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33)
>133 화>
* * *
“저게…… 뭐야……?”
저택 밖으로 나온 이들은 하나 같이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팽을 포함한 시녀와 시종 그리고 윈스턴, 페리얼과 밀라이언 역시 말할 것도 없었다.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존재했던 산맥의 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정체를 알 수 없는 큼직한 날개를 펄럭이는 거대한 무언가가 숲 근처를 날고 있었다.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물체였다. 그것은 계속해서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무언가를 씹어 삼켰다.
그리고 숲 근처 하늘에선 계속 또 다른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 멀어서 육안으론 확인이 되지 않지만 아마도 마수나 짐승들의 피일 것이다.
“지독하군…….”
밀라이언이 낮게 중얼거렸다.
숲과 페스텔리오 공작령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곳까지 짙은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풍겼다.
말을 쉬지 않고 빠르게 달려도 한나절은 걸릴 공작령에서까지 느껴졌다는 얘기다.
오감이 예민한 밀라이언에겐 더욱 역하게 느껴졌다.
대체 저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끔찍한 살기와 악의가 느껴지는, 강력한 포식자였다.
그가 느꼈던 두려움을 가져온 장본인이었다.
문제는 여기서 어떠한 대처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늘을 나는 마수를 상대로는 공성전도 불가능했고 날개 없는 인간으로선 대공전도 불가능하다.
여기에서 봐도 저 정도 크기인데 지상에서 맞닥뜨리면 얼마나 더 크겠는가. 인간이 상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가만히 거대한 그림자를 살피던 페리얼이 이윽고 놀란 듯 입을 벌렸다.
“……드래곤…….”
“뭐?”
페리얼의 낮은 중얼거림에 밀라이언이 고개를 홱 돌렸다.
여전히 그는 품에 카리나를 안은 채였다. 이런 상황에 그녀를 혼자 둘 수도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카리나가…… 아까, 드래곤을 그렸어.”
“드래곤……?”
주변에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그림으로 기적을 일으킨다는 사실은 공작저 내에서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은 더 카리나에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얘기를 들은 밀라이언의 얼굴이 확 굳었다.
“그래. 카리나의 그림이 기적을 일으켰고 거기서 빠져나간 건 빛무리 하나뿐이었다. 헤르타 때처럼 무언가 태어난 것도 아니야.”
“그러면?”
“불발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것치곤 그녀의 남은 생명력을 거의 다 빼앗았지.”
페리얼의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입이 다물렸다.
산맥의 중앙에 있던 절벽이 뻥 뚫린 모양은 누군가 일부러 부순 모양과는 차이가 있었다.
마치 그 자리만 뜯겨 나간 듯 했다.
“자네의 땅…… 드래곤 시체라도 있었던 건가?”
혹은 무언가가 오랜 시간 잠들어 있다가 눈을 떴다거나.
페리얼의 물음에 밀라이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도 이 땅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땅이 생겼을 때부터를 기준으로 한다면 완전히 어린아이겠지.
애초에 이 땅은 처음부터 제국의 땅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땅의 역사에 대한 자료는 많지 않았다.
기껏 전해져 오는 것이라고 해 봐야 구전 설화 정도뿐이었다.
“드래곤에 관한 얘기는 몰라. 저걸 카리나가 만들어 냈다는 건가?”
“원래 있던 걸 되살렸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 같은데.”
“……예술의 기적은 화자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지. 그렇다면 저것도 카리나가 원하던 바인가?”
끔찍한 피 냄새가 풍겨 오는 숲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가까이 가서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저것은 학살이다. 일방적인 살육 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저걸 정말 그녀가 만들었다면 이쪽에 해를 입히진 않겠지. 그보다는 카리나가 더 중요해. 그녀는…… 어떤 상태야? 괜찮은 건가?”
밀라이언이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그녀의 숨소리가 무척 미약했다. 심장 소리도 호흡도 모두 불안정했다. 점점 몸이 차갑게 식어 가서 제 옷을 덮어 주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가 일으킨 기적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게…… 그녀의 마지막 기적이었을 거다.”
너무 커다란 것을 살려 냈다.
새로 생명을 창조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안도를 느껴야 할까?
페리얼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주저앉고 싶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하론은 얻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우두머리 헤르타가 있을 곳도 저 지경이다. 전설 속에만 존재 하는 줄 알았던 드래곤이 숲을 헤집고 있었다.
드래곤과 맞붙고 저 안에서 우두머리 헤르타를 죽인다는 것은 무리에 가까웠다.
“……드래곤을 죽이는 건? 저 드래곤도 하론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있나?”
“자살하겠다는 말을 곱게 포장 하는 건가?”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이 한껏 인상을 쓰며 반문했다.
드래곤과 싸우다니. 전설이나 오래된 역사서 혹은 고대의 기록에만 남아 있는 드래곤은 그 힘 또한 강력했다고들 한다.
날갯짓 한 번에 산을 날리고 불을 한 번 내뿜으면 나라의 절반을 태워 버렸다고 한다.
어디까지나 오래된 기록이니 과장된 부분이 상당히 있겠지만 어떤 드래곤도 약하게 표현된 경우는 없었다.
드래곤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신처럼 숭배했다는 기록도 왕왕 있었다.
“그럼…….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밀라이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떻게 해야…… 그녀를 살릴 수 있는 거야, 페리얼 칼로스?”
그가 카리나를 품에 안은 채 페리얼을 바라봤다.
애절한 목소리와 일그러진 표정. 감정에 못 이겨 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검을 뽑아 들 기세도 아니었다.
그저 당장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은 필사적인 그 표정을 보며 페리얼은 말을 잃었다.
그와 만난 이래 단 한 번도 밀라이언이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정말 좋아하는군.’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런 감정인 듯했다. 제 모든 것을 주고서라도 그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제 자존심조차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칠 수 있는 감정.
페리얼은 말없이 밀라이언을 바라봤다.
“방법을 찾아볼게.”
“주인님! 드래…… 아니, 괴생 물체가 이쪽으로……!”
저택 위쪽에서 상황을 살피던 팽이 다급히 달려와 밀라이언에게 말을 전했다.
팽의 말을 들은 밀라이언이 곧장 고개를 들었다. 팽의 말대로 무언가가 페스텔리오령을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말로 달려도 몇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 분명한 거리였다.
그러나 날아오는 놈과의 거리는 눈을 깜빡이는 순간순간마다 빠르게 좁혀졌다. 밀라이언이 품에 안고 있던 그녀를 페리얼에게 넘겼다.
“지켜. 허튼짓하면 죽인다.”
“넌?”
그가 말없이 검을 뽑았다.
영지 여기저기서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밀라이언이 미간을 좁힌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친 기사가 공포에 질린 채 몸을 떨었다.
“가서 병사들에게 말해. 성문은 열지 말고 영지민은 전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아, 알겠습니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으며 마수와 함께 싸워 왔다고 해도 드래곤은 달랐다.
그 포효를 듣지 못한 영지민이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상대를 자극하고 상대를 짓누르기 위한 경고성 울음이었다.
차오르는 공포심을 어떻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피식자가 포식자에게 느끼는, 태어날 때부터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감정이었으니까.
쏴아아아—
유유자적한 날갯짓이 위협적이었다.
밀라이언이 쓰게 웃었다. 한낱 검 한 자루를 들고 있는 자신이 이다지도 무력하고 한심하게 보일 수가 있을까. 이 정도로 무언가를 이길 수 없을 거라고 생각 했던 적은 없다.
‘……하지만 하론이 있다면.’
덤벼 보지 못할 것도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원적인 공포로 이겨내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니까.
드래곤은 순식간에 영지를 넘어섰다. 곧장 공작저까지 날아온 드래곤이 저택 위를 두어 번 빙빙 맴돌았다.
그러더니 이윽고 저택 정원을 짓밟으며 내려앉았다.
긴 도마뱀 꼬리를 닮은 드래곤의 꼬리가 대문을 가볍게 부숴 버렸다.
착지하기 위해 세운 발톱에 나무와 바닥이 긁히고 불어오는 숨결은 잘 조성된 정원을 뒤죽 박죽으로 만들었다.
입에는 여전히 살점이 묻어 있었고 피가 뚝뚝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기괴하고 두려운 모습이 아닐 수가 없었다.
드래곤은 목을 아래로 쭉 내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 그것이 내게 숨을 불어넣은 주인인가?
아지다하카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페리얼에게 바싹 고개를 들이밀었다.
페리얼이 제 코앞까지 다가온 거대한 생물체의 얼굴에 몸을 긴장시켰다.
“……고대어?”
페리얼의 중얼거림에 아지다하카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가 조금 난감한 듯 낮게 침음하더니 이내 고개를 기울였다.
-설마, 그 사이에 언어 체계가 바뀌었을 줄이야.
-……언어를 이루는 근간은 같으나 조금 더 쉽고 체계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페리얼이 천천히 대답했다.
익숙하진 않지만, 고대어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아카데미의 교양 필수 과목이기도 했지만 오래된 고서를 읽을 때 필요한 것이 고대어였으니 페리얼은 고대어에 익숙했다.
특히 옛 서적은 고대어로 된 것이 많았다. 귀족들도 웬만해선 고대어를 배우곤 했다.
-호오, 다행히 내 말을 알아듣는 이가 있었군.
아지다하카가 무척 만족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밀라이언이 페리얼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가 검을 손에 쥔 채 미간을 좁혔다.
-용건이 없다면 돌아가라.
밀라이언의 입술 사이로 고대어가 흘러나왔다.
-주인의 염원은 이것이었군.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인간, 네 영역 내에선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지.
아지다하카가 말했다.
마수를 죽였으면 좋겠다는 염원 뒤에는 남자를 지켜 줬으면 한다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었다.
자신을 살려낸 이의 염원이다.
지킬 것은 지켜야 했다.
-……숲에 있는 마수를 죽였나?
-그래, 일단 ‘숲의 마수’는 전부 처리했다. 어차피 또다시 태어날 것들이지만.
아지다하카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밀라이언의 미간이 좁아졌다. 답답한 듯 머리를 헝클어뜨린 그가 이내 낮은 한숨을 터뜨렸다.
마수를 전부 죽이면 하론을 구할 수 없다.
그 명명백백한 사실에 밀라이언이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