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130
제129화 확, 뱉어버릴까 보다
안 그래도 첨탑 꼭대기에 붙어있던 비영이 보이지 않아 꺼림칙했었다.
사흘 전이라면 무왕이 떠난 날과 같은 날이었다. 혹시 둘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무왕 어르신이 이곳을 방문하셨소?”
내 질문에 강태수는 물론이고 모두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광객이 반문했다.
“그가 명교에 왔단 말인가, 은공?”
무왕은 되도록 은밀하게 명교를 찾아달라고 했던 내 청을 따른 모양이었다. 이 일은 추후 소면통달에게 확인해야 할 터였다. 그런데 왜 소면통달은 독의의 출교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을까. 사소한 사안으로 치부했던 걸까. 아니면 깜박했던 걸까. 이유가 무엇이건 이래저래 심사가 편치 않았다.
“들어가시지요.”
나는 친인들을 구세원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고는 곧장 괴선이 든 일층의 의실로 향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차린 이광이 내 소매를 잡아끌었다.
“독의가 절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했어요, 큰 형님. 문을 여는 것만으로도 환자들에게 악영향을 끼칠 거라며.”
나는 기감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이내 포기했다. 몸 만큼이나 기감도 정상이 아니었다. 벽 너머의 괴선은 고사하고 바로 옆에 선 이들의 호흡조차 잡아낼 수 없었다.
“모두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친인들을 복도에 대기시킨 나는 홀로 의실 앞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일순 지독한 악취가 엄습했다. 후각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지 않고 재빨리 내부를 훑어본 후 문을 닫았다.
“어떻게 된 건가, 은공? 미약하긴 하나 호흡은 안정적인 듯싶은데.”
나는 광객의 말에 안도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석대에 누운 괴선이 시체인지 생자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나는 친인들을 안심시켰다. 괴선의 모습은 독의가 치료를 시작했던 첫날과 동일했다. 그는 전신에 수백 개의 침이 꽂혀 고슴도치 꼴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우르르 지하로 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친인들을 복도 끝에 둔 나는 혼자 진소월의 석실로 갔다. 광객에게 그녀의 숨소리가 잡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자중했다. 자기보다 훨씬 상위의 고수가 된 내가 그런 걸 물으면 의아해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내 상태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 명교에서 암약하는 사벌과 마련의 간자들에게 새어나가는 순간 대책이 없었다.
석실 앞에서 심호흡을 한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다. 기름칠을 칠한 듯 부드럽게 열린 문 너머로 석대 위에 반듯이 누운 진소월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취선의 의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코를 베어버리고 싶은 악취가 폐부로 밀려들었다.
잠시 멍하니 진소월을 바라보다 가까스로 문을 닫았다. 뒤편에서 강태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왜 그래요, 전 공자? 소주에게 문제가 있나요?”
“그녀는 괜찮소, 강 호위. 염려 마오.”
강태수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진소월이 괜찮은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러기를 바랄 뿐이었다.
문을 연 그 짧은 순간 내 뇌리에 각인된 그녀의 모습은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녀는 괴선처럼 알몸이었다. 그러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대침이 빽빽이 꽂힌 그와는 달리 몸에 붙어있는 이물은 두 개 밖에 없었다. 대신 그녀의 몸 자체가 기이했다.
일단 살색이 변했다. 속살을 본 적은 없으나 얼굴과 손을 보건대 그녀는 백옥 같은 피부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죽은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시체처럼 푸르뎅뎅했다. 마치 전신에 멍이 든 것 같았다.
이목구비도 달라졌다. 정확히 말하자면 달라진 게 아니라 망가졌다. 형체를 잃고 뭉개진 눈과 코와 입 주변에 구더기가 끓고 있었다. 석실에 진동했던 썩은 내의 일부는 그녀의 안면이 곪으면서 나온 냄새일지도 몰랐다.
분홍빛 입술이 있던 자리엔 깔때기 모양의 도구가 꽂혀있었고 음부엔 기다란 관(管)이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긍정적인 징조로 받아들였다. 치료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뭣 때문에 그런 걸 두었겠는가.
하지만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오로지 독의만이 용도를 알 터였다.
* * *
강태수는 진소월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어 했다. 차마 본 그대로 전할 수는 없어서 대충 얼버무렸다. 나는 거짓말에 능한 편이 아니지만 워낙 순진한 인물인지라 그녀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친인들을 데리고 일층의 공실(公室)로 가려는데 계단참에서 점박이 노인이 나를 잡았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소주.”
나는 친인들을 먼저 올려 보내고 점박이 노인과 함께 온갖 종류의 약재가 쌓인 석실에 들어섰다. 독왕에 관한 얘기를 하리라 생각했는데 점박이 노인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좀 신경이 쓰이는 게 있습니다. 어제부터 내내 그랬는데 여기 들어오니까 더 느낌이 강해지는군요.”
나는 점박이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라면 이 방 말입니까?”
“아닙니다, 소주. 아까 소주가 들여다보았던 곳의 맞은편에 있던 석실입니다.”
“거기서 무슨 느낌이 났다는 건지요?”
점박이 노인이 우물쭈물했다.
“그게 말로는 설명하기가…….”
“그러면 그리로 가지요.”
내 제안에 점박이 노인이 반색했다. 석실을 나온 우리는 그가 가리킨 방으로 갔다. 문을 여니 짙은 약향이 빠져나왔다. 다른 석실들과 다를 바 없는……, 아니,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한 구석에 궤가 놓여있었다. 나는 그것이 전날 독의가 갖고 온 물건임을 기억해냈다. 점박이 노인이 항아리도 집어넣을 수 있음직한 커다란 목함(木函)으로 다가갔다.
“이겁니다. 여기서 냄새가 납니다, 소주.”
냄새라니? 여전히 이해난망이었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문제임을 직감한 나는 궤의 뚜껑을 열었다. 남의 짐을 뒤지는 취미는 없었지만 확인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궤 속을 들여다본 나는 허탈해졌다. 약초 부스러기가 곳곳에 묻어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궤를 들어 안쪽을 점박이 노인에게 보여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궤를 내려놓고는 점박이 노인에게 물었다.
“무슨 냄새가 난다는 말씀인지요?”
점박이 노인은 대답 대신 요청했다.
“제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소주?”
나는 크기만 클 뿐 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궤를 점박이 노인에게 건네주었다. 먹이를 탐지하는 개처럼 궤 속으로 코를 들이밀더니 점박이 노인이 이번엔 머리 대신 팔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찾았습니다, 소주. 여기 감춰두었군요.”
점박이 노인이 손에 쥔 것을 들여 보였다. 노을 같은 주황빛이 감도는 눈알 크기의 구슬이었다.
“그게 뭡니까?”
“채혼주(采魂珠)라고 합니다, 소주. 술사들이 부리는 기물이지요.”
“……!”
“여기는 의원이라고 들었는데 이런 게 왜 있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알 것 같았다.
“그 기물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은인.”
“혼을 캐낸다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기실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고 생각을 읽는 정도의 효능밖에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고대왕국 시절엔 대단한 귀물(貴物)로 대접받았습니다. 고문보다 훨씬 효과가 좋으니까요. 하지만 내공을 지닌 무인들에겐 무용지물인지라 무림이 태동한 이후엔 가치가 폭락했지요. 저도 말로만 들었지 실물을 본 건 처음입니다. 하지만 채혼주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인에게 통하지 않는다면 범인에겐 먹힌단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중급의 술사라도 피시전자에게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미약을 복용시킨 후 이 물건을 부리면 백중백(百中百) 속에 있는 생각들을 캐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두 가지를 결합하면 제아무리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도 속내를 털어놓지 않고는 배길 수 없다고 하더군요.”
애초의 짐작이 옳았다. 독의가 뭔가 술수를 부릴 거라던 진소월의 우려는 기우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대상을 잘못 짚었다. 그가 노린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나는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헤아렸다. 독왕의 내단을 취한 것만 빼고 진소월은 나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으니 독의도 이제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보아야 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은인.”
“부탁이라니요, 소주. 그냥 하명만 하십시오.”
“우선 그 물건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돌려놓으십시오.”
내 지시를 이행한 점박이 노인은 이어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 * *
나는 내 처소로 내정된 석실에 틀어박혔다.
소면통달만큼 낙담하지는 않았으나 사실 그가 아는 것보다 사정은 더 나빴다. 내가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이럴 때 악재가 겹쳤으니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검황자와의 비무 이후 상승일로에 있던 운의 흐름이 느닷없이 곤두박질 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일이 저절로 풀리길 기다리며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예감은 적들이 침략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나는 적들의 침공 시기 같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는 대신 회복에 전념하기로 했다. 친인들을 다시 절곡으로 데리고 가는 방안도 고려해보았지만 진소월과 괴선 때문에 단념했다. 나는 독의가 조만간 명교로 돌아오리라 낙관했다. 그냥 환자들을 내팽개치고 떠날 작심이었다면 함부로 입실하지 말라는 주의도 주지 않았을 터였다.
진소월과 괴선의 치료와 무관하게 명교를 배신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나현이 기미를 포착한 것처럼 장왕의 실성은 언젠가는 드러날 일이었지만 소면통달의 말마따나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그럴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었으나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정상회복이 급선무였다. 나아가 독왕의 내단에 깃든 미증유의 원력을 취득해 내력이 급증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지난 며칠 내내 그랬던 것처럼 용을 썼지만 내단의 원력은 완강히 체화를 거부했다. 여전히 개미 오줌만큼 짜내는 걸 대가로 치 떨리는 극통을 감내해야 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전망이 보인다면 극한까지 밀어붙였을 테지만 무망한 짓임을 알았기에 중도포기하고 말았다.
암담했다. 이런 식이면 정말로 이십 년은 지나야 내단의 원력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이상 걸린다고 해도 수긍할 듯싶었다.
기필코 속성으로 용해할 비책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원래의 무력을 되찾는 데 주력하기로 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단전에 자리한 내단을 배제하고 무상심공을 운용했지만 골수에서 나오는 원력의 양은 평상시의 일 할에도 미치지 못했고 그나마도 간헐적이었다.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나는 악착같이 운공을 지속했다. 그러다 기이한 현상을 감지했다.
골수에서 나와 혈맥을 휘돌던 원력이 조금씩 묽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작은 차이였기에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인지할 수 있었다. 원력은 골수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마치 모래에 스며든 물처럼 슬며시 사라지고 있었다.
내부를 관조하며 원력 소실의 원인을 찾던 나는 어느 순간 소스라쳤다. 범인은 독왕의 내단이었다. 그 기물이 원력을 시나브로 흡수하고 있던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주지는 못할망정 내 걸 야금야금 빼먹고 있었다니.
‘이런 괘씸한 놈 같으니. 그냥 확, 뱉어버릴까 보다.’
내 심사를 읽었는지 내단이 느닷없이 요동을 쳤다. 하복부에서 때 아니게 몰아치는 극심한 통증에 몸부림치며 나는 독왕의 심공으로 내단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내단은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황당한 사태에 황망해진 나는 불현듯 중대한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