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ina's Last Days RAW novel - Chapter (201)
“……죄송하지만, 며칠을 넘기기 어려우실 듯합니다.”
“……왜! 어떻게든 해 봐! 최고의 치료사라며! 딱 일 년만, 아니, 딱 반년이라도 좋아. 아직, 헤어질 준비를 못 했는데…….”
세레누스의 울음기 섞인 목소리에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의학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확연히 상태가 좋지 않은 밀라이언의 모습에 세레누스가 몸을 휘청거렸다.
“세렌, 괜찮니?”
“삼촌……! 아빠가, 아빠가……!”
영상구로 소식을 들은 페리얼이 곧장 게이트를 타고 북부까지 들어왔다.
세상은 너무나도 빠르게 발전했다. 더는 기적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노년의 페리얼은 밭은 숨을 몰아쉬며 핏기 없는 낯으로 시체처럼 누워 있는 밀라이언을 보았다.
함께 아카데미를 휘젓고 진실된 우정을 나누며 행복했던 시절을 보낸 것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무상하게도 끝없이 흘러만 갔다.
“……밀라이언.”
그는 낮게 침음하며 천천히 밀라이언의 손을 붙잡았다. 차가운 손끝은, 언제나 뜨겁게 타오르던 그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크게 다쳤다는 얘기는 들었었지만…….”
“삼촌, 삼촌은 아빠 못 살려요? 조금만요…… 반 년만이라도요……. 삼촌은 치유할 수 있잖아요.”
페리얼이라고 다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와서 상처를 치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세레누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해 달라는 말이겠지.
“한 번 해 보기는…….”
“……됐어.”
“밀라이언!”
“아빠!”
곧이라도 꺼질 것 같은 목소리에 두 사람은 대번에 반응했다.
밀라이언이 퉁명스럽게 페리얼의 손을 내쳤다.
“넌 여기까지 쓸데없이 뭐하러 왔어.”
“자네는 말을 좀 곱게 할 수 없나?”
“너는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 같은 말 좀 그만할 순 없어?”
“이 상황이 되어서도 참.”
페리얼이 한숨을 내쉬었다.
밀라이언이 살짝 눈짓하자 페리얼이 흘긋 세레누스를 보곤 미간을 찌푸렸다.
“세렌, 미안하지만 잠깐만 밖에 있어 주겠니? 아빠가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금방 다시 부를게, 세렌.”
밀라이언의 말에 세레누스가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벌겋게 물든 낮으로 물러났다.
“…….”
“…….”
세렌이 피해 준 자리엔 잠시 적막이 흘렀다.
페리얼은 몇 번이고 얼굴을 문지르며 천천히 숨을 뱉었다.
“자네도, 가나?”
“……그렇겠지.”
“기쁘겠군. 그렇게 기다리고 바랐지 않나. 카리나를 다시 볼 수 있을 테니까.”
“글쎄…….. 감각은 희미해지고 감정도 옅어져서 이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카리나를 다시 만나면 무슨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어. 어쩌면 긴 세월을 버티고 버티다 풍화되고 마모되어 감정도 사라졌을지도 모르지.”
“그릴 리가. 자네의 모습을 떠올리면 가능성은 현격히 낮군.”
페리얼이 픽, 웃었다.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서로를 마주할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언제나처럼 흐르는 적막 사이로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카리나도 가고 윈스턴도 가고 팽도 가고…… 이제 자네도 가는 군. 이제는 만나러 갈 친구도 없겠어. 너무 건강식만 챙기지 말 걸 그랬나 보군. 이렇게 혼자 오래 살 줄 알았다면 말이야.”
페리얼의 주름진 뺨을 타고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흘러내렸다.
“……울기는 왜 울어? 늙어서 주책이군.”
밀라이언이 작게 타박했다.
“먼지가 들어가서 그렇네, 먼지가.”
“그럼 다행이고.”
“이제 투덜대며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래, 나도 조금 많이 외롭다네.”
“……미안해.”
밀라이언의 말에 페리얼의 눈이 동그래졌다. 평생 들어 보지 못한 단어가 아니던가.
“죽을 때가 되니 이제 좀 사람다운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나 보군. 천하의 밀라이언 페스텔리오의 이렇게 적의 없는 사과를 듣게 될 줄이야.”
부러 밝게 낸 목소리에도 금세 분위기는 다시 축 처졌다.
밀라이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카리나가 편지에, 죽을 때가 되면 온몸의 감각이 희미해진다고 했는데…… 정말이네. 점점 감각이 둔해져.”
“…….”
“미안하지만, 페리얼. 세렌을 부탁할게. 이제 그 애도 곧 서른이 될 텐데, 아직도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아서 격정이야. 카리나가 그 어린 핏덩이를 두고 어떤 마음으로 눈을 감았는지 짐작조차 가질 않아.”
“세렌은 내 조카기도 해. 걱정하지 마. 잘 돌봐 주고 꾸준히 연락도 하고 세렌의 아이도 보고 죽을 테니까.”
“……그래,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밀라이언이 가법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당하게 웃던 페리얼의 얼굴이 기어코 일그러졌다. 그가 주먹을 꽉 쥐며 밀라이언을 힘껏 품에 끌어안았다.
“그동안 즐거웠네, 밀라이언. 자네가…… 카리나를 만나서 행복해지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겠네. 자네를 만나서, 카리나를 만나서, 윈스턴과 팽을 만나서, 나는 정말 행복한 놈이었다네.”
“그래, 나도.”
“자네에게는 인사할 시간이 주어져서 다행일세, 잘 가게.”
페리얼이 밀라이언을 한 번 꽉 끌어안곤 천천히 방을 나왔다.
뺨을 가법게 닦아 내고 흔적을 완전히 지운 그가 빙긋 웃으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세레누스를 마주했다.
“삼촌…….”
“……인사를 나눴어, 한동안은 공작저에 머물려고 하는 데 괜찮을까?”
“……네, 준비하라고 해 둘게요.”
세레누스의 뺨을 가법게 매만진 페리얼이 몸을 돌렸다. 남은 시간은 오롯이, 밀라이언과 세레누스의 시간이었다.
“…….”
안으로 들어간 세레누스는 문도 닫지 못하고 밀라이언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머뭇거렸다. 창밖을 보고 있던 밀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왜 이리 오지 않고, 세렌.”
“……아빠.”
“그래, 아가.”
그가 양팔을 벌리자 세레누스가 더듬더듬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빠가, 없어지면 전 어떡해요. 혼자는 싫어요, 아직 모르는 것도 많고…… 어엿한 공작이 되지 못했어요.”
“내가 보기에 세렌은 훌륭한 공작이란다. 토벌 완벽하게 하면 충분해.”
“……아직 준비하지 못했어요.”
세레누스가 어리광을 부리듯 고개를 저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가만히 보던 밀라이언이 손을 뻗어 아이의 뺨을 닦아냈다.
“나는 참 나쁜 남자인 모양이다.”
“왜요…….”
“사랑해 마지않는 여자를 두 사람이나 이렇게 울리고 마니까.”
세레누스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려는데 목구멍이 부은 듯 빠듯해서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걱정하지 말렴, 오늘내일 죽진 않을 테니. 네 생일에서 최대한 멀어져야지. 그러니 언제나 생일은 온전히 행복하고 축하받는 날이 되렴.”
“……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사랑한 건 네 엄마였지만, 네 엄마 못지않게 너도 사랑했단다. 너와 네 엄마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 사랑한 유일한 존재들이야.”
세레누스의 눈에서 눈물이 퐁퐁 쏟아졌다. 짓궂게 웃으며 강인하게 살아온 아이에게선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눈물이었다.
“미안해, 조금 더 있어 주지 못해서.”
밀라이언은 그때야 이해할 수 있었다.
왜, 죽음이 다가오면 올수록 카리나는 그들에게 사과만을 내뱉었는지.
그저 할 말이 그뿐이었던 것이다.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 몸을 떨면서 나오는 말이라곤 단지 그 단어뿐이라서.
“엄마, 만나러 가요?”
“엄마가 아직도 아빠를 기다리고 있다면, 아마도.”
세레누스가 밀라이언의 품으로 파고들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 젖혔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떼를 써도 안 되는 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는 법이다.
그래도, 욕심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일이 있으면 페리얼에게 항상 도움을 청하렴. 카틀란의 그 남자애는, 네가 지금껏 어영부영 정한 남자들과 비교해선 제법 괜찮더구나. 확신이 있다면 함께하렴.”
“……아빠.”
“사랑한단다, 아가. 나는 조금 피곤해서…… 잠을 자야겠구나.”
세레누스의 손을 잡고 있던 밀라이언의 고개가 살짝 떨어졌다.
세레누스가 급히 맥박을 쟀다. 아주 느리게 뛰는 심장이었지만, 분명히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밀라이언은 세레누스의 생일에서 가장 먼 날에 죽겠다는 약속을 지키려는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 잠을 잤다.
그리고 잠이 든 지 일주일이 됐을 때, 밀라이언의 심장은 완전히 아주 조용히 멈췄다.
그가 잠이 든 뒤론 언제나 아침, 저녁으로 찾아오던 세레누스는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그러나 햇볕 아래에서도 자가워진 밀라이언을 보며 이마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잘 가요, 아빠. 엄마한테 안부 전해 줘.”
파르르 떨리는 눈썹으로 세레누스는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이윽고 터져 나온 울음 소리에, 공작저의 분위기는 침통함에 가라앉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