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48
248화. 살수마예(殺手魔藝) (3)
은육호는 숨을 삼켰다. 눈 뜨자마자 마주한 상황이 한참 당황스러운 것은 둘째 문제였다.
‘빠져나갈 구멍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시회혼으로 공력을 상당히 소실하기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직 몸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만검산장의 두 검객이 상대라면 얼마든지 몸을 뺄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는 한 사람의 도고, 그가 제일 큰 문제였다.
‘뻔히 두 눈으로 보고 있는데, 정작 기척은 조금도 느낄 수가 없다니. 아무리 감각이 흩어졌다고 해도…… 이건…… 대체 정체가 무어냐?’
굳은 얼굴은 그대로였고, 가늘게 뜬 눈초리도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나 머릿속은 난마로 뒤엉켜 있었다.
지금 처한 상황도, 마주한 상대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았다.
서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양하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고 소협 말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반신반의하였는데 말이지요. 정말로 멀쩡히 눈을 뜨는군요.”
“…….”
그는 빤히 은육호를 노려보면서 말했지만, 딱히 말을 건네는 건 아니었다.
은육호는 그저 입만 굳게 다물었다.
말 꺼낸 양하도 무슨 대꾸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섰다. 아물지 않은 목덜미에서 통증이 지끈거렸지만, 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차피 살정이라고 한다면 무슨 고문을 한다고 해도 입 한번 벙긋거릴 일도 없을 겁니다. 그냥 목을 베어 버리지요.”
“…….”
양하가 바로 목을 끊어 버리겠다는 듯이 검 자루에 손을 올리자, 당장 예리한 살기가 엄습했다. 말로만이 아니라 어디를 벨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목이다.
이번에는 반시회혼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
은육호는 그저 입만 굳게 다물었다.
“양 당주.”
불망이 나선 양하를 차분하게 만류했다.
양하는 입술을 강하게 비틀었다. 힘이 바짝 들어갔다. 멈춰 서기는 했지만, 검자루에 올린 손은 풀지 않았다.
노려보는 눈초리에 검기를 실어 낼 수 있다면, 바로 은육호의 미간을 꿰뚫었을 판이다.
물러나지 않고 있으려니 사진초가 꾸짖듯이 그를 불렀다.
“양하.”
“흐읍…… 예, 알겠습니다.”
양하는 그제야 느릿하게 한걸음 물러섰다. 그래도 노려보는 눈초리는 여전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도 하겠지만, 가문의 죄인을 멋대로 죽여서 입을 막았다는 것. 그것은 진정으로 용납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 더해서 가문의 은인, 고진무를 노리기까지 했다.
아무리 산장이 어수선한 때라고 하지만, 살수의 침입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고, 가문의 은인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했다는 것에 열불이 치밀었다.
은육호는 서늘한 목덜미를 천천히 쓸어내리고 고개를 비틀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바로 목이 날아갈 판이니까, 둘러보는 눈초리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굉뢰검, 외당주는 알겠지만. 역시 모르겠군. 저기 괴상한 도고는 누구지?’
잠깐 사이에 머리를 열심히 굴렸지만, 답을 내지 못했다.
만검산장으로 잠입하면서 내부 동정을 단단히 파악한 참이었다. 종남파 제자와 강동오서에 대해서는 들었지만, 정작 도고에 대해서는 따로 들은 바가 전혀 없었다.
그는 불망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일단 흩어진 공력을 은밀히 끌어모았다.
반시회혼의 후유증으로 채 삼 할도 남지 않았지만, 제대로 집중하면 반전의 기회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흡!”
은육호는 퍼뜩 어깨를 들썩거렸다. 공력이 제대로 모이기는커녕 오히려 남은 공력이 속절없이 흩어졌다.
몸에 다른 이상이 없는데 이런 변화라니.
은육호는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
불망이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쓴웃음을 그리면서 말했다.
“이제 상황을 좀 알겠는가?”
“다, 당신은 대체 누구요?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글쎄. 내가 누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군.”
그리고 불망은 소매 속에서 한 장 부적을 꺼내 들었다. 검게 물든 부적으로 그것은 지니고 있던 은신부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부, 부적?’
도고가 부적을 지닌다는 게 이상할 건 없겠지만, 은육호는 불현듯 뇌리는 스치는 이름이 있었다.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설마…….”
살정, 그 이름은 칠신가에서 등장하는 이름이다.
殺井之主暗雲何處.
살정지주암운하처.
살정의 주인은 먹구름 어디에 있는가.
살수 중의 살수로, 마주한 자에게는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라고 알려졌다.
그런 살정의 살수가 등장했다니.
백옥상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멍한 눈으로 고개를 천천히 흔들었다. 일단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으으…….”
“괜찮으십니까?”
신음하는 그에게 고진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백옥상은 일단 한숨을 깊이 삼켰다. 덜컥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아, 빈말로도 괜찮다는 말은 못 하겠습니다. 고 소협.”
그렇지 않아도 백옥상은 우빈이라는 아이가 혈사 제자라는 것을 들은 게 고작 반나절 전이었다.
이어서 살정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더욱 걱정은 ‘교’라고 하는 것들과 연관이 있다는 점이었다.
“머리가 다 아프네요. 설마 ‘교’와 살정이 같이 있을 줄이야. 누가 꿈에서라도 떠올릴 수 있겠습니까.”
착잡함을 가득 담아서 중얼거렸다.
‘교’라고 하는 것들은 한참 아득하여서 멀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 실체를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게 두려움이었지만, 낯설다는 것 또한 큰 이유였다.
거기에 살정을 더하였으니.
백옥상은 자신을 지그시 지켜보고 있는 고진무의 눈초리에 곧 정신을 차렸다.
괜히 헛기침을 흘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머쓱한 기색을 다잡았다.
“남천궁과 혈사 이름만 해도 놀라운데 말입니다. 한번 마주하기도 어려운 칠신가 이름을 거듭 마주한다는 게 신기할 뿐입니다.”
“전설 속 이름이나 다름없으니, 더욱 그렇지요.”
고진무도 이해하여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백옥상이 보기에는 고진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검고에서 일만의 검을 부리면서 검룡이라는 요괴를 제압한 상대가 눈앞에 있지 않은가.
칠신에 비할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 또한 사람의 경지를 훌쩍 넘어선 셈이었다.
백옥상은 샐쭉하게 눈매를 가늘게 흘겼다.
“흐음, 전설 속 이름이라. 만검산장의 전설을 펼쳐 낸 사람이 할 말로는 여겨지지 않는걸요.”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인께서 남기신 안배 덕분입니다. 결코 저의 공력이나 성취가 아닙니다. 백 소협.”
고진무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백옥상은 잠깐 입술을 삐죽였다.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만검귀일의 비전을 다시 펼치지 못한다고 하는 건 이해하겠지만, 지금 고진무의 상태는 그야말로 너덜너덜했다. 그저 거죽만 남은 꼴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였다.
공력을 크게 잃었고, 기맥과 근골이 크게 상했다.
내상, 외상이 심각한 수준으로, 만검산장의 의원도 고진무를 진맥하고서 기겁하였던 것이 불과 하루 전이었다.
그런데 살정의 자객을 제압하였다는 건, 남다른 한 수가 있지 않고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고진무는 여전히 병상이라고 하지만, 평온한 기색으로 앉아 있었다.
표정뿐만 아니라 눈빛도 담담하여서 약간 핼쑥한 얼굴이 아니라면 전혀 부상자로 보이지 않았다.
무슨 내력이 있는 것인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맴돌았다. 그렇다고 굳이 캐묻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흐음…….”
백옥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의문을 잠깐 눌러놓고서 말을 돌렸다.
“참, 그러고 보니 개방에서 전언이 왔답니다.”
“개방에서요?”
“예, 동경의 총타에서 온 소식입니다.”
고진무는 무슨 소식일지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 눈썹을 바짝 모았다.
“시랑의 여덟 거지, 시랑팔걸(豺狼八乞)이 급히 길을 나섰다고 하는군요.”
“시랑이요? 여덟?”
이리와 승냥이라니. 고진무는 전혀 모르는 얼굴로, 견문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백옥상은 잠시 쓴웃음을 그렸다.
시랑팔걸은 지금 개방을 알리는 여러 고수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젊은 고수들이었다.
“시랑팔걸은 사람 많은 개방에서 무공이 특히 뛰어난 젊은 거지 여덟을 말합니다. 그들은 개방 방주이신 당대의 뇌공께 각자 한 수를 전수받아서 공력이 무림의 누구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다고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특히나 그중 맏이인 벽력개는 신진 육대고수 중 한 사람으로, 북풍전랑(北風電狼)이라고 한다.
“북풍전랑은 육대고수 중에서도 중여화룡과 비견할 만한 고수라고 들었습니다.”
“장 진인과 비견할 정도라고요?”
고진무는 눈을 크게 떴다.
육대고수 면면은 잘 알지 못하지만, 중여화룡이라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큰 가르침을 받지 않았던가.
지금 자신이 공력을 온전히 회복한다고 해도 화룡진인 장사원에게는 감히 승패를 말할 수가 없었다.
다른 육대고수 중 한 사람, 서량붕권의 경우에는 마공에 빠져서 본래의 경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오고 있다는 개방의 북풍전랑이 중여화룡에 비할 정도라니.
“그리고 종남파에서도 사람이 오고 있답니다. 개방을 통해서 전언이 같이 왔습니다.”
“본파에서도요? 하아, 그렇군요. 아…….”
고진무는 퍼뜩 반색했지만, 곧 낯빛이 어두워졌다. 급격한 변화였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하, 하하. 그게 아무래도 혼이 좀 날 듯합니다.”
고진무는 슬그머니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사문에 제대로 허락도 받지 못한 상태로 복우산까지 달려오지 않았던가.
누가 달려오느냐에 따라서 정도는 다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할 터였다.
더구나 이렇게 몸이 상하기까지 한 마당이니까.
고진무는 슬쩍 혀끝을 깨물었다. 마냥 난처한 기색이었다.
백옥상은 그런 고진무를 물끄러미 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병색이 짙은 고진무였다. 그 얼굴을 빤히 보고 있기가 어째서인지 힘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진무가 물었다.
“백 소협. 괜찮으십니까? 낯빛이…….”
“예? 저요? 제가 뭘!”
백옥상은 넌지시 건네는 물음에 화들짝 놀라면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빽 외치는 소리에 고진무는 병상에 기대어 앉아 있다가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언성을 높이는 것도 그렇지만, 백옥상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는데, 마치 크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혹시 화나신 건가요? 제가 무슨 실수라도…….”
“화, 화요? 아닌데요. 화 안 났어요. 제가 화는 무슨. 하하, 그냥 갑자기 열이 올라서. 예, 그래서 그런 겁니다.”
고진무가 한참 조심하면서 묻자, 백옥상은 그제야 얼굴이 뜨거운 것을 깨달았다. 그는 손등으로 자기 볼이며 이마를 더듬었다.
확실히 뜨끈뜨끈하다.
열을 식히기 위해서라도 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 으, 저는 그럼. 잠깐.”
“백 소협, 잠시만.”
백옥상이 당장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는데, 고진무가 한발 빨랐다. 그는 불쑥 앞으로 몸을 내밀어서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백옥상의 불그스름한 이마를 짚었다.
‘헉!’
백옥상은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고진무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다시 몇 마디 말을 꺼냈지만, 백옥상은 전혀 듣지 못했다.
사고가 확 날아가 버리면서, 그냥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굳어 버렸다.
“백 소협? 백 소협?”
부르는 목소리가 멀리서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