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79
279화. 토황용사(土黃用事) (4)
시기는 초저녁이라고 하지만, 계곡에 내리는 어둠은 한밤중이나 다름없었다.
새카맣게 내린 어둠 속에서, 별빛은 총총했다.
계곡의 한 구석에서 모닥불을 밝혔고, 고진무는 불빛 너머에 어둠 짙은 한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길을 쫓아서, 맹구도 역시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급히 몸을 돌렸다.
마냥 속 편하게 죽을 퍼먹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제야 단청과 도우빈도 흠칫하면서 고개를 세웠다.
뭔가의 기척을 이제야 느꼈다.
불빛은 이쪽에 있고, 너머에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네 사람은 동시에 한 점을 같이 노려보았다.
공력을 집중하니, 어둠을 꿰뚫을 듯이 안광이 선명하게 맴돌았다. 그러자 흐린 윤곽 정도였지만, 두 사람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주춤하면서 부스럭,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갑작스럽게 돌아보는 눈초리에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
“으음, 처음부터 가까이 숨어 있었던 모양인데요?”
도우빈이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지만, 한참 수상한 자들이 아닌가.
정체가 무엇이든, 오늘 여량산에서 마주하는 자들은 일단 경계하고 볼일이었다.
단청과 도우빈은 꽤 살벌하게 눈빛을 번뜩였다. 그 눈초리에 다가서던 두 그림자는 잠시 주춤했다.
그들도 딴에는 한참 조심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고진무는 조용히 솥에서 끓고 있는 죽을 휘휘 휘저었고, 요광은 한참 뒤에서 드러눕다시피 한 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맹구도가 있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젖은 입가를 스윽 훔쳐 냈다. 한층 신중한 눈초리였다.
움츠러든 두 사람은 일단 모습을 드러냈지만, 이쪽을 경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처지도 그렇지만, 모닥불을 등에 지고 우뚝 서 있는 맹구도의 모습이 한참이나 위압적이었다.
긴장한 그들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바로 몸을 피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은신을 풀고 나섰을 때에는 그만한 각오를 한 참이었다.
“후우…….”
긴장한 한숨을 내뱉으면서, 둘은 조심조심 다가섰다. 그리고 불빛의 경계에서 멈춰 섰다.
두 남녀였다. 야윈 얼굴에, 눈가에는 그늘이 짙었다. 그래도 눈빛은 형형하게 밝았다.
기껏 다가서서 얼굴을 드러냈지만, 쉽게 말문을 열지는 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맹구도의 모습도 그렇지만, 뒤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그리고 불가에 놓인 솥에서는 죽이 끓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향한 눈초리는 떼기 어려웠다. 굶주림이라는 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크흠!”
젊은 사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있는 것도 아닌데, 넋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그는 숨을 한껏 삼키고서 맹구도를 바라보았다.
“두 분은 혹여 승찬 공자, 그리고 백란 소저가 맞으시오?”
“…….”
맹구도는 나름대로 차분하게 물었지만, 두 남녀는 더욱 긴장하여서 입을 질끈 깨물었다. 남은 기력을 전부 끌어올리는 듯이 강하게 눈을 빛냈다.
내내 웅크리고 숨죽이고 있을 수도 있었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내면 그나마 남은 체력까지 전부 잃을 판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잔뜩 경계하면서 자세를 갖추는 모습으로,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답으로 충분한 반응이었다.
“흠, 이제야 찾았군. 사실은 두 사람을 찾는 일을 거의 포기했었는데 말이오.”
맹구도는 얼굴을 풀었다. 웃음이 절로 떠올랐다. 그리고 움찔한 두 사람에게 바로 두 손을 맞잡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은 용부 맹구도라고 하오. 두 분을 찾아서 호위해 달라는 의뢰를 따로 받았소.”
“호, 호위?”
승찬이라는 사내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당황한 얼굴로 있다가,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 또한 머뭇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디로 향하든, 막지 말라고 굳이 당부하시더이다.”
“…….”
두 남녀는 덜컥 입을 다물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순순히 믿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는 경계한답시고 허리 뒤로 뻗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누, 누가 있어서 그런 의뢰를 했단 말이오?”
“글쎄요. 의뢰인이 달리 신상을 밝히지도 않았지만, 딱히 관심 둘 바도 아닌지라.”
맹구도는 예의를 갖추어서 말했다. 단순한 목표가 아니었다. 이제부터 두 사람은 보호 대상이었다.
두 사람의 내력이나 사정은 알지 못했다. 맹구도에게 중요한 것은 이들을 보호해서, 향하고 싶은 곳까지만 안전하게 호위하는 게 전부였다.
그것을 위한 추적이었다.
고생도 고생이었지만, 거의 그르쳤다고 포기한 순간에 이렇게 딱 마주하였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고, 일차 의뢰를 완수한 셈이기도 했다.
맹구도는 이내 두 사람의 안색을 빠르게 살폈다.
바삐 쫓기면서 내내 굶주림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야위었고, 한참 지쳤다.
마지막 기운을 다해서 잔뜩 경계했지만, 어디 한칼이라도 휘두를 수 있을까.
“허어, 이런.”
맹구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모닥불을 마련하고 죽을 끓였지만, 어느 것 하나 자신이 한 게 아니었다.
섣불리 권하고 말고 하기에 어려운 처지였다.
“저어, 고 검객…….”
“괜찮습니다. 자리를 권하시지요.”
고진무는 주저하는 그의 눈치를 짐작하고서 차분하게 말했다.
불가에 자리를 내주고, 잔뜩 끓인 죽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중에 단청은 툴툴거렸다.
“피이, 뭘 굳이…….”
그래도 일단 뒤로 물러나면서 불가에 자리를 내주기는 했다.
단청은 동시에 조심스럽게 다가서는 두 남녀, 승찬과 백란의 모습을 빠르게 살폈다.
상당히 고생한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 다 어딘가의 명문 귀족 자제인지 풍모가 범상치 않았다. 옷차림이나 차분한 몸가짐까지 곱게 자란 흔적이 역력했다.
승찬은 꽤 신중한 모습이었다.
경험이 충분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부진 체격과 굳은 얼굴에는 어떤 상황에라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자신을 다잡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뒤따르는 여인은 고아한 모습이었다.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백옥 같은 얼굴에는 흠이 하나 없었다. 가녀린 듯한 모습이라도, 굳게 참아 내는 강단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단청은 한층 예리하게 눈빛을 번뜩였다.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단청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여인은 어느 정도 내력을 감추고 있었다.
“흐음…… 수상한데.”
단청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초리에 승찬도 그렇지만, 백란도 불편한 기색이었다. 헛기침이 어색하게 튀어나왔다.
“흐, 흐흠.”
그만 눈길을 거두라고 하는 뜻이지만, 단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눈 하나 깜빡 않고 모닥불 너머에서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자 고진무가 달래듯이 그를 불렸다.
“단청 사매.”
“예에…….”
그제야 단청은 눈빛을 누그러뜨리면서 물러섰다.
그래도 입술을 한껏 삐죽였다. 여량산에서 마주한 소란은 결국 저기 두 사람 때문이라는 것 아니겠나.
불만까지는 아니라도, 눈길이 고울 수는 없었다.
고진무는 단청을 달래어 놓고서, 어렵게 앉은 두 남녀에게도 죽을 권했다.
“받으시오. 볼품은 없지만 속을 채우는 데에는 충분할 거요.”
“가, 감사합니다.”
승찬은 두 손으로 권한 죽 그릇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손이 부르르 떨렸다. 뜨끈한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서 스며들었다. 더구나 먹음직스러운 냄새는 또 어떤가.
그래도 몸을 돌려서 백란에게 먼저 죽을 건네었다.
“란매, 먼저 들어요.”
“저보다는…….”
“죽은 충분하니, 그렇게 주저할 것 없소.”
고진무는 머리를 맞대고서 속삭이는 둘을 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다시 죽을 가득 담은 그릇을 내밀었다.
승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서 그릇을 받아 들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건량을 잔뜩 넣고서 대충 끓였다고 하지만, 지금 두 사람에게는 가장 간절한 것이었다.
승찬은 입술을 꽉 깨물고서, 당장 죽을 먹기보다는 고진무를 바라보았다.
“저어, 그럼 귀하들께서도 의뢰를 받은 분들이시오?”
“아니, 아니오. 공자. 우리는 그저 산을 넘어가는 중이었다오.”
“그렇군요. 저희 때문에 발길이 지체된 것이로군요.”
“다만 인연일 뿐이지 않겠소.”
고진무로서는 두 남녀의 사이가 무엇인지, 어떤 내력인지는 조금도 알 바가 아니었다.
그저 굶주리고 지친 이들에게 따뜻한 한 끼와 자리를 내주는 것 정도는 해 줄 만했다.
이대로 큰 말썽 없이 밤을 지새우면 좋겠지만, 그렇게 쉽게는 아니 될 모양이었다.
불가에서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바위에 등을 기대고 눕다시피 있던 요광이 문득 죽립 끝을 들췄다. 그는 하얗게 눈빛을 번뜩였다.
“진무, 어쩌겠나?”
“예, 요광 스님. 이번에는 제가 처리하도록 하지요.”
“좀 많은 것 같네만.”
“예, 문제없습니다.”
“흐음, 그렇다면야.”
고진무는 담담하게 말했다. 요광도 이번에는 다른 말은 않고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다시 죽립으로 얼굴을 덮었다.
죽 그릇을 비워 가던 반승찬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저어…… 혹여 적도들이…….”
“별일 아닐 겁니다. 쉬고 계세요. 주변이 소란한 듯하니, 잠시 살피고 오겠습니다.”
고진무는 당황하는 맹구도와 두 남녀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느긋하게 일어섰다. 그러자 맹구도가 짙은 눈썹을 바짝 모았다.
“고 검객!”
“여기 두 분을 보호하는 게 맹 무사의 일 아닙니까. 자리를 지키시지요.”
“하지만.”
맹구도는 저도 모르게 앞에 세운 백왕갑에 손을 올렸다. 고진무는 담담했다.
“여기에 밝힌 불을 보고서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무턱대고 살기를 일으키는 걸 보면, 누가 되었든 간에 손을 쓸 작정인 모양이니. 제 일이기도 하겠지요.”
“허어…….”
“쉬세요.”
고진무는 머뭇거리는 맹구도에게 짤막하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몇 걸음 만에 어둠 속으로 스르르 스며들어서 모습을 감추었다.
맹구도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한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서라. 누가 누구의 안위를 걱정한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미 천하 무림에 위명이 자자한 종남검귀였다. 오히려 너머에 있을 다른 녀석들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맹구도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빈 그릇을 붙잡고서, 두 남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흉한 일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이고, 열에 아홉은 자신들 때문일 터였다. 앉은 자리에서 들썩거렸다.
좌불안석이 따로 없었다.
맹구도는 두 사람의 불안 가득한 얼굴을 보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차분하게 다독였다.
“아아, 괜찮으니, 두 분께서는 마음을 놓으시구려. 지금은 여기보다 더 안전한 장소는 아마 없을 거요.”
“그, 그래도.”
“그래요, 다른 걱정 할 것 없어요. 고 사형도 그렇지만, 저기 요광 스님도 계시니까. 하동에서 여기가 제일 안전한 장소일 겁니다. 금방 마무리하고 오실 거예요.”
단청이 살짝 시큰둥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뭇가지를 뚝뚝 꺾어서는 불가에 던져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