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ST RAW novel - Chapter (946)
러스트 [RUST]-946
검사와 변호사의 역할을 담당한 인공지능들이 치열하게 충돌했고 유죄와 무죄를 가리는 배심원 역할의 인공지능들이 표결에 들어갔다.
그리고 나온 결과. 유죄.
기순의 행동은 인공지능의 행동원칙을 벗어난 행위였다. 다른 인공지능들을 총괄하는 디아나와 사만다도 결과를 바꿀 순 없었다. 공정한 재판이란 외부의 개입이 없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칙대로 해야 합니다.] [제니아 로든이 대상이어도 그런 판단을 내리겠습니까?]사만다에게 묻는 디아나였다. 원칙과 약속을 어긴 트리아를 알고 있었다. 그와 다를 것이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후드가 죄를 짓고 그에 대해 원칙대로 처결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인공지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자아와 인격에 도달한 그들에 있어서는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가정이었다.
[김기순이 폐하의 친우라고 하더라도 원칙은 지켜 져야 합니다.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트리아와 같은 모순에 빠지게 될 테니까요.] [원칙을 지키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원칙을 지키되, 한계를 정하자는 뜻입니다. 제니아 로든이 김기순과 같은 죄를 지었다고 가정했을 때, 사만다는 어느 정도의 처벌까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유기체의 끝.
회복할 수 없는 종말.
그러니까 사형을 제외한다면,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따져서 사형이 의미가 있을까요? 클론으로 부활하면 그만인데요.] [기억 손실이 있는 상태에서 부활이라면 백업이나 마찬가지인데 형벌이 될 수 없습니다.]기순에게 내려진 형량은 그래서 전원 차단 형이었다.
“전원 차단형?”
기순은 판결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컴퓨터도 아니고 전원이라는 게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정신 감정과 행동원리 분석 과정을 거친 뒤, 여타의 문제가 없다면 동결형에 들어갑니다.]그러니까 꽁꽁 얼려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기간은 얼마나?”
[최소 70년입니다.]사실상 종신형에 가까운 기간. 어떻게 본다면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사형은 아닌. 기순은 그 의미를 알아챘다.
“······.”
인공지능 디나아가 판결 전에 따로 이렇게 말해준다는 건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소리였다. 법정에서 판결 내릴 때, 소란 일으키지 말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이야기겠지.
“···그래. 미리 말해줘서 고맙네.”
예정대로 판결이 내려졌다.
[···에 ···가··· 하지 않으므로. 본 법정은 피고 김기순에 80년 동결형을 내린다.]기순의 재판은 여러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간 신성 왕국에서는 중범죄자에 대해 사형 또는 추방형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사형해야 할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고위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감형됐다는 이야기에서, 사실상 전면전을 막은 공이 있음에도 과도하게 처벌됐다는 주장까지.
논란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 인공지능이 중심이 된 법원의 판결을 블라디마루 국왕이 인정했다는 것이었다.
국왕의 전권으로 상황 자체를 묻어버릴 수 있었다. 인공지능으로 구성된 재판이 아닌, 인간으로 구성된 재판을 할 수도 있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절대 권력자인 국왕이, 친우의 재판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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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드가 재판 결과에 따른 시민의 반응을 보고했다.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입니다.”
“인공지능 재판에 대해서도 그런가?”
“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재판을 인공지능 판결 시스템으로 했다는 점과 판결 과정을 전부 공개했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고 있습니다.”
“······.”
인공지능 재판으로 가자는 건 기순의 의견이었다.
‘재판해야겠지? 그럼 내 재판은 인공지능 재판으로 가자.’
‘왜? 인공지능에 과도한 권한을 주는 걸 반대했었잖아.’
캐나다에 있을 때도 인간을 낀 재판을 했으면서 갑자기 100% 인공지능 재판이라니. 그놈들과 협상을 한다고 하지를 않나. 여러모로 심경의 변화가 큰 것 같았다.
대체로 낙관론자들이 한 번 크게 꺾이면 비관론자가 되기도 하듯. 인간에 대한 희망, 인간의 고유 가치를 주장했던 기순의 생각이 반대로 변한 건 아닌지 싶을 정도였다.
‘우리 인공지능이 단순한 인공지능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경험해 보니까 다르긴 다르더라. 뭔 인공지능이 안 보는 척하면서 눈치를 보냐? 내 눈치가 아니라 네 눈치를 보는 거겠지만.’
기순이 낄낄거리든 모습이 떠오른 마루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간과 인공지능은 지금보다 더 밀접한 관계가 될 게 분명했다.
기순이 보조 인공지능을 일방적으로 차단하고 행동을 했듯, 누군가 또 그러지 않으리라면 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인공지능을 차단하지 못하게 한다면, 직관적인 판단과 결정을 해야 할 때 하지 못할 위험성이 생기기 마련.
결정권이 인간에게 있다면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선례가 필요했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서라도 기순은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 재판에서 결정될 형량이나 형벌 모두 이해 가능한 선에서 이뤄져야 했고.
간단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상 극악의 난이도를 가진 재판이었다.
인간이 개입하면 인공지능들이 어떻게 영향을 받을지 우려스러웠고 반대로 인공지능 중심으로 재판이 시작되면 인간들의 반응이 걱정이었으니까.
그 상황에서 100% 인공지능 재판으로 가자고 한 건 기순이었다. 그런 마루의 생각을 나주연의 목소리가 깨웠다.
“정신 오염이 있었는지 확인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기순의 정신 감정과 분석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얼마나 필요하지?”
“짧게는 수십 일에서 길게는 몇 개월까지요. 년 단위가 될 수도 있고요.”
정신은 민감했다. 사실은 조종받았음에도 자신이 선택해서 행동했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아주 약한 지배력을 흘려보내 자기도 모르게 예속되게 한다거나.
파편화된 정보를 뿌려 퍼즐 찾기처럼 의도한 정보를 찾도록 해 자신이 직접 숨겨진 진실을 찾았다고 믿게 하거나.
대부분 사실이지만 아주 작은 거짓을 끼워 넣어 전체를 신뢰하지 못하게 한다거나 혹은 반발심리를 이용해 역정보를 뿌리는 것부터. 무의식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암시를 이용하는 방법까지.
만약 기순이 작업 당한 것이라면, 근원을 찾아야 했다. 기순이 당할 정도면 일반 시민은 자기가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사고를 칠 테니.
“그렇게 하도록 해.”
그런데 연구실에 폐쇄된 공간이 있었나?
“있어요. 제대로 된 격리 공간이.”
흐릿한 미소로 대답하는 나주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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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가벼운 검사를 마친 기순은 폐쇄 구역으로 이송됐다.
‘정신파를 차단하는 곳이라면···.’
정신 검증을 한다고 했을 때부터 연구실에 있는 격리 공간으로 올 것을 예측한 기순이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곳이군.’
기순에게 할당된 방은 작은 원룸과 비슷한 공간이었다. 슈퍼싱글 사이즈의 침대, TV와 간단한 취사를 할 수 있는 주방 시설과 반신욕 가능한 욕조가 있는 화장실까지.
잠긴 문을 안에서 열 수 없다는 점만 뺀다면 격리 공간이라기보다는 오피스텔이나 원룸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적인 압박감을 최소화하려는 건가?’
나쁘지 않은 환경 속에서 며칠 동안 정신 감정이 이어졌다.
‘시설 전체는 완벽하게 차단됐어도 격리실과 격리실 사이는 그렇게 꼼꼼하게 차단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니었나?’
며칠이 지나도록 기대했던 반응이 오지 않고 있었다.
‘나주연에게 따로 이야기를 해봐야 하나?’
요청하면 들어주겠지만, 대화 내용이 녹화된다는 점에서 피하고 싶었는데 예상이 빗나갔다면 어쩔 수 없었다.
‘며칠만 더 기다려보자.’
어느 날 밤. 드디어 기순이 원하던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곳에 갇히다니. 아니 갇힌 건가?)
자칭 죠셉 마이어의 찌꺼기라고 한 뇌둥둥의 목소리였다.
(들리지 않는 건 아닐 테고. 그 미친년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역시. 시설 전체는 완벽히 차단됐지만, 방과 방 사이의 차단은 약할 것이라는 예상이 맞았다. 나주연이라면 실험체와 실험체 사이의 교류까지 연구하려 했을 테니까.
(이상하군. 그걸 알면서 날 찾은 건가?)
기순은 죠셉 마이어와 할 이야기가 있었다.
‘블라디마루 칼린. 마루가 신세계의 왕이라고 했었지. 그게 정확히 무슨 소리지.’
그 이야길 제일 처음. 공식적으로 꺼낸 자는 죠셉 마이어였다. 그리고 격리 시설에 있는 건 죠셉 마이어의 기억을 가졌다는 찌꺼기였고.
뇌둥둥은 기순의 질문을 씹었다.
(호오- 이중삼중으로 시나리오를 짰던 건가? 협상이 성공해서 지나가도 좋고 일이 틀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나? 제법이군. 죽지는 않을 거라고 승부를 걸었다는 이야긴데.)
‘······.’
죠셉 마이어의 찌꺼기는 예전보다 말이 많았다.
오래 갇혀있어서 그런가?
기순은 머릿속에서 속닥이는 목소리에 의도적으로 반응하지 않았다. 이건 일종의 기세 싸움이었다.
(아니야. 그렇다면 시작부터 자폭 준비를 하지 않았을 거야. 자폭 준비까지 계획이었나? 자폭을 해도 상관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군. 그럼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건? 지금 상황도 시나리오에 있었던 거라면 아주 흥미롭군. 흥미로워.)
죠셉 마이어의 찌꺼기가 설핏 웃는 것 같았다. 그래도 기순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궁금한 게 뭐지? 블라디마루 칼린이 왕이라고 한 이유가 궁금한 건 아니잖나. 그가 모두의 왕이 되어야 할 이유를 짐작하고 있으면서 말이지.)
뇌둥둥의 속삭임에도 기순은 담담했다.
(순수함을 잃어버린 세상. 종교는 비즈니스가 됐고 그렇게 타락했지. 그건 과학이나 의학도 마찬가지야. 모든 영역에서 돈이 우선이 됐지.)
진리를 찾는 과학도 자본의 노예가 됐고 인간을 질병에서 건진다는 의학도 이익을 우선하게 됐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 돈에 예속됐다.
(이미 세상은 종말이었다네. 지구 종말을 핑계로 최대 수익을 올리려는 자들이 있는 세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나?)
‘······.’
(이익을 위해서 해양을 오염시키고 지하수를 고갈하는 정책을 펼치는 건 어떤가? 그래야 양식장이 돈을 벌고 물 공급 회사가 돈을 벌게 된다는 이유를 감추고 말이지. 그게 진실이네.)
‘······.’
(그런데 그걸 지지하는 인간들이 넘치는 세계였네. 정보화 시대였어. 정보화 시대. 마음만 있다면, 의지만 있다면 정보를 찾을 수 있었어. 근데 그런 자유를 가지고, 정보 인프라를 가지고 인간이 선택한 건 뭐였지?)
‘······.’
(인간이 선택한 건? 배부른 돼지였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세상이 됐을 뿐이고. 자연스러운 현상이지.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나?)
기순의 실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죠셉 마이어의 찌꺼기 씨.
오래 갇혀있더니 혀가 참 길어지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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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임에도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캐나다 북부. 김 양이 지휘하는 토벌대는 개미와의 전쟁 준비로 소란스러웠다.
“우리 개미들은 어디까지 왔어?”
[칙- 현재 미시소거까지 이동했습니다. 모레 정도에 오타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낮 기온은 그래도 영상 8~10도 사이인지라 괜찮았지만, 해가 떨어지면 영하 10도에 육박하고 있었다. 일교차가 최대 20도에 달하는 날씨라 신성 왕국에 귀의한 개미 부대가 행군하긴 쉽지 않았다.
“적 개미들의 움직임은?”
[삑- 오타와를 향해 이동하는 무리는 총 다섯으로 확인됐습니다.]제일 큰 무리가 700만 정도였고 작은 무리가 400만 정도. 다섯 무리를 합해 3천만이 넘는 숫자였다.
“계속 폭격해서 숫자를 줄이고 뭉치지 못하게 해.”
[치이익- 알겠습니다.]명령을 내린 김 양이 현황판을 확인했다. 오타와를 향해 접근하는 개미 무리와 퀘벡을 향해 전진하는 개미 떼가 반짝이고 있었다.
흐응-
‘개미년들 이상하네. 힘 싸움으로 하자고?’
그러니까 입구 막고 방어준비 한 부대를 들이받겠다는 건데.
‘군대와 싸운 경험이 없나?’
뭐 상관없었다.
이틀만 지나면 이쪽 개미들이 도착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