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struck a jackpot after a marriage RAW novel - Chapter 87
087 피는 물보다 진하다
“태리야, 예나 좀 부탁할게.”
우리는 뒤늦게 들어온 이태리에게 예나를 맡기고, 김하영과 함께 구석진 방으로 향했다.
우리를 마주하게 된 김하영은 계속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일단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겠지.
“선생님, 일단 진정···.”
“예나랑 무슨 관계예요?”
“바, 바다 씨!?”
나는 당황해서 순간 말을 더듬었다. 설마 강바다가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거라고는 생각 못 했기 때문이다.
평소 배려심 넘치는 그녀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당황스러운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김하영이 딸꾹직을 하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히, 히끅-! 저, 저는 그냥 선생님인데···.”
“김하영. 25세. 부모님은 어린 시절에 모두 돌아가셨고. 자립할 때까지 희망 보육원에서 의탁 생활을 하셨군요.”
“그걸 어떻게!?”
“우수한 성적이었으나 돌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보육원에서도 나가셨네요. 1년 후 돌아와서 검정고시와 수능을 치르고, 기숙사 포함 전액 장학금을 지원해주는 곳으로 하향지원. 제가 말한 것 중에 틀린 부분 있나요?”
“······.”
김하영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이 전부 거짓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나운 맹수의 눈이었다.
허나 강바다는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며 상대를 마주했다.
‘한동안 바빠 보이더라니.’
그동안 뒷조사를 했던 모양이다. 나도 직접 당해본 사람인지라, 당황스러운 김하영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며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역시 그랬나.’
조금 전 정보를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하자. 그동안 김하영을 보면서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알면서도 강바다에게 모든 역할을 떠넘기는 건 남편 실격이다. 여기서는 내가 나서야겠지.
“김하영 씨는 예나의 친모이신가요?”
“······!!”
정곡을 찔렀는지 김하영이 두 눈을 크게 떴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녀는 짐짓 차분한 표정을 연기하며 입을 열었다.
“···터무니없는 오해예요. 전 그냥 선생님으로서 예나를 아낀 것뿐이니까요. 여러분께 오해 살만한 행동을 해서 죄송합니다.”
꾸벅-
김하영이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비록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그녀의 몸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것쯤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고개 드세요. 사과받으려던 게 아닙니다.”
“하늘 씨 말이 맞아요. 대화를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요. 그러니 일단 진정하세요.”
“···네.”
김하영은 간신히 몸을 추스르며 의자에 앉았다. 다만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꼼지락거리는 걸 보면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듯했다.
강바다도 그를 모를 리 없지만, 오늘 마무리를 짓기로 작정한 듯 다시금 직구를 던졌다.
“다시 한번 여쭤볼게요. 김하영 씨는 예나의 친모이신가요?”
“아니요.”
이번에는 김하영도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차분하고 또렷한 눈으로 강바다를 마주 보았다.
1초.
2초.
3초.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두 사람은 여전히 시선을 마주한 채로 말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듯했기에 내가 먼저 포문을 열었다.
“김하영 선생님.”
“네?”
“듣기로는 이성분과 함께 나눈 반지를 가지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에게도 한번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싫어요. 그걸 제가 왜 보여줘야 하죠?”
단칼에 거절하는 김하영.
그녀는 절대로 반지를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제 손을 가렸다. 허나 그 행동이 무엇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예나가 처음 보육원에 들어왔을 때 몸에 지니고 있던 금반지. 지금은 목걸이로 만들어 차고 다니는 그것과 모양이 똑같을 테니까.
‘···난감하게 됐네.’
강바다의 정보력으로도 찾을 수 없던 친모가 이 타이밍에 등장할 줄이야.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하긴 그렇게 떠들썩했으니.’
기자들이 피카소의 환생이라면서 허구한 날 예나를 치켜세웠고, 동화책도 출간 이후 한 번도 베스트셀러 1위를 놓친 적이 없으니.
‘게다가 예나는 사연도 잘 알려졌으니까.’
집요한 기자들에 의해 파헤쳐진 사연.
강별은 기왕 이렇게 된 거 적극적으로 예나의 사연을 이용하자고 주장했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이름값이 중요하다던가.
덕분에 이 감동적인 사연은 각종 SNS로 퍼져 나가며 감동의 물결을 일으켰다.
과장 조금 보태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우리 가족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지.
‘애초에 예나라는 이름도 김하영이 지은 거고.’
금반지와 함께 들어있던 쪽지에 ‘예나’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들었다. 이쯤 되면 김하영이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설마 재판이 늦어진 것도 그 이유인가?’
그동안은 아무런 힌트가 없었으나, 만약 김하영도 예나를 찾고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한 그룹의 정보력은 어렵지 않게 김하영을 찾아냈을 것이고, 법원은 친모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하기 위해 판단을 보류했겠지.
‘···이것 참 골치 아프네.’
까놓고 말해서 김하영이 예나의 돈을 노리고 찾아온 것이었다면 오히려 편했을 것이다. 뒤에서 조용히 처리하면 되니까.
허나 김하영의 목적이 돈이 아니라는 것은 잠깐 지켜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냥 지켜보고 싶었던 거야.’
예나가 어떻게 사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
웃는 모습은 어떤지.
낳자마자 품에서 떠나보내야 했던 부채감 때문에 섣불리 다가서지는 못하지만, 친모로서 최대한 예나를 눈에 담아두고 싶었겠지.
‘친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 우리 때문이고.’
조금 더 정확히는 예나에게 좋은 환경을 주고 싶은 마음이라고 해야 할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자신이 엄마라고 주장하고 싶겠지만. 그녀는 현실이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 있다.
미술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지, 예나의 재능을 꽃피우기 위해 가장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지.
그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 친모라는 것을 부정해가면서까지 우리 두 사람에게 예나를 맡기려는 거다.
‘···참 잔인한 문제네.’
지금 내가 가진 재력이라면 얼마든지 김하영을 지원해줄 수 있다. 그녀가 예나와 함께 가정을 꾸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나도 사람이야.’
입양을 결정한 것은 결코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다. 나는 정말 예나를 친딸처럼 생각하고 있다. 이건 강바다도 마찬가지일 터.
예나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는 것이 썩 내키지 않았다. 설령 그게 인도적으로 더 올바른 선택이라고 할지라도.
“다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원장님?”
뒤를 돌아보자 보육원 원장인 김성령이 서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우리 앞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았다.
“식기 전에 들 거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은 원장님이 차를 권했고, 모두는 조용히 말없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따뜻한 차가 마음을 달래면서 살얼음판 같았던 분위기가 한층 훈훈해졌다.
원장님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우리 모두를 바라보다가, 대뜸 강바다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셨다.
“먼저 너희에게 사과하마.”
“···원장님!”
김하영이 얼른 그녀를 일으켰다.
반면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던 우리는 침묵을 삼켰다. 예상했던 대로 원장님은 김하영의 정체를 알고 계셨던 모양.
동시에 김하영이 예나의 친모임을 인정하는 말이기도 했다. 나는 차의 씁쓸한 뒷맛을 삼키며 말을 받았다.
“왜 미리 말씀해주지 않으셨습니까?”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으니까. 예나에게도, 너희에게도. 곧 새로운 가정을 꾸릴 너희에게 구태여 무거운 짐을 얹어주고 싶지는 않았단다.”
“원장님은 잘못 없으세요. 제가 욕심을 부린 탓인 걸요. 약속대로라면 두 분이 오시기 전에 떠났어야 했는데···.”
김하영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여행 기간에만 잠시 예나를 지켜보다가 조용히 사라질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원장님을 울먹이기 시작하는 김하영을 토닥이며 자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육원장을 맡은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아이들을 내 품에서 떠나보내는 게 쉽지 않단다. 하물며 친모는 어떻겠니.”
“흐윽. 그래도···. 죄송합니다아···. 이러고 싶었던 게 아닌데. 정말 아닌데···.”
결국 눈물을 쏟아내는 김하영. 와중에도 어떻게든 삼키려는 듯한 울음소리였으나, 한번 무너진 눈물샘은 좀처럼 멈출 줄을 몰랐다.
나는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그동안 수많은 경험을 했던 나로서도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으니.
스윽-
그때 문득 강바다가 내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얼굴은 처음과 다를 바 없이 평온했으나, 맞닿은 피부를 통해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잠시 저희끼리 대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원장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강바다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그녀도 구태여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후 빈방을 찾아 들어오니 깊은 적막감이 우리를 감쌌다. 강바다를 바라보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제야 그녀의 표정이 무너져 내렸다. 강바다는 촉촉한 눈으로 내 품에 안겨들었다.
“하늘 씨. 저 이제 어떡해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
“하영 씨가 제발 나쁜 사람이길 바랐어요. 실장님께 조사를 맡기면서 뭐라도 하나 나와주길 바랐어요. 근데 알면 알수록 오히려 불쌍해져서···.”
토닥토닥-
나는 조용히 강바다를 위로해줬다. 지금은 백 마디 말보다 묵묵한 위로가 더 와닿는 법이니까.
그러자 강바다는 조금 전 김하영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마음속에 쌓여있던 말을 마음껏 쏟아내기 시작했다.
“오늘 엄청 독한 마음 먹고 온 건데. 내가 엄마라고 말하려 했는데. 저 눈을 보면 도무지 그런 말이 나오질 않아요.”
“눈이 예나랑 많이 닮았죠.”
“···응.”
김하영과 예나는 유전자가 이어진 모녀답게 생김새가 비슷했다. 아마 예나의 젖살이 빠지면 거의 판박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특히 눈이 닮았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 기뻐하는 그 순진무구한 눈이 영락없는 모녀임을 알려준다. 나도 거기서 가장 큰 위화감을 느꼈으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가.’
예나도 본능적으로 그걸 느낀 건지 김하영을 대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었다.
물론 지금이야 우리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으니 친밀도가 다르긴 하다만, 그거야 시간이 얼마든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
‘후우···. 담배 땡기네.’
전역하고는 완전히 끊었는데. 그만큼 내 머릿속이 복잡하다는 의미겠지.
똑똑!
그때 문득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강바다를 조심스럽게 떼어놓은 후 문을 열었다.
“두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탱탱 부은 김하영. 그녀는 무언가 굳게 다짐한 듯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