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 family's escort warrior RAW novel - Chapter 310
310. 이제 다 끝난 모양입니다.2017.10.20.
차차차창!
순간, 박살 나는 창문을 통해 왕부 호위무사 여섯이 들이닥쳤다.
그중 둘은 침입자의 존재를 발견하곤 재차 몸을 날리려다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헉!”
기도가 예사롭지 않은 낯선 사내. 그리고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놋쇠 구.
그들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주춤하는 사이.
“칫!”
콰각!
묵객은 눈앞의 폭굉을 뒤로하고 벽을 부수며 뛰쳐나갔다. 그러기가 무섭게.
패애애애액.
날카로운 비수 하나가 날아들며, 놋쇠 구의 옆면을 관통했다.
콰아아아아앙!
강렬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태화전이 전각째로 날아가 버렸다.
*
갈가리 터져 나가는 전각을 보며 능시걸이 끄덕였다.
“묵객이 잘 처리해 줬군.”
삭. 삭.
그는 태화전 주위에 개방 고수들을 배치하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맹주가 무영대와 함께 자금성으로 향하는 사이, 개방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태화전으로 향했다.
황성의 군사 지휘권을 잡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오왕이다. 그가 군병을 모아 저항한다면 군민 합쳐 수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날 터.
덕분에 거지들이 황궁이라는, 생소한 환경에 뛰어드는 일까지 왔다.
왕부 호위무사들이 몰려 있는 태화전. 여기에 오왕이 있음은 당연할 터.
“방주님!”
장로 하나가 급히 다가와 수신호를 보냈다. 능시걸의 눈매가 좁혀졌다.
운이 좋은 것인지, 박살 난 태화전 뒤편으로 두 사람이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 것이다.
영민왕과 팽석진이었다.
“저들이다!”
능시걸이 고함지름과 동시에.
“적이다!”
“저기에 있다!”
마당에서 우왕좌왕하던 수백의 호위무사들이 개방도들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한데 달려오는 무사 중 몇몇에게서 강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제길, 신마들도 섞여 있군.”
능시걸이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신법이 빠르고 몸놀림이 음산하다. 아무래도 은자림은 왕부 호위무사들 사이에도 자기네 사람을 심어 놓은 듯했다.
“가자! 오랜만에 악적들 소탕이다!”
능시걸이 외치며 손에 내공을 끌어 올렸다.
옆에 있던 개방 정예고수 십오 조가 깔끔하게 갈아입은 새 옷 차림으로 달려 나갔다.
*
“전하, 괜찮으십니까?”
팽석진은 뛰쳐나오자마자 영민왕을 살폈다.
“쿨럭쿨럭.”
묵객과 소녀의 신경전을 유도하고 뛰쳐나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하필 태화전을 빠져나오는 순간 폭굉의 충격파가 덮쳐왔다.
팽석진은 반사적으로 내력을 올려 몸을 보호했지만, 간단한 호신술 정도나 배워 온 오왕은 그 충격에 심한 내상을 입었다.
“이까짓 것……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어디로?”
“일단 서문으로 향하겠습니다. 그쪽에는 아직 우리 사람이 있을 겁니다.”
팽석진의 판단은 기민했다.
북문은 황제가 적수담에서 환궁하는 차이니 호랑이 소굴이나 다름없다.
남문은 일왕이 잡고 있으니 역시 위험하다.
그리고 동문은 동이 터 오는 쪽이니 약간이나마 더 가능성 있는 쪽은 서문일 터.
“가세!”
비틀비틀!
팽석진의 부축을 받은 오왕이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두 사람의 발걸음은 곧 멈추고 말았다.
처억.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는 듯 걸어 나오는 사내.
팽석진은 그 얼굴을 보고 안면이 굳었다.
“가운이?”
“예. 접니다, 숙부.”
팽가운.
생각지도 못한 자리에서 조카이자 가문의 새 가주가 된 인물과 마주쳤다.
“왜 하필 여기서 마주치느냐…….”
“누군가. 저자는?”
팽석진이 탄식하자 영민왕까지 얼굴이 굳었다.
한시라도 바삐 빠져나가야 하거늘, 어째 쉽게 지나갈 수 없을 것 같은 까닭이다.
채채채채챙!
뒤에서는 격렬하게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컥!”
콰아아아앙!
거기다 무시무시한 충격음.
나름대로 일당백의 왕부 호위무사들이나, 무림 고수들의 진격을 막아 내기에는 힘에 벅차 보였다.
“전하, 그만 내려놓으시지요.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팽가운이 괴로운 한숨을 쉬며 고개 저었다.
그리고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팽석진을 보았다.
“숙부, 대체 왜 이러셨습니까. 앞으로 본가가 강호 동도들 앞에 어찌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습니까.”
“…….”
이제껏 끝도 없이 이어진 의문의 사건들.
거기에 다름 아닌 자신의 본가가 엮여 있었다.
처음 장씨세가와 석가장 사이에 시작된 작은 이권 다툼이, 어느새 하북의 자랑 팽가까지 휘말리게 하더니, 급기야 역모라는 대역죄에까지 엮였다.
이젠 어디 가서 말하기 힘들 정도로 자괴감에 휩싸인 표정이었다.
“숙부께서 권력을 탐하셨던 건 굳이 탓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하필이면 은자림이어야 했습니까? 강호의 수많은 협사들을 죽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민초들마저 몰아넣고, 이 나라 전역을 도탄에 빠트렸던 그들을 어찌 허용하신 겝니까. 팽가가! 우리 팽가가!”
“은자림은 우리가 끌어들인 게 아니다.”
피식.
팽석진의 반박에 팽가운은 조소를 머금었다.
그러나 팽석진은 진지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들은 이미 오래전에 황실에 숨어 있었어. 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셀 수 없이 많은 놈들이.”
“숙부! 이참에도 끝까지 모른 체하실 셈입니까! 본가의 선친들 앞에 부끄러움도 없으십니까!”
팽가운이 격노해 소리쳤다.
이미 역모는 수포로 돌아갔고, 모든 일이 만천하에 알려질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자기 입장을 변명하는 숙부가 그지없이 가증스러웠다.
“가운아. 아니, 팽가주.”
그럼에도 팽석진은 같이 흥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히 손을 내밀어, 분노에 휩싸인 팽가운을 진정시켰다.
“잠시만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시게. 영민왕 전하께서 처음부터 역모를 꿈꿨다고 생각하시는가?”
“그럼 아니란 말이오!”
숙부가 자신의 지위를 지적하며 반존대로 나오자 팽가운도 조금 예의를 갖췄다.
팽석진은 풋,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에서야 그래 보이겠지. 그러나 말이지, 애석하게도 오왕께서는 역모 따위엔 일절 관심도 없으셨다네. 만약 정말 그랬다면, 진작부터 초석을 다지기 위해 조정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계셨겠지. 아니 그러신가?”
“하아…….”
털썩.
팽가운에게 한 말인데 정작 영민왕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팽석진의 말에 그도 과거의 일들을 떠올렸다.
사심 없이 국정만을 돌보던 시절.
그저 당연하게 나라만 생각하고 불철주야 일해 왔던 시간을.
“전하께서 몰랐던 것은 저놈의 광휘가 어떤 자인지, 그가 이 모든 일에 얼마나 연관되어 있었는지. 그뿐이셨네. 그런데 그 하나가 모든 걸 뒤집었고.”
팽석진이 씁쓸한 듯 말을 내뱉었다.
과거 일왕이 천중단에 있었던 시절.
오왕은 조정과 지방을 바쁘게 오가며, 중앙 권력과 민생을 돌보는 일에 온 정신을 쏟았다.
광휘가 조정에서 어사중랑장의 직위를 받았던 걸 몰랐던 건, 그만큼 기밀인 데다, 오왕의 일이 바쁘고 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토록 열성적이던 오왕께서 왜 이리되신 것이오?”
팽가운이 비아냥거리자 팽석진이 끌끌 혀를 찼다.
“그 책임을 따져 묻자면, 솔직히 만세야(황제)께까지 올라가게 된다네. 오왕께서는 솔직히 피해자시네.”
“하?”
기막혀하는 팽가운에게 팽석진이 지적했다.
“선친의 위패에 걸고 맹세컨대, 이 몇 년간 오왕께서는 분명 권좌를 탐할 마음이 없으셨네. 그런 분을, 은자림을 끌어내는 미끼로 쓰는 것은 합당한 일이신가!”
“……?”
“자네 말처럼 이미 모든 것이 끝난 터일세. 이 와중에 더 무슨 변명을 할까! 가주도 이제는 아시겠지만, 천자는 은자림과 정적 소탕에 오왕을 이용하셨네. 그러나 이게 과연 바른 일인가!”
“……큼.”
팽가운은 침음했다.
잔뜩 격양된 얼굴이 된 숙부.
팽석진의 말에 그는 이제껏 바빠서 덮어 두어야 했던 의문이 소록소록 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천자 아래의 일왕.
황태자가 내상을 치유하며 정무를 보지 못하는 동안, 이제껏 그 대신 황궁의 가장 많은 일을 해 온 것은 다름 아닌 오왕, 영민왕이었다.
그렇다면 천자가, 정말로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천하를 아우르려 했다면, 애초에 이 모든 것을 오왕에게 미리 말하고 협력을 구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만세야께서는 피가 필요한 것이셨네. 반발하는 자를 덕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본보기로 많은 피를 뿌린 다음 군왕의 위엄을 돋보이려 한 것이고.”
“그럼…….”
“말씀해 보시게, 가주. 아비가 아들을 신뢰하지 않고 이용하는데, 어찌 아들이 효를 다할 것인가? 군왕이 신하를 믿지 않고 모략을 꾸미는데, 어찌 신하가 충심만을 다할 수 있었을 것인가?”
팽석진은 부드득, 이를 갈며 열변을 토했다.
“대체 자기 자식마저 버리는 비정한 군왕을, 어느 신하가 나라 녹을 먹으며 안심하고 섬길 수 있을 것인가!”
“…….”
팽가운은 난감했다. 효(孝)와 정리(情理)는 공맹 이후 가르침의 근본이다.
아무리 천하의 안위를 다스리는 데에 피눈물이 없다지만, 이는 분명 과한 처사였다.
“글쎄. 그건 자네 그릇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말이겠지?”
자박.
얼굴이 붉게 상기된 팽석진 뒤로, 때마침 한 명의 노인이 다가왔다.
개방 방주, 능시걸이었다.
“은자림을 겪어 보고도 아직 그런 말이 나오나? 천하 경영에 은자림은 반드시 솎아 냈어야 할 독버섯이야. 황실 도처에 숨어든 수가 몇 인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기관에 숨어 있는지 반드시 발본색원했어야 했고.”
“…….”
“그런 불씨를 가지고 있으면 언제고 조정도 무너지고 말 터. 천자께서 독한 수를 쓰신 것은 맞으나, 독하지 않으면 군자일 수 없는 법. 결국 자네들이 불안하고 기회에 혹해 움직이고 만 것일세.”
“말은 잘도 하시는군, 개방 방주.”
팽석진의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이제 싸늘해진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천자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가? 이게 대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고 하는 말인가?”
“알지. 은자림의 위험에 자기 자신까지 노출시킨 결단이시지.”
“닥치시게! 결과적으로 일이 잘되어서 이렇게 된 것이지! 만약 정말 천하의 주인이 일개 사교 놈들에게 폭사당했다면! 남은 천하는 어쩌란 말인가!”
“…….”
“군왕의 귀천에 나라 전체가 얼마나 어지럽게 돌아갔을 것인가! 그런 일을 누구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혼자서 진행해 버린 독단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 겐가!”
“그래서.”
분노하는 팽석진의 말을 끊으며 팽가운이 끼어들었다.
“숙부께서는 은자림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팽가를 판 것입니까? 일 장로를 포섭한 것도 그것 때문입니까?”
“……허.”
팽석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도 할 말이 없었다.
분명 계획을 진행할 때는 기호지세.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황이라 물릴 수도 없었지만.
“인호는…… 그래. 그것만은 변명할 말이 없구나.”
오로지 팽가만을 위하던 팽가의 일 장로 팽인호. 그를 압박하고 자기들의 움직임에 끌어넣고 만 것은 분명 과한 처사였다.
천자의 행위를 비난하며 그에게 반기를 들고, 오왕을 격동시켜 권자를 노리게 한 팽석진.
그 자신 역시 천자와 똑같은 짓을 한 것이다.
“나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왕이 그간 와병을 칭하며 모습도 보이지 않았기에, 나라의 역량이 근본적으로 약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다음 천자가 되실 분은 오왕뿐이셨어.”
팽석진은 괴로운 한숨을 내쉬었다.
일왕은 앞으로 죽을지 어떨지 모르는 상황.
이왕, 삼왕, 사왕은 제왕학의 기본도 깨우치지 못한 이들이었다.
이런 이를 순번대로 권좌에 올렸다간 나라가 망하는 꼴밖에 볼 것이 없었다.
“굳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라면 힘. 그냥 힘뿐이지. 힘이 없으니 시간, 시기가 너무 나빴다. 은자림을 처리할 수 있었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였다.”
그는 개탄했다.
하필이면 일왕이 들어간 곳이 천중단이고, 단장인 광휘와 금란지우(金蘭之友)였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고 알았다면 말렸을 일들이 아닌가.
당연하다면 당연히 진행시킨 일이 자신에게도 나라에게도, 그리고 팽석진이 섬겨 온 주군, 오왕에게도 모두 독이 된 격이었다.
“만약, 정말 만약이지만, 광휘와 무림맹주가 우리 편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동란이 나지 않고도 은자림을 물리쳤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지.”
오왕이 정권을 쥐면 측근인 팽석진도 팽가에게 큰 이득을 안겨 줄 수 있다고 믿었다.
어느 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세가 변한다.
팽석진도 오왕도, 그날 이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자신들의 계획 안에서, 은자림을 대적할 수 있는 두 패.
그중 하나도 돌아오지 않았기에. 결국 사람이 아무리 노력했어도 천운은 받는 사람이 받을 뿐인가.
이제 그는 팽가운에게 조용히 소매를 들어 올려 예를 취해 보였다.
“팽가주, 한 면을 보면 다른 면이 보이지 않네. 그대도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걸 보실 게야. 많은 선택을 하게 될 거고.”
“…….”
“그때마다 힘이 없으면 말조차 내지 못하는 상황이 오실 걸세. 힘. 힘을 비축하시게. 비록 정계에 때가 묻은 늙은이의 노욕이지만, 가려들으시게.”
팽가운은 여러 감정이 교차하고 있었다.
단순히 충심과 애정만 있으면 되는 무가와 달리, 정계의 상황은 복잡했다.
분명 반역인데, 그게 또 내면에는 왠지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 그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전하.”
팽석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영민왕의 곁에 다가가 읊조렸다.
“포기하십시다. 이제…… 이제 다 끝난 모양입니다.”
“흐으…….”
영민왕의 눈에 짙은 회한이 어렸다. 그는 아까부터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왕부 호위무사들을 보고 있었다.
“하아압!”
쇄애애액! 쇄애액!
영민왕 자신을 호위하지만, 엄연히 나라를 위해서도 길러 왔던 이들. 무예만이 아니라 충의로 가득했던 젊은 영재들이.
“윽! 윽!”
“아악! 전하!”
하나하나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을 도륙하는 이는 묵객. 조금 전, 태화전으로 들어왔던 사내였다.
분명 젊어 보이는 얼굴인데, 이쪽은 왕부에서 일당백의 정예만 뽑아 극한의 수련을 받은 왕부 호위무사들인데.
단 한 명을 상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그를 상대로 제대로 싸우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당상관, 어찌 저쪽엔 무사 하나하나가 일기당천이구나. 반면 우리는 뭐 하나 내밀 수 있는 인물이 없고…….”
“…….”
“한 명이라도 참. 그게 못내 아쉽구나.”
쓰윽.
영민왕은 흐느끼며 떨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마지막 일갈을 내뱉었다.
“영민왕이다! 왕부 무사들은 모두 싸움을 멈추라!”
째애앵!
이제껏 그들을 이끌며 조련해 왔던 영민왕. 그의 호령에 왕부 무사들이 멈칫. 한 발씩 뒤로 물러섰다.
영민왕은 온 얼굴에 줄기줄기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 목을 놓아 고함질렀다.
“우리가…… 우리가 졌다! 그러니 쓸데없이 귀한 인명도 피도 흘릴 이유도 없다! 명한다! 나 영민왕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멈춰라!”
“크흑…….”
“으윽!”
쨍그랑! 태애앵!
아직 절반 이상이나 살아남은 왕부 무인들.
그들은 오왕의 명령임을 확인하고 검을 떨궜다.
“흠.”
가늘게 떨고 있는 영민왕.
그 어깨를 본 능시걸이 턱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뭐 그래도…… 인물이긴 하구만.”
*
달그락달그락.
수많은 군사들이 한 무리가 되어 북문 앞에 도착했다.
군데군데 흩어졌던 병력이 합류하자 어느새 칠천에 달하는 대군세를 자랑했다.
저벅. 저벅.
그리고 그 앞에 금의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걸어 나오는 두 명이 있었다.
“문을 열어라!”
끼이이익.
상기된 일왕의 외침에 북문이 열렸다. 문 사이로 이미 시립해 있던 무사들.
그중 한 명의 무사가 빠르게 나오며 군례를 올렸다.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폐하.”
“흠.”
일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돌렸다.
당금 황제.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천천히 뒤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강호 무사들. 그리고 운집한 금의위 무장들.
그들은 모두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보좌하고 있었다.
“몇 시진밖에 되지 않았는데…….”
황제는 동녘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두웠던 긴 밤이 지나가 천천히 붉은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몇 년처럼 길었구나.”
황제의 얼굴에 붉은 빛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성루에서 깃을 흔드는 병사들.
승전보가 울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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