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진경일보(進境一步) (3)
한 인영이 종남산을 향해서 느릿느릿 걸어왔다.
그는 한참 멀고 먼 길을 걸어온 모양인지, 먼지를 잔뜩 뒤집어쓰고 발을 질질 끌다시피 했다.
뒷모습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챙 넓은 방립을 깊이 눌러 쓰고, 등 뒤에는 한 자루의 장검을 비스듬히 걸쳤다. 지닌 바가 그것뿐인 단출한 차림새였다. 어디 먼 곳을 오갈 준비를 했다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는 산세에 자리한 호숫가, 천지(天池)에 이르러서 발길을 멈췄다.
본래에 무슨 색이었는지 모를 정도로 누렇고, 하얗게 물든 득라의 자락을 툭툭 털었다. 당장 먼지가 뽀얗게 솟아오를 정도였다.
그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호숫가로 다가가서는 쪼그려 앉아 손을 씻고 목덜미를 닦아 냈다.
후우…….
지친 숨을 한번 길게도 내뱉었다.
한참 멍한 눈으로 옥빛으로 물들어 있는 천지 물결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으아, 힘들다.”
천지의 물은 시릴 듯이 차갑지만, 그를 달래어 주지는 못했다. 한참을 주저앉아서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를 바라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곧 하얀 손으로 무릎을 억지로 쥐고서 일어섰다.
이제 산길을 다시 올라야 할 참이다. 천지 너머에 우뚝 솟은 산봉이 그의 목적지였다.
종남산 제일봉, 종남봉.
저곳은 아득하고, 몸은 지쳤다. 그런데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한다니.
무엇보다 그가 힘겨운 건 저곳에서 마주할 것이 대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서였다.
“흐으음.”
그는 팔짱을 끼고서 희뿌연 구름이 걸친 종남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대체가 모르겠네. 불길한 물건이란 말이지. 종남파 정도 되는 곳에서 불길하다고 도움을 청하다니.”
맑은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솔직했다. 방립 아래로 언뜻 드러난 붉은 입술을 슬며시 깨물었다.
그래도 아니 갈 수는 없다. 다른 이도 아니고 종남파 세 장문인 이름으로 청한 일이고, 고스란히 자신에게 내려온 일이었다.
“에고고, 스승께서도 참 너무하시지…….”
불현듯 앓는 소리를 내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면서 비척비척 몸을 돌렸다.
마냥 축 처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는 괜히 깊게 숨을 삼키면서 턱 끝을 힘주어 치켜들었다.
“그래, 가자. 가!”
라고 억지로 외쳤다.
종남봉 끄트머리, 비탈진 돌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억지로 기운 내어서 힘찬 걸음이 끝에 가서는 결국 기진맥진이다.
앞으로 고꾸라질 듯한 것을 바윗돌을 붙잡아가면서 간신히 올라섰다.
“아, 아아…… 아이고오…….”
마지막 계단 하나가 이렇게 힘겨울 줄이야.
거의 버둥거리다시피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고요한 모습과는 달리 체력은 영 부족했다.
천지 물가에서 다리를 쉰 것만도 한참이었는데, 종남봉을 오르면서 아예 기진해 버렸으니.
그는 바윗돌을 붙잡았지만 풀리는 무릎을 어쩌지 못했다.
매달린 채 억지로 턱을 치켜들었다. 축 늘어진 방립 끄트머리로 저기 우뚝 솟은 문루가 눈에 들어왔다.
심검관.
종남파의 산문. 그 앞에서는 종남파 제자로 보이는 이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는 보란 듯이, 그리고 들으라는 듯이 힘겨운 소리를 내면서 휘적휘적 손을 흔들었다.
저게 무슨 뜻이겠나.
“아이고, 저런.”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종남 제자는 안타까운 듯이 바라보았다. 절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습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섣부르게 다가설 수는 없었다.
다른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딴에는 한참 수상한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종남파에 볼 일이 있지 않고는 종남봉까지 굳이 오르내리는 사람은 없다.
달리 종남봉을 유람하고자 한다면 훨씬 편한 길도 따로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도궁이 있었을 때에야 무수히도 많은 이들이 올라와서 향화하고 축원하였다지만 다 옛말이고, 지금은 강호의 일문이 아닌가.
종남봉을 오르내리는 이들 중에서 여기까지 이르렀다고 저기 있는 낯선 이처럼 축축 늘어지는 이는 좀체 없었다. 더구나 앞으로 숙인 그는 등에 한 자루 검을 메고 있었다.
삐죽 솟은 검자루와 흘러내린 긴 검수가 뻔히 눈에 들어왔다.
“이런 때는 어찌해야…….”
송영관 제자, 탁관규는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가볍게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는 미간 모은 채, 허우적거리는 낯선 이를 물끄러미 보았다.
낯선 이는 급기야 앞으로 팔을 한껏 뻗다가 고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철퍼덕!
꽤 거리가 있었지만 묵직한 소리가 그대로 들릴 정도였다.
탁관규는 찔끔한 얼굴로 쓰러져 널브러진 외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거 참.”
주저했던 건 잠깐이고 그는 곧 어이없음에 혀를 찼다. 저건 너무도 뻔한 수작이 아닌가.
힘겨워하는 것까지는 어떻게 이해해 보겠지만 졸도, 기절이라니.
나가도 너무 나갔다.
탁관규는 팔짱을 끼면서 도리어 한걸음 물러섰다.
“정말로 정신을 잃은 거라면 차라리 잘 되었지, 뭐.”
탁관규는 중얼거리면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산봉 높은 곳인데 모처럼 바람은 가만히 불어들었고, 햇볕은 따사롭게 내렸다.
좋은 날, 종남봉 심검관이다.
“음.”
그는 흙바닥에 엎어져서 눈을 꼭 감고 있다가 슬쩍 눈썹을 치켜들었다.
‘이게 안 먹히네…….’
좋게 말하면 기강이 확실한 것이고, 조금 사감(私感)으로 말하자면 영 싸가지 없는 일이다. 엎어진 채 마른 입술을 한번 삐죽였다.
굳이 꾸며 낸다고 이렇게까지 엎어진 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지쳐서 손발에 힘이 조금도 들어가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부축하러 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보란 듯이 엎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예 모른 척 외면할 줄이야.
상황이 영 고약하다. 그는 생각하면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지금 고개를 들자니 낯부끄럽고, 뭣보다 기운이 쪽 빠져서는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없었다.
‘젠장, 내가 내 발을 찍었구나!’
속으로 한탄하고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그래도 약간의 기운이라도 돌아와야 일어나든 뭘 하든 할 일이었다.
축 늘어져 있을 참에 불현듯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냐.”
“예, 사형. 외인인데, 하는 짓이 한참 수상하여서 일단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래.”
“예. 힘들게 올라와서 그만 고꾸라지는데, 다른 짐은 보이지 않은데 장검을 지니고 있는 점, 엎어지는 모습이 또한 부자연스러운 점이 한참 수상하게 보입니다.”
“흠.”
“네, 감사합니다. 사형.”
주고받는, 아니 한쪽이 거의 말하고 있었지만, 눈앞이 까무룩 하던 그는 귀를 움찔 세웠다.
고대로 정신 놓을 듯하던 것을 겨우 붙잡았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그런데 터벅터벅 발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머리 위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리쬐는 햇볕을 가리는 그림자를 대강 느낄 수 있었다.
“흐으음. 짐은 없고, 검은 있다. 이상하기는…… 하군.”
다가선 그는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치 동굴 속에서 목소리가 울리듯이 낮고 묵직했다.
그 순간, 헉! 놀란 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허리 뒤를 잡고 번쩍 들어 올리는데, 자신의 몸이 너무도 가볍게 들썩였다.
정신 잃은 척을 하고 말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자신이 헝겊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아주 간단히 들려서는 빙그르르 돌아 두 발로 섰다.
눈 깜빡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쓰고 있던 방립은 진즉 뒤로 넘어갔다.
머리카락은 잔뜩 산발하고, 아래에는 하얀 얼굴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황당함이 무엇보다 가득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지도 않았군. 본파에는 어찌 오셨소.”
“어, 어어. 크다…….”
동굴 목소리가 코앞에서 울린다. 방립의 그는 멍한 눈을 끔뻑거리다가 목소리가 울리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올라가는 눈초리는 목을 뒤로 젖히고서야 멈췄다.
저기 위에서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얼굴이 있었다.
그 자신도 그렇게 작은 키가 아니고, 키 큰 사람을 여럿 보았다고 하지만, 처음 보는 장신의 거한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장신의 사내, 송영관 대사형 황부는 표정 하나 없는 얼굴로 외인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뻣뻣하여서, 고목 한 그루를 그대로 깎아서 만든 목상이 아닐까 싶었다.
무표정한 얼굴과 눈초리 앞에서 절로 움츠러들었다. 그는 슬그머니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생각하니 큰 실례를 한 듯하다. 아니, 실례를 저질렀다.
대뜸 크네, 어쩌네 하다니.
“저기, 죄,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요.”
“아뇨, 그러니까. 제가…… 그…….”
황부는 되물었지만, 별로 궁금하다는 투가 조금도 아니었다. 괜히 움츠러들어서 더듬거리다가 말을 돌렸다.
“아닙니다. 저는 저기 남천궁에서 왔습니다. 여기 장문인께서 본궁에 전서를.”
“아, 귀한 손님. 종남파 황부라고 하오.”
남천궁의 이름은 분명 무겁다. 그리고 황부는 장문인이 어떤 연유로 서둘러 남천궁에 도움을 청하였는지 알았다. 그렇다면 마냥 시간을 지체할 때가 아니다.
황부의 인사에 그는 부랴부랴 고개를 세웠다. 손발이 여전히 덜덜 떨렸지만 그래도 두 손 모아서 합장했다.
“무, 무량수불. 남천궁 제자 상관정아라고 합니다.”
“음, 상관 도고이시군. 그럼 어서 드시지요.”
“예, 예.”
남천궁의 제자라 밝힌 상관정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은 했지만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기운이 똑 떨어진 탓이었다. 무릎이 덜덜 떨렸다.
황부는 그 모습을 흘깃 보고는 말했다.
“많이 지쳤군. 부축하겠소.”
“…….”
앞뒤 다 자르고 하는 말이었다. 얼굴은 또 왜 저렇게 무표정한 것인지.
상관정아는 그만 무서울 정도였다.
그는 고개 숙이면서 눈을 지그시 마주쳤다. 고요하고도 흔들림 없는 눈초리였다. 속내를 몰라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말이 나올 판이었다.
황부는 머뭇거리는 모습을 승낙으로 보았는지 바로 그를 붙잡고 몸을 돌렸다.
“어? 어어? 황 소협?”
당황하는 소리만 나왔다. 이런 것도 부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쪽 손으로 어깨를 감싸듯이 쥐었는데, 그것만으로 덜렁 들려서는 그대로 이동했다.
상관정아는 두 발이 둥실 뜬 채 종남파에 들었다.
뽑아든 검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단지 세우고만 있는 건 아니다. 검을 든 손은 차분한데, 검 끝이 가만히 흔들리고 있었다.
고진무는 떨리는 검첨을 지그시 보면서 말했다.
“보아 알겠지만, 백운요산은 유운검법의 기수식이면서 또한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으음.”
집중하는 단청 앞에서 고진무는 백운요산 일초를 천천히 펼쳤다.
펼치고 또 펼친다. 하얀 구름이 산을 감싸네. 교차하는 궤적에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다.
단청은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삽시간에 유운검법 전 초식을 외워 버린 단청이다.
그리고 이제부터 제대로 유운검에 입문한다.
고진무가 검을 거두자 하얀 구름이 고여 흐르는 듯하던 궤적이 씻은 듯 사라졌다.
단청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고진무가 괜히 검을 거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검을 늘어뜨리고서 다른 곳을 보고 있다. 따라서 고개를 돌리자 수련장으로 들어서는 우문화청이 있었다.
“우문 대사형.”
“대사형.”
“음.”
우문화청은 무슨 일인지 미간을 모은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대사형, 무슨 일이신지요?”
“삼원각으로 서둘러 가 봐야겠다.”
“삼원각을요? 장문인께서 찾으시는지?”
“그래. 남천궁에서 사람이 온 모양이야.”
“드디어.”
고진무는 남천궁이란 이름에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