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436
437화. 추락파륜(墜落破輪) (3)
목이 잘렸다.
등장한 도고는 참 깔끔하게도 한 수에 단두(斷頭)해 버렸다.
그렇게 힘을 쓴 것도 아니고, 공력을 집중한 것도 아니었건만 닿아있는 검을 끌어당기는 한 수에 검날은 피를 머금었고, 섬뜩한 빛줄기를 남겼다.
선홍의 핏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확 치솟았다.
유연은커녕 신음조차 변변히 내뱉지 못했다. 백호량은 갈라진 목덜미를 반사적으로 부여잡고서 버둥거렸지만, 잠깐의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흑상개는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리고 말문이 막혔다.
괴상한 공력을 바탕으로 격공장을 마구 흩뿌리던 무위를 생각하면 참으로 허망한 최후가 아닌가. 입을 열어도 어버버, 맹한 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 마교의 잡졸을 베어야 한다면 굳이 말릴 이유도, 충격을 받을 이유도 없다. 무공의 고하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눈앞에서 고꾸라지는 백호량에게는 또 다른 신분이 있지 않은가.
‘교’의 마인이면서, 동시에 엄연한 관인이다. 그것도 단순한 미관말직이 아니라, 남경 응천부에 속한 포두란 말이다.
강호의 야인이 이런 식으로 참살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일은 벌어지고 말았는데. 잘린 목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흑상개는 초점이 흐린 눈으로 쓰러진 포두 백호량의 시신을 빤히 보았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그래도 개방의 젊은 제자 중에서 머리가 잘 돌아가는 편이라고 자부했지만, 그저 잔머리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생각이 멈춰버리다니.
흑상개는 무릎에 도통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흙투성이 꼴로 맥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옆으로 눈동자를 굴려서 등장한 도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도고는 남색 도포를 단정하게 걸쳤고, 틀어 올린 속발로 나무 비녀를 꽂았다. 하얀 얼굴에는 눈썹이 짙었고, 붉은 입술을 고집스럽게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늘어뜨린 고검은 한눈에 보기에도 보검 중의 보검이었다.
흑상개는 느릿하게 눈을 끔뻑였다.
여인은 분명 도고의 차림을 하고 있지만, 진짜 출가한 도고는 아니었다.
“다, 단청 여협.”
흑상개는 신음하듯이 그를 불렀다.
종남파의 단청이었다. 단청은 흑상개를 힐끔 바라보았다.
“거지 소협, 뭘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겁니까?”
“허어, 이, 이게 이러면 안 되는 일입니다.”
“안 될 건 또 뭐랍니까. 이자의 윗선까지 본파에서 마무리하였으니. 이걸로 남경부에서 ‘교’의 무리는 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아니,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이자는 관인입니다. 관인이에요.”
“흠, 그렇죠.”
단청은 기겁하는 흑상개를 참 별스럽다는 듯이 보면서, 보검을 거두었다.
청광을 품은 고검은 맺힌 한 방울의 핏물을 떨쳐내고서, 푸른 궤적을 남기며 검초 속으로 얌전히 들어갔다.
스승인 청과 도고에게 받은 보검, 연청이었다.
무조궁의 보검으로 ‘교’의 무리를 단호하게 베어 버린 셈이었다.
단청은 주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가 포두가 아니라, 더 높은 고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거지 소협. 그렇게 기겁할 것 없습니다. 관에서 다른 말을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 얘기가 된 일입니다. 후환 같은 것도 없을 거예요.”
“예에? 관과 얘기가 되었다고요? 후환이 없다니, 그럴 리가.”
관부라는 놈들이 얼마나 콧대 높은 자들인데 호락호락 물러나겠는가.
단청은 흑상개의 불신 어린 눈길에도 담담할 뿐이었다.
“소협, 황성사에서 나섰습니다.”
“황성…… 사.”
흑상개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정신이 번쩍 돌아오는 말이었다.
황성사라고 하면 대내의 특수한 감찰 기관으로, 관리들에게는 저승사자 소리를 듣는 무시무시한 자들이 아닌가.
한 번 끌려가면 대단한 고관대작이라 해도 좋은 꼴을 볼 수 없다는 악명이 자자했다.
그런 황성사가 ‘교’를 토벌하는 데에 나섰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황명이 떨어졌다는 뜻이다.
“황, 황궁에서도 ‘교’를 토벌하기로 한 것입니까?”
“남천신묘께서 직접 움직이셨습니다. 마침 대내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더군요. 거기에 이번 소탕으로 다시금 남은 무리를 뽑아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허어, 이 정신 나간 자들이 황성에서도 일을 벌인 것입니까?”
“예.”
단청도 이번에는 한층 복잡한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황사가 어떻고 하는 자를 남천신묘와 양가의 제일창이 처리하였다는 것을 귀동냥한 바가 있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을 줄이야.
덕분이라면 덕분으로, 황궁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셈이지 않은가.
“그러니. 거지 소협께서 걱정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자에 대해서도 황성사에서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흑상개는 정말로 안도하는 심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시 생각해도 참 끔찍한 순간이지 않은가. 살정의 정보가 없었다면, 또 종남검성이 나서지 않았다면 과연 어떠하였을지.
흑상개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념에 그만 목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했다.
진정으로 큰 화가 가까운 곳에서 꿈틀거리는 줄도 모르고서 개방의 거지랍시고 거들먹거렸다니. 진정으로 큰 화를 방치할 뻔했다.
시기를 놓쳤다면 과연 어떠하였을지.
흑상개는 놀란 가슴을 다잡으면서도, 새삼 담담한 단청의 안색을 곁눈질로 흘깃 살폈다.
아무리 황명이 있었다고는 해도 그렇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포두의 목을 단숨에 베어 버리는 단호한 모습이라니.
‘역시 종남파라는 건가.’
흑상개는 새삼 종남파의 위명이 자자한 이유를 실감할 수가 있었다. 그렇게 감탄하는 속내는 둘째 치고, 그는 곧 목 잘린 포두의 시신을 돌아보면서 얼굴을 구겼다.
생각하면 아직 일이 모두 끝난 건 아니었다.
마지막 수습까지 모두 마무리해야, 비로소 온전히 끝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이고, 이런…….”
불쑥 앓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생각하면 이곳은 응천부의 외부였고, 흑상개는 혼자 수상한 자를 추적한다고 따로 수하를 두지도 않았다.
결국 이 난장판을 손 쓸 사람이라면, 흑상개 말고는 단청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흑상개는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일어나며 단청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금 고개를 돌리면서 에효, 한숨만 애써 짧게 흘렸다.
고진무는 성은장에 남아서, 주변의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천외루가 멈추면서 ‘교’는 확실하게 허점을 드러냈다. 적어도 가까이 있는 남경 응천부 뿐만 아니라 경동, 경서, 그리고 회남의 동서까지.
동경을 포함한 동북부 일대에서 파악한 ‘교’의 무리를 모두 치워버린 셈이다.
“단단히 숨은 몇이 더 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무리를 짓고 있는 자들은 더 없겠습니다.”
“흐음.”
고진무가 눈앞에 쌓여 있는 시커먼 대나무 조각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중얼거렸다. 막상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이 또한 그 말에 공감하는 바였지만, 선뜻 맞장구칠 수는 없었다.
노인은 한참 복잡한 기색으로 저도 모르게 낮은 신음을 흘렸다.
고개 숙인 성은장주, 채태경의 주름 가득한 얼굴에는 시름이 짙게 맺혔다.
늙은 의원은 이제껏 성은장에서 환자를 치료하는 데에만 집중해왔다. 천외루를 비롯한 강호의 일에 대해서 깜깜한 것은 한참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런 노의원이 옆에서 잠깐 보기에도, 고진무의 말처럼 더는 남은 자가 없을 듯했다.
고진무가 성은장에서 천외루의 흔적을 지워 버린 지 고작 며칠 만에 각지에서 죽편 조각이 날아왔고, 그 전부가 어느 곳의 최후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 것이 지금 서탁 위에 한 가득이었다.
노의원은 쌓여 있는 죽편에서 눈을 떼고, 고진무의 눈치를 살폈다.
“장주께서는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고진무는 머뭇거리는 노의원의 속내를 읽었는지, 살피던 죽편을 내려놓고서 담담하게 물었다. 고개 돌린 그의 눈빛이 담담했다.
“그, 그게. 그.”
노읜원은 말문이 막혔다.
말 꺼내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자신도 어떻게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런 주저함을 고진무는 헤아리고서, 노인이 제대로 말 꺼낼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괜히 되물었다가는 아무리 좋게 말한다고 해도, 노의원의 말문을 막는 셈이니까.
“크, 크흠. 내 고 검객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 알겠소만, 그래도 본장에 계속 머무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위험한 일이지 않겠소?”
“천외루주가 따로 사람을 보내리라고 보십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소?”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그러자 고진무는 웃으면서 답했다.
“예, 그래서 기다리는 중입니다.”
“허, 허어?”
“천외루가 전부가 아닙니다. 성륜교라고 하는 자들이 있지요. 그들 또한 찾아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답니다.”
“성륜이라.”
노의원은 고진무가 잠시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근교에서는 따로 들은 바가 없는 이름이었는데, 크게 낯설지도 않았다. 어디서든 스치듯이 들은 듯했다. 아니, 그런 이름은 아무래도 좋았다.
노의원은 고진무가 오히려 천외루의 다음 수를 기다리고 있다는 얘기에 목 뒤가 뻣뻣하게 굳는 듯했다.
‘분명 이곳에서 충돌할 텐데. 그럼…… 그 여파를 대체 어찌 감당하라는 말인가…….’
그때였다.
고진무가 살피던 죽편을 탁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흠, 왔군요.”
“억! 벌써?”
노인은 앙상한 손으로 후다닥 의자 팔걸이를 붙잡았다. 긴장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고진무는 기겁하는 그에게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그들이 아닙니다.”
“그, 그럼……?”
“사형!”
밖에서 묘령의 여인이 맑은 목소리로 외쳤다.
단청은 흑상개와 함께 성은장으로 들어섰다. 고진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곳은 전혀 변함이 없군요.”
“그런가요?”
흑상개는 새삼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며칠 전에 큰일이 벌어진 곳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여전히 찾아오는 환자는 많았고, 의원과 일꾼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흑상개는 지친 기색으로 후우, 숨을 돌렸다.
몸이 힘든 게 아니었다. 이제는 정신이 피로했다. 그렇다고 하소연하거나, 따로 숨 돌릴 틈은 없었다.
한걸음 앞에서 단청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변으로는 조금도 눈길 돌리지 않았다. 아주 익숙한 모습으로 바로 장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사형!”
“단청 사매, 갔던 일은 잘 되었나?”
고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들어서는 단청을 맞이했다.
“예, 사형. 남천궁 검파는 과연 훌륭하더군요.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응천부에서 외곽으로 도주하려는 자가 있어서 같이 베었습니다.”
“도주를?”
“예, 검성. 헤헤, 그 일은 제가 말씀드리지요.”
“흑상개 소협.”
흑상개가 단청의 뒤에서 슬쩍 고개를 내밀면서 대꾸했다. 처리한 것은 단청이라지만, 자신이 꾀를 내어서 추적하던 자이니만큼, 설명도 자신의 몫이지 않은가.
어차피 그렇게 길게 설명할 건 없었다.
고진무는 자초지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일이 그렇게 되는 거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