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75
제74화 그녀는 전리품이 아닙니다
진청운-진소월 부녀와 강태수, 이광 등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연무장으로 따라오지 못하고 뒤에 남았다. 누가 그들의 입장을 막아서가 아니었다. 비무 여파에 휩쓸릴 것을 우려한 자발적 안전조치였다.
연무장에 든 검왕은 좀 전에 그랬던 것처럼 제 할 말만 했다.
“재주를 부려봐라.”
검왕의 횡포에 부아가 치밀었다. 나를 살갑게 대하는 건 꿈도 꾸지 않았으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할 것 아닌가. 나이가 많다고, 혹은 더 강하다고 제 멋대로 구는 건 무례한 짓이었다.
첫 만남 때도 그랬다. 다섯 달 전 검황자를 물리치고 검총을 떠나는 나를 쫓아왔을 때 다짜고짜 무지막지한 압기를 발해 나를 짓누르지 않았던가. 그러고는 고작 ‘몇 살이냐?’는 뜬금없는 질문만 던지고는 일언반구도 보태지 않고 등을 돌렸었다.
오 년 이내에 본때를 보여주마고 속으로 결의를 다지며 나는 포권을 취했다.
“전충이 삼가 검왕 어르신의 가르침을……, 헉!”
말을 하다 말고 경악성을 토해낸 나는 다급히 이(移)를 펼쳤다. 언제 발검했는지 칙칙한 철검을 우수에 쥔 검왕이 탄검을 날렸기 때문이었다.
체면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 하수를 상대로 선공을 가한 검왕은 나를 쉴 새 없이 몰아붙였다. 철봉과 옥소를 빼어들 틈도 없이 나는 공간을 난도질하는 살벌한 검기들을 피해내야 했다.
검왕의 검을 받는 건 처음이지만 나는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한우경에게서 숱하게 겪어 본 검공이기 때문이었다. 검왕이 위력을 내 무위에 맞춰 조절한 탓으로 더더욱 흡사했다.
그러나 나는 곧 근본적인 차이를 알게 되었다. 한우경은 나보다 두 단계는 윗길의 강자였으나 나를 압도하기 위해서는 최대치에 가까운 전력을 쏟아내야 했다. 대충 대했다가는 내 반격을 허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검왕은 나를 완벽하게 제어하면서도 여유가 흘러넘쳤다. 심지어 그는 나를 석벽으로 밀어붙이는 과정에서 나를 쫓아 움직이지도 않고 제 자리를 고수했다. 검기만으로 십오륙 장을 격하고 내 움직임을 강제한 것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무력이었다.
나를 석벽에 붙여놓고는 검왕이 그물을 던졌다. 검황자와 한우경에게서 여러 차례 접했던 뇌풍우였다.
같은 절기였으나 압박감은 사뭇 달랐다. 나는 나를 덮쳐오는 회오리바람과 소낙비를 빠져나가지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았다. 검왕은 내가 탈출에 실패할 시 검기에 실은 내력을 거둘 성정이 아니었다.
나는 현재 내가 도달한 극점의 절(折)과 회(回)와 이(移)를 동시에 구현했다. 그리고 내가 섰던 자리에서 십여 보 떨어진 곳에 나뒹굴었다. 나를 대신해 검기의 폭풍우를 얻어맞은 석벽이 깨지며 연무장에 돌무더기가 비산했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생사투였다면 당연히 중심을 잃고 바닥에 엎어진 순간 목이 달아났을 테지만 검왕이 가일수를 늦춘 덕분에 나는 명줄을 보존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나는 검왕의 후속 공격에 대비했다. 그러나 검왕은 이미 녹슨 검을 검갑으로 돌려보낸 후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어째서 무현검맥의 검사들은 하나 같이 흑도 나부랭이들도 들고 다니지 않을 싸구려 철검을 부리는 걸까.
한우경과 검황자만 그런 거라면 몰라도 검왕까지 그렇다면 전통이거나 규율이라고 보아야 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보검을 구할 수 있을 그들이 철검을 고집하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한우경에게 진즉 이 수수께끼에 관해 물어보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이제 그가 검총으로 떠나면 오래도록 답을 듣지 못할 것이었다.
나를 직시하는 검왕의 차가운 눈빛이 내 잡념을 날려버렸다.
나는 고비가 한 번 더 남았음을 직감했다. 내 ‘재주’를 본 검왕은 헷갈릴 것이었다. 내가 비처에 들기 전 검황자의 성취가 내 재주에 뒤지지 않음을 확인했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불과 며칠 전에 치렀던 삼차전에서도 검황자가 나에게 패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검왕은 그 결과가 석연치 않다고 여길 것이었다. 기실 일-이차전 때와 마찬가지로 누가 이겼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박빙의 승부였다.
나는 검왕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검황자와 정식으로 사차전을 벌이라고 명령할까봐 염려스러웠다. 질 가능성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생사를 가르는 일전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었다. 그 경우 저승으로 떠날 자는 검황자가 될 터였다. 어쩌면 둘 다 염왕전에 가게 될지도 몰랐다. 아무튼 검황자가 살 일은 없었다. 그 말은 비무 후 나도 그의 뒤를 따르게 될 거라는 뜻이었다. 검왕이 나를 살려두겠는가.
그렇다고 검황자에게 고의적으로 패배하는 건 죽기보다 싫었다. 설사 그러고 싶더라도 검황자가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가 그럴 수 있다면 검왕은 말하나 마나였다.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를 두고 고심하는 찰나 한우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허허, 보았는가? 그런데 한 가지 더 알아두는 게 좋겠구먼. 그 아이는 실전에서 보다 강미를 발휘하는 유형일세.”
한우경의 의도는 명백했다. 검황자가 나를 확실히 능가하는 무위에 이르기 전에 우리 둘을 붙이지 말라는 조언이자 경고였다.
한우경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고 나를 쏘아보던 검왕이 말했다.
“가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말은 내가 아니라 검황자에게 던진 말이었다. 검황자는 검왕에게 저항했다.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사부.”
일순 검황자가 무릎을 꿇었다. 자의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검왕이 발한 압기에 눌린 것이었다.
“감히 나를 거역할 참이더냐?”
검황자는 버텼다.
“제가 이룬 것을 보셨지 않습니까? 석 달 남짓한 사이에 지난 삼 년보다 훨씬 다대한 성과를 얻었습니다. 저이를 꺾을 무위에 이를 때까지 여기서 수련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반드시 올해 안에…….”
“그만! 총에서 하면 된다.”
“하지만 사부! 저는 이곳에서…….”
“그만 하라니까. 자꾸 토를 달면 너를 홀렸다는 그 계집아이를…….”
검왕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검황자가 부르짖었다.
“안 됩니다. 만약 그녀에게 손을 대시면 저는 다시는 검을 들지 않을 것입니다. 죽어도, 컥!”
기음을 토해낸 검황자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검왕이 발산하는 노기가 수천 평의 광장을 장악했다. 나는 황급히 원력을 끌어올려 내부를 보호했다. 괴선과 광객도 허둥지둥 호신강기를 두르는 기색이었다.
한우경이 소리쳤다.
“진정하게, 현제. 누구보다도 광이의 기질을 잘 알지 않은가. 누른다고 들을 아이가 아니잖은가. 그러다 정말 큰일 나겠네.”
검왕이 일으킨 가공스러운 압기가 엷어졌다. 한숨 돌린 내가 상황에 끼어들려는 찰나 검왕이 선수를 쳤다.
“그 계집을 데려오라.”
검왕의 시선을 받은 괴선은 군말 없이 비처로 나가는 통로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잠시 후 진소월을 데리고 지하광장으로 돌아왔다.
제자의 체면을 고려한 듯 진소월이 오기 전에 압기를 풀고 검황자를 일으켜 세웠던 검왕이 말했다.
“내 명을 철회하지는 않겠다. 너는 나와 함께 총에 복귀해야 한다. 단, 저 계집도 데려간다. 더 이상의 첨언은 불허한다.”
검황자는 침묵했으나 나는 즉각 항의했다.
“그녀는 전리품이 아닙니다. 먼저 그녀의 의사를…….”
나는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찌그러졌다. 입도 다물어야 했다. 입을 열면 나를 조이는 압력으로 인해 내장이 터져 나올 터이기에 어쩔 수 없는 처신이었다.
한 눈에 상황을 파악한 진소월이 나를 구원하고 나섰다.
“저는 어르신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런데 가기 전에 한 말씀만 드려도 될는지요?”
검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검황자를 흘긋 쳐다보고는 진소월의 발언을 허용했다.
“말해 보거라.”
“감사합니다, 어르신. 저이는 제가 전리품이 아니라고 했지만 기꺼이 전리품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검황자의 표정이 변했다. 검왕도 관심을 보였다.
“무슨 소리냐?”
“다음번 저 두 공자가 치를 결전의 승자에게 저를 바치겠습니다.”
진소월의 폭탄선언에 검황자의 백옥 같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검왕이 그에게로 눈을 돌리더니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얼마면 되겠느냐?”
진소월을 일별한 검황자가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강렬한 안광을 쏘아냈다. 승부욕! 호승심!
“일 년, 아니 반년만 주십시오, 사부.”
미소 비슷한 표정을 머금은 검왕이 나를 보았다. 그러더니 내 의견을 물어보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구월 초하루에 검총으로 와라. 그날의 승부에서 이긴 아이가 저 계집을 갖는다.”
* * *
진소월은 떠났다. 그녀의 청을 수용한 검왕은 강태수를 일행에 포함시켰다.
검황자는 비처를 나가는 순간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다시는 내게 패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내비쳤다.
나는 차마 진소월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눈빛으로 나를 위무했다.
‘당신을 믿어요.’
기실 위무라기보다는 어떻게든 육 개월 후의 대결에서 검황자를 물리치고 자기를 되찾으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것과 무관하게 나는 무조건 승리할 작심이었다.
나에게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한우경이 검총으로의 귀환을 마다하고 비처에 남기로 한 것이었다. 검왕이 지금 가지 않으면 다시는 검총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거라고 협박했으나 한우경은 뜻을 고수했다.
나중에 한우경에게 물어보니 검총의 모든 검사들로부터 검종(劍宗)으로 인정받은 이만이 자유로이 검총을 출입할 수 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이 검총을 나가거나 다시 들려면 그 검종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백사십 년 검총 역사 상 검종의 위를 획득한 이는 이백여 년 전의 절대검호 오유상과 당대의 검왕 둘 뿐이라고 했다.
나는 철검에 대한 의문도 풀었다. 내가 짐작한 대로 그것은 일종의 전통이었다. 오백 년 전 무현검맥을 창시한 이들 중 한 명이 대장장이 출신이었는데 내내 철검을 고수하다가 강기를 두르고도 검이 깨지지 않는 경지에 들어 제일검호에 오른 후 후인들이 너도 나도 그를 따라한 것이 유례였다고 한다.
진소월은 떠나기 전 내게 두 가지 당부를 남겼다.
말로 건넨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이들이 듣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간단한 짐을 꾸린다는 핑계를 대고 모옥에 들어간 후 종이에 글을 적었다. 종이를 접어 줄로 묶은 후 겉에 내 이름을 적어놓았기에 그것을 발견한 진청운은 펼쳐보지 않고 내게 전해주었다.
급하게 쓰느라 흐트러진 진소월의 필체를 보니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내용은 다소 생뚱맞았다.
진소월의 첫 번째 당부는 자기가 비처를 나가는 즉시 은신처를 옮기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가 무엇을 염려하는지를 알았다. 검왕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몰골을 가진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팔 척 장신의 해골은 유령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외양이 아닌가.
검총에서 비처까지 오는 동안 그를 목격한 자들이 부지기수일 터였다. 만약 그가 안평 근처까지 왔다가 다시 검총으로 향했다는 정보가 마련이나 사벌에 들어가면 곤란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그들이 추적과 탐지에 특화된 이인(異人)들을 파견하면 비처가 탄로될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진소월의 우려는 타당했으나 나는 한우경과 대화를 나눈 후 기우로 치부했다. 검왕을 데리고 비처에 오는 동안 동선이 외인들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그가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적이 없는 곳들을 골라 먹구름이 달을 가려 암흑으로 물든 야천을 비행하며 왔기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을 거라 단언했다.
한우경의 설명을 들은 나는 굳이 다른 은신처로 갈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기실 나는 지금의 비처, 정확하게는 비처에 딸린 연무장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진소월이 암시한 은신처엔 이런 장소가 없을 터이기에 어지간하면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 비처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그 안이한 결정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