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09
제208화 이건 아니잖습니까?
“무슨 일이냐?”
“그게 정말이오?”
“뭐가?”
“빙후 어르신을 이긴 게 정말이냔 말이오.”
“난 또 뭐라고.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 줄 알았잖아. 아니면 나한테 혼쭐이 난 짝눈이 돌아버렸던가. 내가 누구를 이긴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호들갑은, 이 자식이.”
내가 도로 침대에 드러눕자 검황자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왜 이래?”
“일어나 보쇼.”
“왜?”
“얘기 좀 합시다.”
“뭔 얘기?”
“형의 무력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상이 아니오.”
“정상이 아니라니?”
“나는 빙후 어르신과 무왕 어르신의 대결을 목도했소.”
“왜 딴소리야?”
“빙후 어르신은 내 사부의 아래가 아니었소. 내 안목이 절대적으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두 분이 붙으면 사부가 밀릴 거라고 단언할 수 있소.”
“틀렸다, 인마. 대 보기 전에는 누가 길고 누가 짧은지 알 수 없어. 뭐, 나더러 내기를 하라면 비인, 아니 빙후 어르신 쪽에 돈을 걸겠지만.”
“바로 그거요. 불과 얼마 전에 사부에 비해 반 수 이상 아래인 낭왕과 겨우 평수를 이뤘던 형이오. 그런데 사부를 능가하는 빙후 어르신을 꺾다니. 아무리 일취월장을 밥 먹듯 한다지만 너무 비정상적인 일이잖소? 형도, 그 어른도 멀쩡할 걸 보니 형이 강미를 발휘하는 생사투가 아니라 순수한 비무였던 모양인데 대체 어떻게 이긴 거요?”
“지광아.”
내가 이름을 부르는 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에 검황자가 경직되었다,
“네 심정을 이해한다. 절망스럽겠지. 부인하고 싶을 테지.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그냥 받아들여. 그게 심신에 이로워.”
“제길, 그런 얘기가 아니잖소?”
“아니, 그런 얘기가 맞아. 더 이상 나를 경쟁자로 여기지 마라. 너 자신을 위해서. 속만 상할 테니.”
“…….”
“더 할 말 없으면 나가 봐라. 나는 좀 쉬어야겠다.”
주인을 쫓아내는 격이었으나 검황자는 내 행태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풀이 죽어 돌아서는 그를 보니 괜히 안쓰러웠다.
“아니다, 이왕 온 김에 내 말마따나 얘기나 나누자꾸나. 이제 헤어지면 언제 또 보겠냐?”
“무슨 소리요? 헤어지다니?”
“빙후 어르신이 꼬마를 데려오면 바로 출발할 작정이다.”
“오늘 왔잖소? 왜 그리 서두르는 게요?”
“무왕 어르신과 최대한 빨리 돌아가겠다고 약속했다. 나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고 있을 괴선 노인장이 퍼부을 잔소리가 귀찮기도 하고.”
“…….”
“서운하냐? 그러면 나하고 같이 가지 그러냐?”
“……미안하오.”
“그 여자가 그렇게 좋으냐?”
“…….”
“충고 하나 할까?”
“싫소.”
“그러지 말고 들어봐. 피가 되고 살이 될 금언이니까.”
“안 들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도 남소. 그러니 하지 마쇼.”
“이 자식이. 뭔데? 만약 틀리면 꿀밤을 먹일 테다.”
“뻔한 거 아뇨? 나더러 정신 차리라는 소리를 하려던 거겠지.”
“…….”
“잔머리 굴리지 마쇼. 바꿀 말 찾는 거, 다 보이니까.”
“너 참 많이 변했다.”
“그러는 형은 어째 변화가 없소?”
“이 자식이! 그래, 맞다, 인마. 정신 차려. 너는 그 여자의 껍질에 홀렸을……, 아니다. 쇠귀에 경 읽기지. 딱 한 마디만 더 하마. 반한 건 어쩔 수 없더라도 노예가 되지는 마라.”
“그럴 일 없소.”
“큰소리 칠 일이 아니야. 남 얘기해서 뭐 하지만 장래 정파제일인이 될 것이 확실시된다는 보성 현가의 진천수도 거죽만 번드르르한 여자에게 홀딱 빠져서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그만 하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시지.”
“야, 그건 내 말이잖아?”
“형만 쓰라는 법 있소?”
“뭐?”
검황자와 유쾌한 입씨름을 벌이고 있는데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내 눈짓에 입을 다문 검황자가 문을 열었다. 잠시 후 낮에 그랬던 것처럼 빙후가 꼬마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때와 달리 빙후의 얼굴엔 한 점의 웃음기도 없었다. 나는 꼬마가 그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나를 따라가겠다고 했음을 알았다. 나를 올려다보는 꼬마의 귀여운 얼굴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 * *
명교로의 귀환은 몇 배는 수월했다. 빙후가 평북 무림 유구(流邱)까지의 직선에 가까운 경로를 일러준 덕분이었다. 십 리마다 솟은 철탑을 따라가면 그만이었다.
홍옥을 지녔더라도 매서운 한파에 노출되면 순식간에 변을 당할 터였기에 꼬마를 모피에 꽁꽁 싼 나는 수혈을 짚어 재운 후 경신을 전개했다. 아직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날아가는 도중 치유가 되면서 일다경쯤 지난 후부터는 통증이 크게 줄었다. 본격적으로 전속력을 발한 나는 다음 날 정오 무렵 빙궁에서 남서 방면으로 육천팔백 리 떨어져 있다는 유구에 당도했다.
너무 오래 재우면 몸에 탈이 날 수도 있는지라 유구에서 꼬마를 깨운 후 밥을 먹였다. 기실 나도 휴식이 필요했다.
변방 중에 변방이지만 유구 사람들은 단박에 나를 알아보았다. 내가 워낙 유명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하늘에서 날아 내렸기 때문이었다. 내 덩치에 비행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인물을 따로 떠올리기는 힘들 터였다.
앞 다투어 오체투지 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하나밖에 없다는 객잔에 들어간 나는 고깃국 두 그릇을 주문했다. 이미 바깥의 소동으로 내 출현을 알고 있던 주인은 횡설수설하며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신 줄을 놓은 듯해서 그가 음식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나 들어가자마자 말고기가 듬뿍 든 국밥을 내왔다. 다른 손님을 위해 준비해 두었던 걸까.
꼬마는 뜨거운지 연신 호호 불어가며 고기와 밥을 입에 쑤셔 넣었다.
“아무도 안 빼앗을 테니 천천히 먹어라, 꼬마야.”
꼬마가 수저질을 멈추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꼬마가 아니라 소아예요.”
“알아. 하지만 나는 꼬마라고 부를 거야.”
입 바람을 집어넣었는지 꼬마의 볼이 부풀었다. 불만인 건가?
“그럼 소아도 주인님을 맘대로 불러도 돼요?”
“나는 네 주인이 아니야. 근데 뭐라고 부를 건데.”
“곰 아저씨요.”
헛웃음이 나왔다. 나를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는 꼬마가 신기하기도 했다.
“예전 주인님하고 같이 살 때 산에서 곰을 본 적이 있어요. 아저씨하고 똑같았어요. 얼굴은 좀 다르지만.”
곰이 나보다 더 잘 생겼다는 말이 나올까 봐 나는 얼른 화제를 종결시켰다.
“그냥 대형이라고 해.”
꼬마가 다시 볼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너무 귀여워서 깨물어주고 싶었다.
* * *
서쪽 지평선과 맞닿은 하늘이 불이 붙은 듯 시뻘겋게 타올랐다. 자연 풍광에 감흥이 일지 않는 편이었지만 마치 나를 격렬하게 환영하는 것 같아 심장이 뛰었다.
황혼을 등지고 구세원에 내려서자 마침 밖에 나와 있던 괴선이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며 나를 반겼다. 그가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 무사귀환을 기뻐하자 괜히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허둥지둥 달려온 삼대호법은 내가 단 사흘 반나절 만에 빙궁을 갔다 온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내가 다른 데서 시간을 때우고 왔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내 품에 안긴 꼬마가 빙궁 왕래의 확실한 증거였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내가 빙후와 겨뤘는지, 그랬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물었다. 나는 곤히 잠든 꼬마를 가리키며 ‘전리품’이라고 말함으로써 친인들의 탄성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그들에게 박빙의 승부였고 빙후와는 머지않아 재대결을 통해 결판을 낼 예정이니 그때까지는 내 승리를 함구하도록 당부했다.
노인들과 대충 인사를 마친 후 꼬마를 안고서 무왕의 방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전날과 마찬가지로 무왕이 산송장처럼 침상에 누워서 나를 맞았다. 그를 돌보고 있던 의원들이 나에게 예를 표하고는 달아나듯 방을 나갔다.
“다녀왔습니다, 어르신.”
무심함이 사라진 무왕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깃들었다.
“그녀와 싸웠더냐?”
나는 무왕이 꼬마가 아니라 빙후와의 대결에 먼저 관심을 표명해서 서글펐다. 무공을 상실했으나 무왕은 천상 무인이었다.
“네.”
“어찌 되었더냐?”
“비무에서는 졌습니다. 그 어른이 생사투에 준하는 일전을 요구하셔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대단하구나.”
무왕의 요청으로 나는 빙후와 치렀던 기묘한 장기전을 상세히 복기했다. 그러고는 무왕을 치켜세우는 언사로 마무리를 지었다.
“전부 어르신의 조언 덕분입니다. 정말 제대로 먹혔습니다.”
무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생각해 냈을 터, 괜한 사족 달 것 없다. 설령 약간의 도움이 되었더라도……, 아니다. 다 부질없는 소리야.”
무왕의 고소가 냉소로 바뀌었다.
침울한 분위기에 잠식되기 전에 비장의 패를 내밀었다.
“이 녀석을 깨울까요?”
뜻밖에도 무왕이 반대했다.
“그러지 말거라.”
나는 꼬마를 침상 옆의 탁자 위에 반듯이 눕혔다. 곁눈질로 그를 일별한 무왕이 물었다.
“소아가 왜 빙후를 따라가겠다고 했는지 들었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무왕은 가만히 내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나는 빙후와의 우열 가리기가 꼬마의 맹랑한 요구에서 비롯되었음을 알려주었다.
“이 아이는 아무래도 강한 쪽에 붙는 습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그랬을 테지만…….”
꼬마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듣기 싫었던지 무왕이 내 말을 막았다.
“그랬구나.”
무왕의 눈에 회한이 깃들었다.
“그러면 이제 소아는 나와 함께 지내려 들지 않겠구나. 패배자일뿐더러 폐인까지 되었으니.”
실로 비감했다. 그러나 나는 무왕을 위로하지 못했다. 어떤 말이든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왕의 심사를 헤아리고도 내가 굳이 아이의 본성에 대해 밝힌 것은 더 큰 충격을 막기 위해서였다. 빙궁을 떠나기 전 꼬마는 무왕과 사는 것은 고사하고 만나는 것조차 싫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빙후는 내게 꼬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확약을 받고서야 꼬마를 내주었다. 나는 한 번의 대면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빙후의 양보를 받아냈다.
미련을 버린 듯 무왕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만 데리고 나가거라. 소아가 원치 않으면 다시 올 필요 없다.”
나는 꼬마를 안아들었다. 문으로 걸어가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여쭙고 싶습니다.”
“…….”
“혹시 이 아이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까?”
“…….”
나는 극심한 위화감을 느꼈다. 바람 맞은 촛불처럼 흔들리는 무왕의 눈빛은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설마. 설마.
꼬마는 상습적인 거짓말쟁이가 아니었단 말인가. 정말로 무왕이 꼬마에게 추잡한 짓을 했단 말인가.
뱃속에서 솟구치는 배신감을 억누르며 나는 침묵으로 무왕을 압박했다. 무왕의 입술에서 신음성이 새어나왔다.
“기억이……, 기억이 나질 않는구나.”
이런. 이건 아니잖습니까. 좀 더 그럴 듯한 변명을 꺼내놓으셔야지요.
“나중에……,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꾸나. 흐릿한 안개가 걷히면 뭔가 보일 테지. 지금은 모르겠다. 그게 꿈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혼자 있게 해 다오. 생각 좀 해야겠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다그쳤을 터이지만 무왕에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목례를 하고 방을 나갔다. 그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혹은 그러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