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387
387화. 천외천(天外天) (2)
양유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후우.
가늘게 숨을 밀어내고, 먼지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는 일대를 둘러보았다.
바람은 그쳤고, 정신없이 흩날리던 모래가 서서히 내려앉으면서 일대가 황토색으로 짙게 물들었다. 너머의 하늘에서는 햇빛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장 열기가 엄습했다. 그래도 양유의 얼굴에는 다른 표정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친 모래가 파고들어서 꼴이 엉망이었지만, 따질 겨를은 없었다.
깊은 구덩이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이제야 올라섰다. 몸을 살짝 돌리는 것만으로도 굵은 모래가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고 소협.”
당연하겠지만, 주변의 어디에서도 고진무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구덩이 앞에는 밀려온 모래가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고진무가 다급하게 바위기둥을 무너뜨린 덕분이었다. 아니면 저기 높이 쌓였던 모래가 고스란히 머리 위를 뒤덮었을 터였다.
양유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흩날리는 옅은 모래바람 속에서, 그는 눈에 불을 켰다.
“으, 으으.”
아래에서는 아직 신음이 맴돌았다. 요씨의 젊은이들이 어찌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바로 밖으로 뛰쳐나오지는 못했다.
양유는 그들의 안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말이 문제였다.
돌보던 말들을 풀어주고 서둘러 도망하게는 했지만, 과연 무사할지는 모를 일이었다.
“크으, 괜찮으십니까?”
“괜찮소. 괜찮고말고.”
요하동이 어렵게 올라오면서 물었다.
그 또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기껏 안내인으로 여기까지 왔건만, 막상 위험이 코앞에 닥쳤을 때에 제대로 한 게 하나도 없다니.
오히려 고진무에게 큰 도움을 받았지 않았는가. 가문의 젊은이 모두가 무사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의협심 덕분이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보답할 수 없을 터였다.
요하동은 착잡함을 감출 수도, 양유 앞에서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입 다물고 있을 수도 없지 않겠는가.
“후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죄송합니다. 길잡이라고 나서 놓고 모래 폭풍 하나를 제대로 예측하지 못해서 이런 꼴이라니.”
“아니, 아니오. 요 어르신께서 죄송할 일은 아니니.”
“허나…….”
“말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고 소협은 바람에 휩쓸렸겠지만, 분명 어딘가에 무사히 있을 겁니다. 그렇게 쉽게 갈 사람이 아니에요.”
양유는 단단하게 말했다. 요하동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전날의 모래 폭풍을 떠올리면, 지금도 절망이 먼저 가슴을 흔들었다. 나서서 수습한 고진무야말로 오히려 사람이 아닌 듯한 정도였다.
그런 일이 설마 가능하리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와중에, 양유의 뒷모습을 보면서 부질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요하동은 입술을 단단히 깨물었다.
‘그래, 일이 이리된 것, 시신이라도 마땅히 찾아야 할 일이지 않은가.’
고진무의 생사는 굳이 고민할 바가 아니지만, 큰 은혜를 입은 마당이었다.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그는 퍼뜩 두 눈에 불을 켜고서, 주저하는 젊은 녀석들을 돌아보았다.
“뭘 머뭇거리는 게냐. 어서 움직이지 않고!”
다그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제야 요씨 젊은이들도 후다닥 모래 구덩이 속에서 바득바득 기어 올라왔다.
그들도 아주 눈치가 없지 않았다. 귀빈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희생으로 구함을 받은 처지였다.
특히 멀리까지 나가 있다가 뒷덜미를 잡혀서 구덩이 속으로 날아갔던 둘은 얼굴부터가 시커멓게 물들었고, 두 눈은 이글거렸다.
말을 찾는 것은 잠깐 헤매기는 했지만, 요씨 젊은이들도 작정하고 서둘렀다.
모래 폭풍 속에서 어렵게 살아남았는데, 말을 잃고 헤매다가 다시 위험에 처할 수는 없지 않은가.
천운이 따른 것인지, 예비 짐말로 끌고 온 몇 마리를 제외하고 대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말들은 모래 폭풍을 피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자리로 다시 돌아왔다.
말들도 사람 없이는 여기 사막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껏 지쳐서 꼴이 엉망이었고 체력도 바닥이었지만, 말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일단 안도할 일이었다.
요씨 젊은이들은 고삐를 다잡고서, 말의 상태를 살폈다.
모래에 할퀴어서 크고 작은 상처가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본래 속도를 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이동은 할 수 있는 상태였다.
요하동 또한 자신의 애마를 찾았다. 그 말이 다른 말들을 대부분 이끈 덕분에 무사히 마주할 수 있었다.
요하동은 곧 고삐를 끌고서 양유에게 다가섰다.
“대인,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은…….”
양유는 잠시 멈칫했다. 그는 고진무의 무사를 믿고 있었지만, 여기서 말머리를 돌릴 수는 없었다.
그는 숨을 다잡았다. 적어도 겉모습으로는 다른 감정의 동요가 드러나지 않았지만, 말고삐를 틀어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고진무의 행방도 물론이지만, 당장 이곳까지 어렵게 달려온 목적이 무엇이었던가. 바로 신검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요하동은 그래도 눈치가 상당했다. 표정이 없다지만, 양유가 갈등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양 대인, 일행을 나누도록 하지요.”
“일행을?”
“그렇습니다. 양 대인과 이 늙은이가 목적한 곳으로 향하고, 젊은 녀석들로 하여금 고 소협을 찾도록 하지요. 어떠신지요?”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겠군요. 그리하지요.”
“예.”
양유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마음은 무겁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대처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요하동은 곧 십여 명의 젊은이를 불러 모았다.
그들 중에서 맏이라고 할 수 있는 요송현이 특히 앞으로 나섰다.
“어르신.”
“너희가 고 소협을 찾아주어야겠다.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목숨의 구함을 받은 처지인 것을요.”
요송현은 한층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갈색 피부에 눈썹이 짙었다. 한쪽 얼굴에는 긁힌 상처가 남아 있었는데, 바로 구덩이 속에 그대로 처박히면서 남은 상처였다.
그는 고진무에게 직접 구함을 받은 당사자였다.
“폭풍에 휩쓸렸다면, 오히려 뒤로 향했을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이 남긴 흔적을 추적해 보겠습니다.”
“그래, 맡기마. 신중을 기하여라.”
“예!”
“예!”
요송현뿐만 아니다. 다른 요씨 젊은이들도 한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그들은 당장 입술을 질끈 깨물고, 심각하게 미간을 바짝 모았다.
***
고진무는 햇빛이 밝은 자리에 가부좌를 취하고, 허리를 곧게 세웠다. 두 무릎 위에 청명검을 올려놓았다.
머리 위에는 구름이 낮게 고여 있었다. 손을 뻗으면 구름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곳은 또 다른 선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분명 막북의 아득한 사막 한가운데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모래 폭풍에 속절없이 휩쓸렸다가, 신검에게 구함을 받은 처지였다. 그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눈동자를 굴렸다.
숨을 돌리면서 운공까지는 아니더라도 명상에 들고자 했지만, 평소처럼 자신에게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신검이 눈앞에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는 성마가 그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명상에 들 수가 있을까.
‘으아, 이게 꿈이 아니라니.’
신검과 성마가 함께 있는 자리에 자신 또한 있다니.
이것을 두고서 기연, 아니 그 정도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천운이 따른 것은 물론이고, 분명 전생의 공덕이 지금 다 모인 게 틀림없을 터였다.
고진무는 숨을 삼키는 것도 조심했다. 두려움과 경외가 같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동자를 굴리며 곁눈질로 주변을 힐끔거렸다.
신검은 그저 고요하게 있을 뿐이지만, 성마는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여기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땅치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초리 때문에 뒷골이 뻣뻣할 지경이었다.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눈초리는 이렇게 선명하게 느껴지다니. 이것도 참…… 신기하다면 신기한 일이네.’
“흐음, 너도 참 신기한 녀석이구나.”
불현듯 윙윙 목소리가 울렸다.
고진무는 흠칫 어깨를 크게 들썩였다.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는데, 누구 한 사람의 입에서 말하는 게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은 여럿의 목소리가 뒤섞여 있었다. 그 말 또한 온갖 민족의 언어가 같이 뒤섞였다. 그런 와중에 익숙한 언어 하나가 귀를 파고들었다.
고진무는 숨이 딱 멎었고, 입안이 바짝 말랐다.
성마의 말을 설마 직접 들을 줄이야.
그러나 긴장한 것과는 별개로 검심은 고요했다. 아울러 청명검의 서늘함이 손을 타고 스며들어서 정신을 일깨웠다.
굳이 움츠러들지는 않았지만, 고진무는 청명검에서 일어나는 한기를 마다치 않았다.
고진무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귓가에서 속삭인다고, 성마가 바로 옆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눈길만으로 자신과 신검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가 어찌나 무거운지.
고진무는 문득 함부로 세상 밖으로 나가면 천리가 어그러진다는 신검의 얘기가 새삼 떠올랐다.
‘하기야, 달리 천외신성일까.’
고진무는 천산 아래에서, 성마를 신성시하는 호칭을 떠올렸다. 그 속내를 뻔히 들여다보는 것인지, 성마가 다시 말했다.
“그 이름을 아는 걸 보면, 너도 천산에서 온 게냐?”
“예, 천산 가까이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화들짝 놀라기보다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랄 일이 아니었다.
성마라면 당연한 일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자신의 속내를 감추겠다고 크게 애쓰지도 않았다.
“흐으음, 네 녀석에게서 반편이 검객 놈의 흔적이 보이는구나. 그놈의 후인이냐?”
“어인 말씀이신지……?”
고진무는 불쑥 건네는 성마의 물음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누구의 후인이라고 하는 것인지, 잘못 들은 듯했다.
“허어, 이놈.”
잠깐이지만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불편한 소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고진무는 퍼뜩 어깨를 흔들었다.
한순간, 공기 속에서 무형의 칼날이 튀어나온 것만 같았다.
고진무는 수십, 수백, 아니 그 이상의 칼날이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것을 느꼈다.
‘윽!’
전신을 노리는 칼날의 섬뜩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고진무는 그래도 신음을 끝내 다잡고서 눈을 똑바로 떴다.
보이는 게 없다고 하지만, 고진무는 성마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도저히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움츠러들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차마 검을 뽑을 수는 없었지만, 청명검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허, 이놈 봐라.”
성마는 자신이 드러낸 위엄 앞에서도 주눅이 들기는커녕 흔들림 없이 눈을 바르게 뜨는 고진무를 어이없다는 듯이 여겼다.
헛웃음이 맴돌았다. 그러나 이내 밀려오는 것은 칼날의 예리함을 넘어서, 선명한 살의였다.
“그만하시지요.”
“응? 깼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검이었다.
동시에 고진무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짙은 살의는 물론, 무수한 칼날의 예리함 또한 스르르 흩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진무는 흔들릴 뻔한 숨을 다잡았다.
눈을 뜬 신검은 성마의 압박을 버틴 고진무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들어서 너머에 있는 성마를 바라보았다.
“여기 소형제는 그 검오 선생의 제자가 맞습니다.”
“흠, 역시 그런가. 그 반편이 검객 놈…… 쳇!”
성마는 불쾌한 심중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고진무는 그제야 반편이 검객이라는 말이 검오를 뜻하는 것을 알고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으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