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162)
>외전 18화>
* * *
“집에…… 가고 싶네요.”
상당히 넓은 연회장 안을 가득 채운 인파에 카리나가 질린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밀라이언이 그녀의 앞을 커다란 몸으로 막아 주곤 있지만, 그렇다고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북부의 공작인 밀라이언 페스텔리오도 그랬지만, 그가 애지중지 감싼다는 자식과 공작 부인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도의 귀족들로선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듯 했다.
실제로 그녀에게 끊임없이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았다.
그녀를 보고 얼굴을 붉히는 영식이 있는가 하면, 밀라이언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영애들도 있었다.
결혼을 한 귀족은 두 사람의 행동이나 아이에 관심이 많았고 시종 시녀들 역시 눈이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페스텔리오 공작가는 대개의 황성 일에 참견하지 않고 황성에 발을 들이지도 않는다.
그들의 소통 창구는 언제나 파발을 통해서였다.
그들은 웬만해선 북부에서 나오지 않으며 북부의 수문장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전대 페스텔리오 공작의 강경한 수로 인해 적어도 지금까지 북부의 그런 행태에 불만을 토하는 이는 없었다.
“하여튼, 이것들은 모이면 두려움이 없어지지.”
밀라이언이 혀를 차며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짜증스럽게 살기를 흘리며 노려봐도 인파가 너무 많으니 제대로 효과가 없다. 검이라도 뽑아서 테이블 하나 부수면 차라리 금세 제압할 수 있을 텐데.
“카리나, 괜찮아?”
“으음. 네, 저도 괜찮고 다행히 세렌도 괜찮아 보여요.”
“그거 다행이군.”
“아까 교황 성하께서 뭔가 해 주셨나 봐요.”
밀라이언이 교황의 이름이 나오자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그러나 굳이 다른 말을 하진 않는다. 어쩌겠는가. 그녀가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것인데.
“페스텔리오 공작 각하……?”
곁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밀라이언의 표정이 한층 험악해졌다. 그가 가볍게 혀로 입술을 핥곤 붉은 눈을 번뜩이며 몸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항상 북부와 물자를 거래하고 있는 조셉 네거티브라고 합니다.”
“……네거티브 백작이군.”
밀라이언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꼈다. 항상 편지로만 대화를 나누며 거래를 했던 수도의 백작이었다.
그다지 만날 생각은 없었는데…….
‘꽤 유약한 성격이었지.’
상대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이 편지에서도 느껴졌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부분에선 절대 물러서지도 않는다. 그 점을 꽤 높이 사서 밀라이언은 그와 거래를 오랜 시간 이어 오고 있었다.
“한 번쯤 인사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자네, 딸아이가 아프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나?”
네거티브의 어두운 얼굴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이름만큼이나 그는 피곤해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같이 지쳐 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리나가 아이의 등을 쓸어내렸다.
“……네, 좋은 약을 찾아서 다행히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그거 다행이군. 페리얼 칼로스 공작이 도움을 주었나?”
“아뇨, 아쉽게도 그분께서도 어렵다고 하셔서 다른 분께.”
밀라이언의 눈이 가늘어졌다.
페리얼 칼로스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이 다른 사람 덕분에 괜찮아졌다고?
그가 잠시 고민하듯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그러느냐며 순순히 어깨를 으쓱였다.
“참 실력 좋은 의사였던 모양이야.”
“네, 무척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 연회에도 제 동행인 명목으로 방문해 있습니다.”
“그런가?”
“지금 저기에 있으니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혹시 주변에 몸이 좋지 않은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그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일반 의사보다 제법 비싼 진찰비를 받지만 실력은 장담합니다.”
밀라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실력을 지닌 의원이라면 그녀가 살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밀라이언이 팔짱을 낀 채 묵직한 숨을 토해 냈다.
백작이 어딘가를 보더니 까치발을 떼고 손짓하자 누군가가 인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와 백작에게 다가왔다.
카리나의 시선이 다가오는 남자를 향해 움직였다.
옅은 베이지색 머리카락에 짙은 분홍빛 눈동자 그리고 빛에 비추면 투명하게도 느껴지지 않을까 싶은 새하얀 피부까지. 눈동자를 제외하면 전체적인 색이 옅은 남자였다.
페리얼 뺨칠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에 카리나도 조금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였다.
페리얼도 부드러운 인상이라는 것이 확실하지만 사내는 조금 달랐다.
마치 온몸을 설탕 공예로 만든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드물 정도로 예쁜 색의 분홍색 눈동자는 어디까지나 달콤한 사탕처럼 보일 정도다.
카리나는 그 기묘한 느낌에 한참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내가 고개를 돌리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쳤다. 눈이 마주친 사내는 이내 방긋 웃고는 백작에게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백작님, 부르셨나요?”
앳된 얼굴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생김새만큼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꿀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발음 하나 행동 하나,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서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 자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이야.”
“앗, 제게 말인가요?”
남자가 조금 놀란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반문했다.
백작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밀라이언에게 시선을 옮기더니 입을 열었다.
“이쪽은 페스텔리오 공작 각하시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이스트라고 합니다. 미천한 평민인지라 성은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괜찮다.”
밀라이언이 귀찮다는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밀라이언은 작위나 계급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실력만 있으면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는 북부로선 그다지 드문 일도 아니었다.
“이분은 두 분의 아이신가요?”
“네, 세레누스라고 해요.”
“무척 사랑스럽군요.”
분홍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 졌다. 눈꺼풀 아래에서 둥글게 휘어지는 동공을 보며 카리나가 고맙다고 말하곤 가볍게 웃었다.
이스트가 신력을 보이지 않게 모은 뒤 손을 조심스럽게 아이에게 가져다 댔다.
어느새 깬 듯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던 세렌이 고개를 빼꼼 내밀곤 푸른색과 황금색의 눈을 깜빡였다.
아이의 시선이 오로지 분홍색 눈동자의 사내에게 닿았다.
“두 분께 신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꺄아아아!”
세렌의 눈동자가 한참이나 그에게 머무르더니 갑작 손을 휘저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세렌?”
“마아!”
“이런, 무척 사랑스러운 분이시네요.”
어느새 다가온 이스트가 아이의 볼을 가볍게 손가락으로 스쳤다.
너무 순식간이어서 막지도 못했고 너무 자연스러워서 눈치채지도 못했으며 심지어 아이에게 손을 댔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게 기묘했다.
사내는 행동, 말투, 눈의 깜빡임이나 생김새조차도 자연스럽고 너무도 당연해 보였다.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 사람에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밀라이언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가볍게 움직이며 말했다.
검집에서 검을 빼지 않은 채 밀라이언은 이스트와 카리나의 사이를 막았다.
가슴에 닿은 검집에 그는 순순히 미소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너무 귀여워서요. 아이를 보는 건 이번이 겨우 세 번째라서.”
“당연한 소리를.”
“네……?”
“세렌은 원래 귀엽다.”
밀라이언의 말에 카리나의 얼굴이 붉어지고 이스트의 얼굴이 묘해졌다.
그는 조금 당황한 듯 보이더니 이윽고 그러느냐며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쳐 왔다.
“빠아앙! 우바아!”
세렌이 열심히 입술을 놀렸다.
이스트를 향해 뻗는 손이 조금 필사적으로 보일 정도다. 카리나가 당황한 듯 아이를 조심스럽게 품에 당겨 안으며 등을 토닥거렸다.
“……당신 혹시 신력을 가지고 있어요?”
“아! 네, 예전에는 지방의 이름 없는 신전에서 사제의 길을 걷기도 했습니다.”
“역시…….”
그녀의 입술 사이를 가르고 낮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아까 세렌을 만질 때 신력을 사용했죠?”
미간을 좁힌 카리나의 말에 이스트가 살짝 눈을 크게 뜨더니 금세 그런 기색을 감추곤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보면 축복을 해 주는 게 버릇이라서요. 워낙 시골 마을에 있다 보니 갓난아기를 보기가 힘들었어요.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빙긋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이스트는 고개를 깊게 숙여 보였다.
카리나가 물끄러미 사내를 내려다보다가 눈을 가늘게 떴다.
행동과 목소리는 완벽히 미안한 사람인데 분위기는 묘하게 아니다.
“실례예요. 그리고…….”
미안하지 않은데 미안한 척하지 말라고 입을 열려던 카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목 뒤로 말을 삼켰다.
괜히 연회장까지 와서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다.
‘뒤처리는 내가 아니라 밀라이언이 하게 될 테니.’
자신은 내키지 않아 이런 일에 끼어 들고 싶지 않으니까.
“어쨌든, 세렌은 신력에 민감해서요. 신력을 가진 사람에겐 대부분 호의적이니까 저로선 조심스럽네요.”
“죄송합니다. 제겐 호의였는데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스트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그는 침울한 듯 입꼬리마저 아래로 향한 채 다시 한 번 사과를 했다.
‘진짠가……?’
오랜만에 나와서 그런지 모든 사람이 다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카리나가 그를 흘끗 보곤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