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299
299화. 천살도(天殺刀) 만검천(萬劍天) (4)
고진무는 퍼뜩 어깨를 떨었다.
찬 바닥에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인지, 으슬으슬한 한기가 올라왔다.
‘아니, 그럴 리가.’
고진무는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찬 바닥 탓이 아니라, 마주하고 있는 무림의 큰 어른 덕분이다.
서슬 퍼런 눈초리라고 하면, 딱 혈도조사의 눈길이 아니겠는가.
서리 앉은 듯이 무성한 눈썹을 한껏 찌푸리는데, 눈썹 아래로 푸르스름한 안광이 맴돌았다. 한겨울의 얼음조각을 품은 듯했다.
그래도 일단 자리를 옮겨서 홍련사의 대웅전 안이었다. 그간 전혀 돌보지 않은 탓에 먼지가 수북했고, 구멍 난 천장으로 기울어가는 햇빛이 붉게 떨어졌다.
본래 불상이 놓여 있을 법한 좌대는 텅 비었다. 그리고 혈도조사가 한쪽 무릎을 세운 채 편히 앉아서 고진무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고진무는 눈길을 그대로 받으면서 얌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서 도우빈이 벌을 받고 있었다.
기마 자세를 하고서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는데, 머리통만 한 돌덩이를 들고 있었다. 일단은 버틸 만한 모양인지, 도우빈은 얼굴만 잔뜩 찌푸렸다.
혈도조사는 입매를 비틀고서, 말없이 고진무의 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하얀 눈썹 아래에서 번뜩이는 푸르스름한 눈초리가 마치 칼날이 스치듯이 예리했다. 고진무는 모골이 송연했다.
혈도조사는 곧 힐난하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네놈 꽤 간특한 짓거리를 하더구나.”
“염치없게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허, 뭔 도움을 받았는지는 알기나 하고?”
“예.”
고진무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혈도조사의 성난 눈초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어찌 모를까.
저도 모르게 일어난 일이라고 하지만, 참으로 무리한 짓을 저질렀다. 게다가 제대로 수습조차 못해서 혈도조사의 도움까지 받았다. 결례도 이만한 결례가 없을 터였다.
‘어이쿠, 최악의 첫인상이겠구나.’
고진무는 속으로 자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도움만 받은 게 전부가 아니었다.
혈도조사는 고개 숙이는 고진무의 머리꼭지를 더욱 새하얗게 노려보다가 그만 혀를 찼다.
“거참, 이 늙은이가 십수 년을 꼬박 연공한 것을 그런 식으로 훔쳐 가려고 하다니. 고약한 놈이로다. 참으로 고약해. 에이잉!”
“…….”
고진무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이제는 죄송하다는 둥, 사죄의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고자 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천살도, 자신을 에워싼 천살의 살기를 마주하면서 만검귀일을 떠올렸고, 그로부터 퍼뜩 심득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
만검고에 갖춘 안배를 통해 흉내 낸 만검귀일이 아니라, 진정 일검을 휘둘러서 만검을 이루어 내는 신인의 만검귀일의 심득이었다.
만검의 검기라면, 천살의 살기에 대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자신을 잊은 채 만검귀일의 구결 속에서 손을 뻗었지만, 역시 만검의 검기를 부리기에는 자신은 한참 부족했고, 천살의 살기는 방대했다.
십수 년 동안 고여 온 살기의 흐름을 한순간에 걷어 낸다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혈도조사가 손을 쓰지 않았다면, 과연 어떠하였을지.
적어도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도 떨쳐 낸 검기가 천살의 살기를 거스르면서 그 흐름을 읽어 냈으니. 의도가 어떻든 결과만 본다면, 지금 혈도조사가 타박하는 그대로였다.
천살도의 심득 일부를 훔치다시피 한 셈이었다.
멋쩍은 그에게, 혈도조사는 이내 입술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크흠, 천살기가 약간이지만 스며드는 건 피하지 못했다. 꽤 고생이겠지만, 그걸 어찌하느냐는 네놈 운이겠지.”
“예, 조심하겠습니다.”
고진무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면서 고개 숙였다. 그는 은근히 맴돌고 있는 한기를 다시금 선명하게 느꼈다.
혈도조사가 경고한 천살의 흔적이었다.
역시 혈도조사, 그의 위명, 그의 이름, 그리고 대단한 존재감까지.
고진무는 혈도조사가 이루어 낸 경지가 얼마나 까마득한 것인지를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살기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사람의 기척은 조금도 없었다.
눈 감으면 칼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듯했다.
도신일체(刀身一體)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그보다 몇 단계를 훌쩍 뛰어넘은 경지로, 고진무는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이야말로 진정 비인의 경지라고 하는 건가.’
고진무는 애써 차분하게 있었지만, 그래도 가슴이 쿵쿵 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호의 전설을 딱 마주한 셈이 아닌가.
고진무는 마른침을 어렵게 삼켰다.
“허어, 뭐냐. 또 멍하니 있으니. 설마 지금 또 난리를 치겠다는 게냐?”
“아, 아닙니다. 내부의 기운이 잠시 흔들린 탓에…….”
“흐음, 그래?”
혈도조사는 팔짱 끼면서 슬쩍 고개를 비틀었다. 사뭇 흥미롭다는 듯한 눈초리였지만, 지금 고진무의 상태를 떠들 때는 아니었다.
“그래, 네놈이 정신 놓은 틈에, 대강을 듣기는 하였다. ‘교’라고 한다는 놈들이 있다고?”
“예, 조사. 그렇습니다.”
“흐음.”
고진무는 부랴부랴 정신을 차리고서, 새삼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여기 혈사까지 찾아온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교’가 벌인 온갖 참담한 일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껏 여러 일이 있었지만, 특히나 살정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사이 기울어 가던 햇빛은 이미 한참 전에 저물었고, 대웅전 내부는 어둑어둑했다.
밖에서 발 빠르게 불을 밝혀서 등불 빛이 구멍이 숭숭 난 문창을 통해서 비추어 들어오기는 했지만, 햇빛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주변이 어둑하니 혈도조사의 안광은 더욱 새파랗게 번뜩였다. 그는 눈빛을 빙글 굴리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성마, 마도, 거기에 살정이라고?”
혈도조사는 주름 깊은 미간을 더욱 찌푸렸다. 불쾌한 기색도 그렇지만, 이해하기 어렵다는 기색이었다.
지금 강호에 그들이 모습을 드러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특히 성마, 그의 실체를 마주한 바 있는 혈도조사였다. 그는 얼굴을 구긴 채 슬쩍 오른쪽 소매를 그러쥐었다.
노인은 불퉁한 어조로 되물었다.
“확실한 일이냐? 살정 것들도 그렇겠지만, 성마의 졸개 놈들이 지금 활개를 치고 있다는 건 실로 믿기 어렵다. 그놈들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닌 바에야.”
더구나 따로 세력을 이루었다니.
아무리 성마가 신검에게 패배하여서 천산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다지만, 엄연히 건재하고 있었다. 그런 성마의 뜻에 반하는 마도잡졸이라니.
얼굴 구기는 그에게, 고진무는 차분하게 말했다.
“이는…… 남천신묘께서 직접 확인한 일입니다.”
“남천이. 흐음, 그렇군.”
혈도조사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눈썹 아래에서 일렁거리는 안광에는 여전히 의구심이 짙었다.
“아무래도 좀 더 자세하게 들어 봐야겠구나. 저 녀석이 둘러 댄 핑계에 대해서도 그렇고.”
중얼거리면서 혈도조사는 고개를 돌렸다.
두 팔 치켜든 도우빈은 힘겨운 와중에도 조사의 눈초리에 덜컥 고개를 돌렸다.
딴 곳을 보면서 한참 딴청이었지만, 내내 그렇게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혈도조사의 눈썹이 바짝 치솟았다.
“칼 한 자루 찾아오면서 강호 경험이나 쌓아 보라고 하였더니. 칼은커녕 제놈 칼마저 잃어? 게다가 바로 돌아올 생각은 않고, 어디? 종남파?”
목소리에 스르륵 날이 섰다.
그러자 도우빈은 낑낑거리는 와중에도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 제가 뭘 어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단 말이에요. 무슨 요괴가 튀어나오고, 괴인이 칼부림하고 막 그런 상황이었는걸요.”
정말 죽다 산 상황이었다. 칼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그러자 혈도조사는 눈동자를 데굴 굴려서, 고진무를 향해서 눈짓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눈초리였다.
“만검산장의 일은 우빈 동생의 말대로입니다. ‘교’의 무리가 마수를 뻗으면서, 산장 아래에 오래도록 봉인하였던 검룡이라는 요괴가 깨어났지요.”
“검룡, 요괴란 말이지? 쩝, 그래 뭐, 성마 같은 괴물도 있으니, 요괴라고 없겠나.”
혈도조사는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도우빈은 눈치를 살살 보다가, 배시시 웃으면서 팔을 내렸다. 돌덩이 든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런데 다시금 혈도조사의 눈초리가 확 파고들었다.
“그렇다고 그만하라는 말은 아니고!”
“으익.”
도우빈은 찔끔하여서는 퍼뜩 두 팔을 다시 치켜들었다. 그래도 입술은 닷발이나 튀어나왔다.
“크흠, 알았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이래저래 가만히 놓아둘 자들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군. 게다가 하동을 발판으로 삼으려 들었다고?”
“예, 조사. 귀살적이라고 하는 비적 집단이 있었습니다. 지난 수 년 동안 하동을 장악한 비적이었다더군요. 한데, 그곳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교’의 하수인이었습니다.”
“흐으음!”
혈도조사의 목소리 끝이 바짝 솟구쳤다. 찌푸린 눈썹 끝에서 푸른빛이 짙게 맴돌았다.
비록 근래에 큰 활동이 없었다고 해도, 하동에는 혈사가 있었다.
비적 따위가 날뛰었다는 것만도 한참이나 못마땅한 일이건만, 그것들을 앞세워서 감히 하동 땅을 차지하려 들었다는 것인가.
“허, 허허! 괘씸한 것들이로다.”
어이없는 웃음은 짧았다.
혈도조사는 이내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고진무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그만큼 살기가 자유자재라는 뜻이었다.
역시 혈사혈도, 칠신의 한 사람이다.
고진무는 마른침을 삼켰다. 당장 고해야 할 것은 다 고하였다. 그는 이내 품속에서 한 통의 전서를 꺼냈다.
“조사, 이것은 본파 장문인께서…….”
“흐음, 종남파 장문인이라.”
혈도조사는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전서를 물끄러미 볼 뿐, 먼저 손을 뻗지는 않았다.
순간 침묵이 내렸다. 고진무는 그 앞에서 슬쩍 눈치를 살폈다. 대웅전에서는 도우빈이 낑낑거리는 소리만 낮게 맴돌았다.
혈도조사는 끝내 고진무 앞에서 전서를 펼치지 않았다.
고진무는 대웅전에서 조용히 물러 나왔다. 그리고 폐허 꼴인 홍련사에서 그나마 멀쩡한 선방을 찾아서 들어섰다.
참으로 길고도 긴 하루였다.
고진무는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지쳐서는 다 낡은 침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쌓인 먼지가 뽀얗게 흩어졌지만, 고진무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고꾸라져서 푹 잠들었으면 했지만, 아무래도 그럴 수는 없을 듯했다.
고진무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고서 막 들어선 문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이런…… 아무래도 쉴 때가 아닌 모양이군.”
쓴웃음이 짙었다.
문밖에서 한참 노골적인 살기가 맴돌면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비록 천살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저 살기 또한 상당한 경지였다.
고진무는 숨을 차분하게 삼키고 힘주어 무릎을 잡고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서자, 달빛이 떨어지는 자리에 요광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가 드리운 그림자가 짙었다.
“흐.”
요광은 자신의 살기에 반응하는 고진무를 보면서 히죽 웃었다. 이를 드러내는 웃음은 흡사 사냥감을 발견한 야수처럼 보였다.
그만한 위압감이었다.
고진무는 그 앞에서 묵묵히 두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요광은 고개로 뒤쪽을 가리키면서 짧게 말했다.
“자리를 옮기지, 검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