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ngnam Sword Castle RAW novel - Chapter 50
50화. 석가의 두 얼굴 (5)
“찾았! 나?”
영 자신감이 없어서, 말끝이 쑥 올라갔다.
석중천이 책자와 죽편 무더기 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찾아든 것은 다 삭아버릴 것처럼 새카맣게 물든 죽간이었다.
두툼한 죽간을 엮어낸 매듭, 매듭이 당장 가루가 되어버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만큼이나 오래된 물건이다.
중시조 석불파, 그가 남긴 기록이다. 석중천은 어렵게 내려왔다. 머리에, 어깨까지 먼지가 그득했지만 털어낼 틈도 없었다.
일단 매듭을 풀어내는 것부터가 일이었다. 한참 조심한 끝에 정말 어렵게 죽간을 펼칠 수 있었다.
새카만 죽편마다 흐린 글자가 간신히 남아 있었다. 겉에도 그렇지만, 내용 또한 옛적 문자였다.
“으으…….”
석중천 눈동자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살펴갈수록 얼굴이 점점 떨떠름하게 물들어갔다.
“어찌 그러나? 찾는 게 아닌가?”
“이게 찾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라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석중천은 죽간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얼굴이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곧 죽간을 들고서 고진무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괜찮겠나? 가문의 귀중한 기록일 텐데.”
“괜찮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른 법도를 따질 때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에효.”
석중천은 차마 말을 다하지 못했다. 다른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고진무는 조심히 죽간을 들고서 한층 유심히 글귀를 헤아렸다. 확실히 옛적 문자였다.
종남파라고 어디 무공일로에만 집중하겠는가. 선인의 무학을 전하고 남기는 데에 문자가 없을 수가 없는 일이니.
그런 까닭에 옛적 문헌에 관한 공부도 적지 않았다. 그런 중에는 옛적 문자에 대한 식견도 필요한 법이라. 술술 읽어 내리지는 못하지만, 실마리를 찾는 중이었다.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고진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살피면서, 석중천이 복잡한 표정을 지은 이유를 알 만했다.
이것은 중시조가 남긴 기록임은 분명했지만, 비결 그 자체를 남긴 게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 천산을 찾았고 신비를 마주했는가에 대한 기록이었다.
젊은 가주.
선대가 흩어지고, 남은 가솔을 어떻게든 돌보았을 뿐만 아니라, 가문의 업보이며 과업을 자신 대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궁리한 젊은 영웅의 고난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고진무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산에서 얻어온 비결은 이를테면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내린 고진무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죽은 자를 세운다?”
“예, 중시조께서는 그러한 비결을 천산에서 얻었다고 하시네요.”
“으음.”
죽은 자를 세운다. 명부령(冥府令)이라는 이름으로, 명부의 한기로 시신을 움직이는 술수였다.
석불파는 이 비결을 얻어서 폭주하는 천년빙주를 다잡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낸 것이 바로 팔륜법사이다.
“그래서 팔륜법사를 노리는 셈이군요.”
석중천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 돌렸다.
팔륜법사, 여덟 구의 시신이 빙주 가까이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천년빙주의 한기를 직접 받아들면서 썩지 않는 시체, 움직이는 시체, 즉 강시가 되어버린 여덟 선인이었다.
저들을 부리는 일은 술법 수발이 능수능란하더라도 될까 말까 한 일이련만, 지금 석중천은 그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가문의 대적을 두고서 팔륜법사를 앞세울 수 없는 일이었다.
석중천은 한숨 흘리기도 민망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서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방편이든 내야 할 텐데.
고진무는 죽간과 팔법륜사의 얼음장 같은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외적과 빙주의 폭주에서 가솔을 지키고자 스스로 몸 던진 여덟 고수.
혼은 하늘 높이 올라갔으려나, 백은 여기에 남아서 차가운 몸을 지키고 있으니.
고진무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죽간에는 명부령이라는 비결은 물론, 법사를 이루어내는 비결도 따로 나오지 않았다. 그저 희생한 여덟 고수에게 비술을 펼치면서 후회하고 한탄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었다.
비결은 굳이 전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석가 중시조, 석불파라는 분은 참으로 대범한 분이시구나.”
“예, 예?”
묵묵히 고개 끄덕이다가 석중천은 퍼뜩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시조가 대범하다. 그저 하는 말이 아니라, 다른 뜻이 있는 듯했다.
“비결은 기록하지 않으셨지만,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만하군.”
한숨이 섞여 나왔다. 그 말에 석중천은 눈만 깜빡였다.
한참을 뒤져서 나온 거라고는 비결이 아니라, 비결을 찾고자 고생한 내용뿐이다. 그런 와중에서 비결을 알겠다니. 정작 계승자라 할 자신은 깜깜하건만.
“그 비결이 뭔데요?”
“석가공력의 기본, 황운기공. 그 자체에 비결이 섞여 있어.”
“예에?”
고진무는 단단한 얼굴로 성에가 가득 맺혀 있는 빙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윳빛과 동시에 싸늘한 한기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본래에 비하면 터무니없을 만큼이나 줄어들었다.
저렇게까지 빙주가 작아진 것은 단지 자연으로 기운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바탕 폭주가 있었다고 하지만, 이후로도 끊임없이 기운을 소진했기 때문이다.
이는 석가에서 기본으로 삼아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익히게 한 기본 공력이 크나큰 이유였다.
천년빙주가 발하는 기운을 대를 이어가면서 가문 모두가 품도록 한 것이다.
폭주하는 빙주 기운을 여덟 고수가 수습하여서 팔륜법사를 이루어내듯이, 그 기운을 고루 나누어 품는다면 어떻겠는가.
중시조 석불파는 그런 방안을 떠올렸다.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지만, 말미에 이대로 천년빙주를 봉인하고 있는 것만이 능사이겠는가. 하는 의문을 적어놓았는데.
고진무는 석불파가 그 의문을 해결해냈다고 보았다. 그는 곧 놀란 얼굴로 있는 석중천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이어진 내공심법, 그중에 비결 일부라도 남아 있다면, 아마도 이지를 제압하는 일이 가능했을 수도 있지 않겠나?”
“헉, 그, 그렇군요.”
석중천은 그러다가 퍼뜩 깨닫는 바가 있었다. 가문 모두가 익히는 황운기공이지만, 자신은 입문 정도에서 그쳤다. 연유가 설마 이런 것이었다면.
석중천은 덥석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였다.
부르르. 후드드득.
머리 위, 공동의 천장이 무섭게 들썩거렸다. 고진무는 바로 천장 너머를 꿰뚫듯이 노려보았다.
“왔군. 이번에는…… 그저 혼자서 술수만 부리는 게 아닌 모양이야.”
“흐읍! 이제 어찌하면 좋지요?”
석중천은 억지로 뱃전에 숨을 불어넣었다.
이대로 주저앉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막막한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을 뿐이지, 너머에서 몰려오는 성마 잔재에 대한 대책은 전혀 내지 못했다.
“그래도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예, 예, 그건 고 검객 말씀이 옳습니다.”
석중천은 거칠게 고개를 흔들었다. 팔륜법사를 동원할 수 없다고 해서 자신에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게는 석가에서 전하는 비전이 있었다. 비록 화후가 한참 부족하다고 한들, 손 놓고 숨어만 있을 수야 없는 일이다.
두웅! 두우웅!
거듭 땅이 울렸다.
“이대로 바닥을 부수고 들이칠 모양인가?”
“익! 그대로 둘 수는 없습니다!”
“그래, 자네 말이 옳아. 나서야지.”
고진무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면서 말했다.
여기는 석가의 세월이 있는 곳이었다. 꼭 천년빙주나 팔륜법사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곳이 무너지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고진무는 뛰쳐나가기에 앞서서 석중천을 홱 돌아보았다. 눈빛이 진지했다.
“어, 어찌 그러십니까?”
“여기 검 한 자루 없나?”
이번에는 빈손으로 나설 수는 없었다.
장사원은 후우, 고요한 숨을 뱉어냈다.
먼지가 좌우로 흩어지는 가운데에 도도히 서 있었다. 한 자루 고검을 늘어뜨린 채 턱 끝을 비스듬히 세웠다.
“호오, 이건 또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군.”
탁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동시에 울렸다. 그러나 장사원은 딱히 소리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
오직 한 점.
장사원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지그시 노려볼 뿐이었다.
일검으로 삿된 광풍을 갈라버린 장사원이다. 그 뒤에서 방대원이 억지로 숨을 몰아쉬었다.
방대원도 대도 한 자루를 바짝 세우고 있었지만,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대도를 간신히 들고 있었다.
고작 한 합을 받아냈을 뿐인데, 방대원은 이 꼴이었다. 탈진이나 다름없었다.
‘무, 무슨 이런 기괴한 일이!’
그야말로 괴변 그 자체였다. 몰아치는 바람에 수백 근 무게가 실려 있다니.
무겁게 몰아치는 바람을 맞이해서 일도를 휘두른 것만으로 힘이 쭉 빠졌다. 그러다가 우두커니 서 있는 장사원의 모습을 보면서 새삼 감탄했다.
화룡진인.
이제 갓 이립에 이른 젊은 나이에 이미 진인 소리를 듣는 장사원이다.
당장 장사원은 면전에서 진인 소리를 들으면 굉장히 부담스럽게 여기고 스스로 한참 부족하다고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장사원을 손꼽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전설 반열에 이른 칠신.
세상은 그 뒤를 잇는 새로운 고수를 항상 찾았다. 십여 년 전, 신검 또한 그렇게 등장하지 않았던가.
아직은 가결로 불리지는 않고 있지만, 지금에는 동서남북에서 한 사람씩 손꼽으면서 여기 있는 장사원을 두고는 중여화룡이라, 육대고수를 말했다.
“음음.”
방대원은 장사원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중여화룡이 신진 육대고수 중에서 마땅히 수위를 다툰다고 하더니.
이는 과장, 과언이 아니로다.
“물론, 우리 은공께서도 세상에 떨쳐나서기만 하면…….”
방대원은 이런 와중에도 고진무를 퍼뜩 떠올렸다.
술법을 통해서 일어나는 일체의 괴변, 사풍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그러나 장사원이 일으키는 검기 앞에서는 흩어지기 일쑤였다.
칼날처럼 몰아치고 공성추라도 되는 듯이 무겁게 몰려오는데, 장사원은 자리를 지키면서 고요하게 궤적을 그려냈다.
칼날과 같은 바람은 힘을 잃고 흩어진다.
짓누를 듯이 몰려오는 바람은 방향을 잃고 엉뚱한 곳에 떨어졌다.
처음에는 비아냥하던 목소리에 서서히 분노가 실려 갔다.
“어디서 온 가짜 도사이기에 감히 본교 행사를 방해하려 드느냐!”
“무량수불.”
장산원은 답하기보다는 그저 차분한 도호를 읊을 뿐이었다. 그는 가슴 앞에 고검을 곧게 세우고서, 검신에 검결지를 살짝 올렸다.
‘참 사이한 자로다. 전신에 사기가 그득할 뿐만 아니라, 좋지 못한 방법으로 공력을 쌓았어…….’
바람 너머에 몸을 숨긴 술사,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술사가 일으키는 거친 바람이 자신을 상하게 하지 못하듯이, 자신의 검기는 술사에게 닿지 못한다.
“흠.”
장사원이 이룬 태극검의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또한 단점이랄 수도 있었다.
태극검의는 이를테면 후발선제(後發先制)의 극치라 하겠다.
일체의 공세를 거두어내는 것은 물론, 더한 힘으로 되돌려준다. 그러나 앞서 공세를 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더구나 평범한 상대가 아니지 않은가.
“그래, 네놈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한번 보자!”
불현듯 너머에서 목소리가 노기를 드러냈다. 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사방을 흔들었다. 그러자 장사원은 피식 웃었다.
“빈도는 하루 온종일이라도 가능하다오.”
태극검의가 지닌 가장 큰 장점이 아니겠는가. 일체의 졸력(拙力)이 없으니, 공방이 따로 없고, 이에 낭비 또한 없다.
쐐액!
노기 어린 일성이 채 흩어지기 전이었다.
쐐액!
화살 한 자루가 날았다.
“흥! 어디 잔재주를!”
바람을 비틀었다.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을 거푸 휘감아서는 그대로 허공에서 뒤틀어버렸다. 그러나 화살은 하나가 끝이 아니었다.
마치 농락하듯이, 화살은 연이어 날아들다가 갑자기 위에서 떨어졌다.
한두 사람이 활을 쏘는 게 아닌 듯했다.
그래도 목소리의 주인, 회운사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사라져라!”
휘도는 바람이 사방을 거칠게 밀려났다. 그것으로 은신한 자신을 노리는 화살을 전부 쓸어냈다. 그 잠깐의 공백으로 뛰어드는 자가 있었다.
“방 선생! 검을!”
불현듯 외치는 목소리가 있었다. 방대원은 퍼뜩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장포를 거세게 펄럭이면서 고진무가 지붕을 박차 올랐다.
“예! 은공!”
방대원은 바로 맡아두고 있던 철검을 움켜쥐었다. 덥석 이를 악물고 크게 몸을 비틀었다. 그리고 하늘을 꿰뚫을 듯이 전력으로 내던졌다.
그 힘이 과했던가. 검은 고진무에게 닿지 못하고 지나쳤다.
“어이쿠!”
방대원은 자기가 한 일에 당황해서 그만 놀란 소리를 터뜨렸다. 고진무는 이미 허공으로 몸을 날린 상황이 아닌가. 화살을 거푸 날려서 바람을 흩어놓은 참이었다.
그러나 사자의 바람은 다시 좌우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이대로면 죽으러 뛰어드는 꼴이었다. 장사원도 이때에 이를 악물었다.
“이런!”
도움의 손을 뻗기에는 너무 멀었고, 늦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고진무는 손에 닿지 않고 날아가는 검을 향해서 힘껏 손을 뻗었다. 스승의 한마디가 이때에 새삼 떠올랐다.
‘너는 이제껏 검을 손으로만 잡아왔느냐?’
“와라!”
지이이잉!
검이 이에 호응했다. 힘이 향하는 대로 검초는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검은 물결을 거스르듯이 거꾸로 날았다. 그리고 뻗은 고진무의 손으로 고스란히 들어왔다.
검을 잡는 순간, 고진무 기세가 일변했다.
천지분획! 천하검의 제일초. 본래에는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일검의 획이, 거꾸로 땅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