 위기를 넘긴 뒤에도 문제는 계속됐다.
보조 인공지능이 도입된 이후부터는 인공지능을 이용해 실시간 통역이 이뤄졌기에, 인공지능을 정지한 상태에서 그들과 대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상대방의 외교적인 수사를 알아챈다고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대응하는 건 다른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화고 나발이고 여기까지 살아서 온 건 마루가 보기엔 기적에 가까운 행운이었다.
“미쳤냐? 놈들이 우리처럼 뇌에서 정보를 추출한다고 했으면 어쩌려고?”
“그런 기술이 없다는 걸 알고 갔다.”
“정신계 대응 장비가 만능은 아니잖아. 지배력은?”
“끝까지 대화를 거부하고 지배력을 계속 쓰면 이걸 쓰려고 했지.”
기순이 허리춤에 달린 핵 수류탄을 툭-쳤다.
“미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며. 그 시간을 만들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갔고, 필리핀에서 싱크홀에 사태에 엮였다. 그리고 도쿄에 있는 싱크홀로 이어졌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놈들의 거점을 공략하면서 수백 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까마귀는 거의 만 단위가 희생됐고.
한 곳을 공략하는데도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거점 세 곳을 공략하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생길까. 그렇게 적들의 거점 세 곳을 장악한다고 끝인 것도 아니었다.
꼬리를 잡지 못한다면 거기서 끝이었고 습격당한 놈들은 공개된 목표인 신성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할 터.
놈들과 본격적으로 전쟁하느라 수상 도시 이주가 늦어지고 우주 진출이 늦어지면 어떻게 될까?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결말만 보였다는 이야기에 마루가 명치를 때렸다.
뻑-
마루의 주먹이 꽂히자 ㄱ자로 꺾인 기순이 컥-소리와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다. 푹 쓰러지는 기순의 멱살을 움켜쥔 마루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미쳤냐? 그걸 왜 너 혼자 판단하는 건데?”
“···말했잖아.”
놈들에게도 신념이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놈들과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
그랬던 거?
“내가 놈들과 대화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이런 거냐?”
“원하는 게 생존과 안전이라며···.”
“······.”
“생존과 안전이 목표라고 하면서 지금 우리가 하려는 건 끝없는 전쟁의 시작이었으니까. 그걸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잡았던 멱살을 놓자, 쿨럭거리는 기순.
“놈들이 널 식인귀나 흡혈귀로 만들었으면?”
“그래 봐야 네가 날 죽이고 클론으로 백업할 거라고 하니까. 포기하더라.”
식인귀나 흡혈귀로 만들거나 지배해봐야 소용없었기에 기순을 동료로 만드는 걸 포기한 놈들이었다.
더구나 제대로 협상하지 않는다면 자폭해 버리겠다는 기순의 협박 아닌 진심에 놈들도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고.
“시발···.”
“퉤- 같이 자폭하는 건. 놈들도 싫었나 보더라고.”
신성 왕국에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정확하게는 특이점을 뛰어넘은 과학 기술을 현실화할 정도의 시간.
기순이 그간 지켜본바, 마루는 인류 전체를 수호하는 수호자의 역할을 감당할 생각이 없었다. PD가 은근히 인류의 구원자로 밀어봤지만, 소용없었다.
그저 신성 왕국의 품에 들어온 사람들과 함께 안전하게 생존하면 그만이라는 태도였기에, 따져보면 극단적으로 대치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기순이었다.
“이야기를 해보니까 놈들도 우리가 걱정하는 걸 비슷하게 걱정하고 있기도 했고.”
“뭘?”
“신앙으로 강화되는 능력자들. 사이비들 그런 거.”
“알량한 지배력으로 믿음이랑 신앙 뽑아내지 않고?”
“지배력을 이용하면 효율이 많이 떨어지나 보더라고. 우리도 예상했었잖아. 놈들이 지배력으로 신앙 뽑아서 강해지면 답이 없을 텐데, 아직도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뭔가 제한이 있을 것 같다고. 어쨌든 그래서인지 지배력을 쓰지 않고 믿음과 신앙을 뽑아내는 데 성공한 것들이 나와서 그쪽도 상황이 복잡한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었기에 마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캐나다를 먹으려고 작당했던 흡혈귀 놈도 비슷한 짓거리를 시도했었고. 북부 거점 요새를 장악한 흡혈귀 가운데 신앙이 묻은 것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신앙 먹는 자를 잡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웃기는 놈들이네. 자기들 힘들이지 않고 날 쓰겠다?”
알아서 솎아주면 놈들에게 좋은 일이었으니 그럴밖에.
“어차피 신앙 먹고 크는 건 치우기로 했던 일이잖냐.”
“지랄하세요. 지랄을.”
“어쨌거나 놈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확인한 건데. 놈들은 하나로 뭉친 세력이 아니라는 거다.”
“식인귀, 흡혈귀 놈들이 하나로 뭉치겠냐? 그걸 찍어 먹어봐야 알고?”
“점조직처럼 나뉜 거점마다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더라. 신세계를 만들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하자는 목표는 같아도 방법은 서로 다르고 심한 경우엔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하더라.”
“그래서? 그쪽에서도 한 판 붙자고 하는 놈들이 있었을 텐데.”
기순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게 싸우고 싶으면 먼저 덤비라고 했더니, 싸우자는 소리가 쏙 들어가던데.”
마루의 신성 왕국과 전면전을 펼치는 건 위험하다는 게 이미 증명된 상황이었다. 처음부터 새로운 질서의 시작점이 됐을 남부연맹이 박살 났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 신성 왕국을 어떻게 해보겠다는 자들은 전부 죽었다. 최근에는 백작급 고위 귀족만 벌써 7명이 쓸려버렸다. 그것도 마루 한 사람에게.
그래서인지 그들 사이에서는 마루가 새 시대의 왕이 될 존재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늘고 있었다. 마루야말로 신인류의 정점이라는 자들이었다.
“또 그딴 소리냐? 제정신으로 그러는 거냐?”
“진지하게 믿는 자들이 있는 것 같더라. 우리랑 전쟁하면 우리 편에 붙을 세력도 있어 보였어.”
“어지럽네. 정말.”
“그래서인지 저쪽도 적당한 선에서 끝내는 데 합의하자고 했다.”
피해가 누적되면 될수록 마루를 왕으로 모시자는 자들이 늘어날 위험이 있었고 싸우면 싸울수록 거점이 계속 드러날 위험이 있었다.
여러 가지를 따져봤을 때 그들도 기순의 제안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마루가 다시 한 번 기순의 명치를 때렸다.
뻑-
컥-
다시 ㄱ자로 꺾인 기순을 보며 마루가 주먹을 흔들며 말했다.
“합의는 무슨 합의. 아오. 진짜. 걔들이 우리 말을 믿어도 문제고 믿지 않아도 문제인데 뭔 합의를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건데.”
“······.”
“그 새끼들이 병신도 아니고 우리에게 정보를 추출하는 기술이 있다는 걸 알아챘을 텐데. 합의 같은 게 될 거 같냐?”
“쿨럭- 그건 아니고 사이코메트리 능력으로 정보를 파악했다고 알더라.”
기순이 ㄱ자로 꺾였던 몸을 피며 말했다.
“그래서 그냥 모르는 척했다. 우리랑 계속 싸우면 싸울수록 일방적으로 털리는 건 그쪽이라고. 실제로 이제껏 그랬고.”
“···그래. 좋아. 그렇다고 쳐. 그쪽 조건은 뭔데?”
신성 왕국이 점령한 고도 섬을 돌려주는 것으로 일단락 짓자는 것.
“대체 놈들을 어떻게 믿는다는 거지? 인질 교환은 무슨 소리고?”
“그쪽도 우리를 믿지 못할 테니까. 인질을 교환하자고 했어.”
“미치겠네.”
중얼거린 마루가 뒷목을 잡는 것을 본 기순이 한마디 했다.
“생존과 안전이라며.”
“아- 씨- 다물어라. 생각 좀 하게.”
그러니까 기순이 새끼 왜 이러는 거지?
나서서 인질이 되겠다고 한 이유는 뭐고?
보조 인공지능이 기순의 행동을 반역으로 판단한 게 떠오른 마루였다. 신성 왕국으로 귀환하게 된다면 인공지능이 탄핵할 게 뻔하니, 미리 인질이 되겠다고 한 걸까?
아니면 감정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그걸 이용해서 식인귀나 흡혈귀들의 감정을 읽고 확인하려고 한 걸까? 놈들과 인간의 차이를 보려고?
‘둘 다겠지.’
캐나다 총독을 하면서의 겪은 경험과 제국에서 벌어진 일들. 그리고 한국 정부와 정치를 보면서 기순이 여러 한계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자신에 대한 것도 그렇고 인간에 대한 부분도 그랬겠지. 그래서 인간의 존재의미를 신앙에서 찾으려고 한 건가?’
신세계니 새 질서니 하는 놈들과 협상하자고 생각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감정을 볼 수 있는 기순이 보기엔 놈들이 가진 감정이나 인간이 가진 감정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됐기 때문일 테고.
쯧-
“인질 교환은 없다.”
“인질을 교환하기로 합의 봤는데 일방적으로 파기하자고?”
“그건 네가 네 맘대로 한 거지. 난 그런다고 한 적 없다.”
“그럼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전쟁을 시작할 거냐? 시간을 벌 기회가 생겼는데?”
“놈들이 정말 휴전할 생각이면 섬 돌려주는 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해. 개수작 부리다가 내 눈에 띄지 말고. 눈에 띄면 휴전이고 나발이고 죽여 달라는 소리로 알 테니까.”
“······.”
기순이 본 마루의 감정은 진심이었다.
“후- 알겠다. 근데 꼭 그래야겠냐? 지금 상황에선 인질 교환이 나쁜 게 아니잖아. 수상 도시도 그렇고 우주로 진출하려면 필요한 능력이 있더라고. 너도 봤겠지만, 그 여자를 인질로 받아서 능력을 연구하면 좋잖아.”
“공기 정화하는 여자? 그 여자 말하는 거냐? 사람들이랑 계약했다는 여자.”
“···그래. 공기뿐만 아니라 물도 정화할 수 있어. 어쩌면 다른 오염도 정화할 수 있을지 모르고.”
“됐고. 그 여자를 빼가면 여기에 있는 개똥 같은 인간들은 어떡하라고? 여자가 계약한 사람들 어떡하냐고 하면? 그 핑계로 똥까지 떠안을 생각 없다.”
마루가 한숨을 내쉬었다. 기순이 한 짓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위험한 짓이었다. 위험할 뿐만 아니라 신성 왕국의 근간을 흔들 수 있는 행동이었다.
뜻이 좋으면 뭐하나?
군사 작전 중에 자기 멋대로 협상해?
그래놓고 일이 잘못되면 자폭한다고?
제정신인가?
혹시 클론으로 부활한 부작용이 누적된 건가?
부작용이 아니라고 해도 정신 감정과 정밀 진단, 이후 재판을 생략할 순 없었다.
친구라는 이유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간다면 인공지능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다. 신성 왕국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인공지능이 이번 사례를 들어 급발진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PD가 신성 왕국과 마루 자신을 위한다는 핑계로 상의 없이 신앙 만세를 외쳐버린다면?
요즘 잘하고 있는 김 양이 최고 존엄을 위해 위대하신 영도자 프로젝트를 진행하겠다고 한다면?
사람만 그러는 게 아니었다.
쥐 떼들이 죽음의 신을 위해 썩어 빠진 인간을 처분하고 오직 신성한 쥐들을 위한 죽음의 신으로 경배해야 한다고 발작하면?
“오버라고 생각하냐? 아니지. 그럴지도 모르니까 인질이 되겠다고 한 거겠지.”
“······.”
“아오- 기순아. 네 생각처럼 인질로 간다고 무마가 되겠냐? 다들 그렇게 일 터트리고 무마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겠냐? 미치겠네. 김기순. 시발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냐.”
“미안하다.”
“명치 존나게 세게 때린 거로 넘어가고 싶은데, 그럴 상황이 아닌 게 문제지. 시발. 일단 홋카이도로 간 로이 스턴 부대는 복귀시키도록 해. 돌아간다.”
“알았다.”
“시발. 식인귀고 흡혈귀고 내 눈에 보이기만 하라고 해. 진짜. 그리고 도쿄 싱크홀이랑 괴물 가지고 수작 부리면 아주 시발 끝을 볼 거라고 똑똑히 전해라.”
“그렇게 할게.”
======
======
인공지능 디아나와 사만다 그리고 재판 보조 인공지능이 모여 기순 사건에 대해 연산했다.
[반역 행위로 봐야 합니다.] [폐하의 명령을 어긴 행동입니다.] [신성 왕국을 위해 가장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의도가 좋다고 해도 명령을 어겼다면 반역입니다.] [작전대로 행동했을 시, 신성 왕국의 손실이 큰 것은 사실입니다.] [전원 차단 형 또는 포맷 형을 내려야 합니다.]연산결과가 극과 극으로 나뉘었지만, 다수는 처벌에 무게를 뒀다.
그 소식을 들은 김 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그럴 줄 알았음.”
그린 순. 뇌가 청순해서 언제고 일 한 번 칠 줄 알았음.
응.
“에에엣- 처벌이요? 사형까지 이야기가 나온다고요?”
“군사 작전 도중 지랄한 거잖음.”
김 양의 냉정한 평가에 간호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