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44
제243화 얼마나 강하냐?
진소월이 강구한 ‘비책’을 습득하고 체화하는 데 사흘이 소요되었다.
최종 단계에서 생명의 원천을 전한 그녀는 또 다시 내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두 번째였지만 슬픔은 조금도 덜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아무리 자주 경험하더라도 익숙해질 수 없는 법이었다. 소중한 이들의 죽음도 그러했다.
심장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나는 진소월의 당부를 이행하기 위해 축 늘어진 그녀를 안고서 석실을 나왔다. 비록 호흡이 멎었을지라도 그녀는 혹여 자신이 부활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깔끔하게 마무리해 주기를 재삼재사 부탁했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았던지 내게 거듭 다짐을 받았다.
원형 공간으로 나오자 두부를 잃고 바닥에 널브러진 독의의 사체가 보였다. 방금 나온 동굴의 반대편에 있는 암굴로 걸어가며 나는 그를 걷어찼다. 석벽으로 날아간 그의 몸뚱이가 돌바닥에 내팽개쳐 진 개구리 배처럼 터져버렸다.
암굴은 깊었다. 그리고 기이한 열기가 흘러나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열기의 강도가 높아졌다.
그 끝에는 진소월의 예상대로 만년한철로 만들어진 용광로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진소월과 더불어 폭사한 후 이모의 치유력을 이용해 되살아날 것을 우려한 독의의 최종 안배였다. 독의는 조각조각난 내 몸을 긁어모아 용광로에 던져버릴 속셈임에 틀림없었다.
진소월을 펄펄 끓는 쇳물에 집어넣기 전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녀의 분홍빛 입술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여전히 보드랍고 탄력이 있었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기어이 흐느꼈다. 내 눈물이 진소월의 뺨을 적셨다.
언제까지나 진소월을 안고 싶었지만, 차라리 그녀를 두고 내가 용광로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보내주었다.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리고 나에겐 그녀가 맡긴 중대한 임무가 있었다. 머지않아 저승에서 그녀와 재회할 터이지만 그러기 전에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내게 모든 것을 주고 떠난 그녀를 볼 면목이 없었다.
* * *
금군은 밖으로 나온 나를 보고는 진소월의 부활을 본 나만큼이나 반색했다. 그러나 금세 풀이 죽었다. 우물쭈물하는 그를 다그쳐 얘기를 들어보니 사흘 전 내가 들어간 직후 다른 출구로 나온 만리풍을 놓친 모양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기에 나는 금군을 봐 주었다. 기실 그런 데까지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금군을 남천으로 돌려보낸 나는 전속력으로 북상했다. 뇌신의 후인이 지정한 날까지 이제 열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니 서둘러야 했다. 방향과 장소만 정확하게 알면 아무리 멀어도 나흘 이내에 도달할 자신이 있었으나 전제를 충족시키지 못한 탓에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반 시진 만에 수림의 바다를 빠져나온 나는 야천의 별들을 길잡이 삼아 진로를 서북으로 바꾸었다. 낯선 산하가 이어졌으나 크게 어긋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내 일차 목적지는 천랑성이었다. 전날 나현을 통해 천랑성의 대두노인에게 ‘신들의 산’에 대한 정보와 서방의 지리와 언어에 능숙한 이를 물색해 놓을 것을 부탁해두었기에 지금쯤이면 준비가 되었을 터였다. 만약 그가 내 요청을 이행하지 못했다면 실로 난감했다. 우습게도 임박한 결전에 대한 긴장감보다 수만 리 너머의 이역에서 헤매는 미아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훨씬 더 컸다.
진소월이 알려주길 서방 끝자락까지의 거리는 물경 이삼만 리에 달했다. 무작정 돌아다니며 ‘신들의 산’을 찾기엔 너무나 광대한 영토였다. 더욱이 말도 통하지 않지 않은가. 천랑성에서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사실상 대책이 없었다.
수천 리를 줄기차게 비행하다 방향을 튼 것은 다분히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나는 우한에 들러 나현을 보고 갈 참이었다. 꽤 둘러가는 셈이었으나 시간적으로는 기껏해야 한 시진 정도만 허비하게 될 터였다.
열흘 가까이 지났으니 대두노인에게서 경과를 알리는 답신이 와 있을 공산이 컸다. 하여 천랑성으로 가기 전에 확인하고 싶었다. 절망이든 희망이든 미리 맞닥뜨리는 게 나았다. 나는 이 선택이 얼마나 중대한 차이를 낳을 것인지 꿈에도 알지 못했다.
* * *
동천에서 막 떠오른 해가 중립지대 최고 향락도시의 전경을 눈앞에 펼쳐보였다.
남들은 기지개를 켤 시간에 잠들 채비를 하는 대도를 내려다보며 나는 우한 외곽의 자미원으로 날아갔다. 열흘 내내 혹한이 계속되었던지 장원은 얼음으로 화한 백설 속에 파묻혀 있었다.
수많은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힌 마당에 떨어져 내린 나는 나현에게 방문을 알렸다. 그러나 와옥 문이 열리고 튀어나온 이는 그와 혈접이 아니라 처음 보는 소녀였다.
소녀의 외양은 특이했다. 한눈에도 서방의 이족임을 알 수 있었다. 금빛이 섞인 은발에 토끼처럼 동그란 눈동자는 구름 한 점 없는 가을하늘처럼 새파랬다. 피부도 백옥 같이 하얬다.
나이는 열다섯 쯤 되었을까. 실은 그보다 앳되어 보였으나 가슴이 제법 불룩한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곧장 나에게 달려오며 소녀가 외모에 어울리는 귀여운 음성을 날렸다. 그 순간 전신의 솜털이 곤두섰다.
나는 더듬거리며 물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지?”
잘못된 질문이었다. ‘어떻게 그랬지?’라고 물어야 했다. 소녀가 방금 했던 말을 반복했다.
[만나서 반갑다고 했어요. 당신이 무황 맞죠?]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고는 소녀를 노려보았다.
“너는 누구냐?”
대답은 소녀가 아니라 뒤늦게 와옥을 나온 나현에게서 나왔다.
“그 아이는 나나라오.”
나는 소녀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현에게 질문의 의도를 밝혔다.
“이름이 아니라 정체를 묻는 겁니다.”
“먼 이국의 공주라고 합디다. 글쎄, 무황의 소문을 듣고 예까지 찾아왔다지 뭐요. 하도 만나고 싶다고 간청하기에 남천에 급보를 보냈는데 벌써 왔구려. 전서구가 어젯밤이나 오늘 새벽에야 거기에 이를 거라고 보았는데.”
석연치 않았다.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급보까지 보냈다니. 그리고 내가 궁금한 건 소녀의 신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뇌신의 후인과 동일한 수법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막을 두드리지 않고 곧장 머리 안쪽에 울렸다.
나는 소녀에게 직접 확인했다.
“어떻게 한 거지?”
이번에도 나현이 대답을 가로채며 오지랖을 떨었다.
“아! 나나의 심어(心語)를 들은 모양이구려.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지. 나도 처음엔 깜짝 놀랐다오.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하다니. 게다가 귀가 아니라 바로 마음에 와 닿는 음성이라니. 일종의 전음 비슷한 수단이라고 합디다. 그래도 전음보다 월등한 수단임에 분명하오. 아니, 비교할 수도 없을 듯싶소.”
“…….”
나나 옆에 이른 나현이 그녀에게 한없이 다정한 눈길을 보냈다.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요마의 요력이 깃든 꼬마를 바라보던 무왕이나 빙후의 눈과 동일한 빛을 담고 있어서였다.
“대단하지 않소? 심어도 그렇지만 이역만리인 중원의 언어를 독학하고 수행원도 없이 홀로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여정을 들어보니 참으로…….”
전에 없이 기이한 언행을 보이던 나현이 갑자기 움찔했다. 혈접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주의를 주어서가 아니었다.
“아아, 그래. 나는 빠져 있으마.”
소녀를 보고 얘기한 나현이 아쉬움의 입맛을 다셨다.
“나나가 무황과 직접 대화하고 싶다는 구려.”
바라는 바였다.
* * *
우리는 다실로 자리를 옮겼다.
나현도 들어오려 했지만 나와의 독대를 원하는 소녀의 뜻에 따라 말 잘 듣는 종처럼 물러났다. 탁자를 마주하고 자리에 앉은 소녀가 생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대뜸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나나예요. 좀 전의 그 배불뚝이 노인에겐 편의상 공주라고 했지만 그렇지는 않아요.]“그럼 뭐냐?”
소녀에게서 예상했던 답이 나왔다.
[신(神)이죠.]황당했지만 나는 소녀를 미치광이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렇더라도 확인은 하고 넘어가야 했다.
“정말이냐?”
소녀가 코를 찡긋거렸다.
[아주 오래 전에 인간들로부터 그렇게 불리긴 했어요.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소불위의 권능을 지닌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그들과 다른 생물일 뿐이에요. 우리 일족은 먼 옛날 저 하늘 위에서 내려왔어요. 그러니 신이라기보다는 천외인(天外人), 혹은 이계인(異界人)이라고 칭하는 게 더 적절하겠죠.]“…….”
[이해가 쉽도록 인(人)을 붙였지만 우리는 인간의 형상은 아니에요. 인간에게는 돌덩이로 보일 거예요. 거북이처럼 딱딱한 껍데기 속에 물렁물렁한 진체가 있죠. 이 땅에 내려온 후 그런 모습으로는 활동할 수가 없어 우리의 기를 전이하기에 가장 적당한 인간의 몸을 빌린 것뿐이에요.]“모두 몇 마리냐?”
나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왔다. 소녀의 콧잔등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너무하네요. 우리를 짐승 취급하다니.]“대답이나 해.”
소녀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사슴 같은 눈망울.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강렬한 거부감이 일었다.
“수작 부리지 마.”
소녀가 탄성을 날렸다.
[아!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네요. 내 진의가 통하지 않다니. 하긴 그 무지막지한 아카를 쓰러뜨렸다니 평범한 인간일 리가 없을 테죠.]“모두 몇 마리인지 물었다.”
[아카 때문에 화가 난 건 이해해요. 적이나 다름없는 사이지만 같은 종족으로서 내가 대신 사과할 게요. 하지만 나는 살육과 파괴를 본성으로 하는 그와는 달라요. 내 본령은 생명체들을 보호하고…….]“자꾸 말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답해.”
소녀가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왜 이렇게 삐딱해요? 배불뚝이 노인에게 청해 당신 얘기를 들었을 때는 몹시 호탕하고 유쾌한 성정인 줄 알았는데. 당신을 돕기 위해 수만 리를 달려온 사람을…….]“거기까지다. 다시 한 번 헛소리를 하면 그 덩치와 같은 족속으로 간주하고 목을 부러뜨릴 테다.”
소녀가 자라처럼 목을 움츠렸다.
나는 잠시 이어진 침묵을 깼다.
“몇 마리냐?”
내가 안광에 살의를 싣자 소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일곱 명이에요.]“그것 밖에 안 된다고?”
[물론 원래는 그보다 훨씬 많았죠. 하지만 우리 일족에게 일어난 사변으로 인해 대다수가 희생된 데다 분체에 실패해 진체가 말라붙은 이들을 빼면 채 일백도 되지 않아요. 그 중 재생에 성공한 이는 나를 포함해 일곱이고요. 아니, 이제 여섯이네요. 아카가 당신 손에 절명했으니.]“생쥐처럼 생긴 그 난쟁이의 이름은 뭐냐?”
[주우에요. 우리의 우두머리죠.]“얼마나 강하냐?”
[내 수준으로는 측량할 수 없어요.]“아카라는 놈하고 비교하면?”
[아카는 상대가 안 돼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 거친 작자가 그토록 순하게 굴었을 리가 없죠.]암울했다. 소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승산은 전무에 가까울 터였다. 천벽에서 혈전을 치렀던 덩치만 해도 내 하수가 아니었다. 그를 물리친 건 탁월한 전술과 수많은 사투를 통해 다져진 초절한 승부감각 덕분이었다. 객관적인 무력만 따지면 그가 반 뼘이라도 나보다 우위였다. 백 번 싸울 시 절반의 승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런 자보다 훨씬 강하다니. 더욱이 그 난쟁이는 나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애써 절망적인 전망을 떨쳐냈다.
숱하게 경험한 바, 더 세다고 꼭 이기는 건 아니었다.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게 내 주특기였다. 더군다나 나에겐 난쟁이가 알지 못하는 비장의 패가 있었다.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이 남아있지만 잘 하면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터였다.
한 가지 불안 요소는 남의 속을 읽는 난쟁이의 기묘한 재주였다. 그가 대결 전에 내가 준비한 수를 간파한다면 만사휴의였다. 그에 관해 소녀에게 알아내기 전에 나는 중요한 질문부터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