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170
170화.
“어?”
잠에서 깬 앤은 지끈하고 울려오는 두통과 더불어 머리가 묵직하니 무거워 들리지 않았다.
어느새 잠들었나 싶어서 주변을 둘러보자 마차 밖으로 보이는 로아 제국의 수도, 로아니스.
마차를 타도 제페른에서 로아니스까지 적어도 보름을 걸릴 텐데.
제페른에서 체포당하고 마차에 탄 게 고작 몇 시간 전밖에 안 되는 것 같은데 어느새 도착해 있다.
“아, 머리야.”
지끈하고 차오르는 두통이 꽤나 거세다.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는다. 뭔가 떠올라도 사고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 기분.
“후우우우.”
앤은 잠시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대어 차분하니 호흡에 집중한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됨과 동시에 서서히 분노가 차오른다.
‘머리의 통증이 보통 게 아니다.’
단순한 통증이 아니라 뭔가 특별한 마법이나 약에 의한 강제적 숙면 때문에 찾아온 부작용이라고 판단한 앤.
최소 보름은 강제로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되자 허기가 지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잠시 눈을 감고 있는 동안 어느새 수도의 성문을 넘고 있는 마차.
그것 자체가 앤에게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단두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결국 또 여기에 와버렸어.’
현기증이 일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잠든 동안 영양제라도 놓았는지 손목에 주사자국들이 다닥다닥 뭉쳐 있었다.
돌아오는 동안 난리칠 게 분명하니 아예 난폭한 방법을 통해서 잠들게 만든 듯했다.
폴 벨크터스 기사단장과 그가 이끄는 흑광 기사단을 향한 앤의 증오는 커져갔으나 그렇다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달리는 마차라도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려 했으나 당연하게도 밖에서 잠겨있다.
결국 앤은 호화스러운 감옥에 갇힌 채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제국의 왕궁 안으로 들어서는 마차. 그 끝에는 뒷짐을 진 채로 앤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양쪽으로 길게 늘어진 기사들.
어깨에 수많은 목숨을 짊어지고 있으며, 발밑에는 핏물밖에 고이지 않은.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에 앉기 위하여 몇 년이고 암투를 벌여오며 살아온 아리안 황태자였다.
못 본 지 7년이나 지났기에 외모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앳된 모습에서 느껴지던 간악함은 이제 완전히 표면 위로 드러났으며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마저도 잔잔히 불길함을 흘리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고 밖에서 기사가 문을 열어준다.
깨어있는 걸 보고 살짝 놀랐지만 오히려 앤은 그의 어깨를 팍 밀치며 밖으로 나섰다.
“앤, 드디어 너를 만나는구나.”
그런 앤을 반겨주며 다가오는 아리안. 자신과 마찬가지인 금빛의 눈동자 안에 담긴 건 탐욕.
성장했다.
앤은 그런 감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나 황궁에서 자신의 혈족들과 파벌 싸움을 해왔던 남자는 어느새 작은 뱀에서 거대한 구렁이가 되어 있었다.
똬리를 틀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에 피부가 떨려왔다.
“아리안 오라버니…….”
“자, 이리 오렴. 오랜만에 너와 만났으니 아버님을 뵙는 게 좋겠구나.”
바로 옆으로 다가와 등을 떠미는 아리안. 앤은 엉거주춤하면서도 자신의 오라버니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되어버린 걸까.
처음엔 정의감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이안 아이넬이라는 소년이 선한 일을 행하다 몸을 다루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야기를 전부 듣고 앤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이안을 돕기로 했다.
그에겐 목숨을 구해진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7년이나 지났음에도 자신이 사용했던 워프를 감시하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제가 돌아오는 걸 그토록 기다리셨나요.”
그렇기에 원망을 담아 앤이 묻자 에리안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단다.”
이유가 있다?
앤은 혼란을 느끼며 에리안을 따랐다. 원래라면 어딘가 앉아 차라도 끓이면서 이야기를 나눠야겠으나.
그런 시간마저도 아깝다는 듯 황실 복도를 거닐며 에리안이 말을 이었다.
“아버님의 병세는 점차 악화되어 가고 있다. 몇 년 전부터 깨어나지도 못하고 계시지.”
“…….”
안타까운 상황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문 채로 앤은 침묵을 고수한다.
“나와 둘째 그리고 셋째까지. 아주 치열하게도 황궁의 물 밑에서 싸워오고 있었지. 그것들은 자신이 손을 내밀면 안 되는 부분까지도 바라고 있었어.”
“그건 아버님이 정하실 일이죠.”
“…….”
우뚝 멈춰선 에리안.
장남이기에 사실상 가장 황제의 자리에 가까운 건 그가 맞았으나 의외로 파벌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너도 속국의 뇌물이나 받아 처먹는 귀족을 뒷배로 가진 오빠들이 황제의 자리에 앉는 걸 바라진 않잖니.”
꽤나 거친 언사.
속국에서 귀족들에게 뇌물을 쏟아내며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황자를 밀어준다.
다음 황제의 자리에 누가 앉는가에 따라서 속국들의 처우가 결정되기에 그들 역시 사력을 다해 로아 제국의 체스판에 끼어드는 것이었다.
그 와중에도 에리안은 오롯이 제국만 바라며 속국의 잔재주에 오히려 역정을 내는 다소 엄격한 폭군의 행보를 걷고 있었다.
“저는 상관없어요.”
“어리석긴.”
앤의 대답에 혀를 쯧 하고 찬 에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슬그머니 앤을 바라본다.
“어쨌든 네 말이 맞다. 결국 후계는 아버님께서 정하실 일이지.”
하지만 그 아버님이 지금 병상에 누워있다. 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소리였으니 이제 황자들끼리 아예 대놓고 전면전을 벌이지 않을까 했는데.
“1년 전, 아버님께서 딱 한 번 깨셨다.”
“……!”
“그때 후계를 정해달라고 우리 다 같이 꽁지에 불붙은 여우 새끼마냥 달려갔지. 당시에는 정말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요?”
그렇다면 그때 아버님이 후계를 정했다며 그만이겠거니 싶었으나.
“아버님은 딱 두 마디 하셨다.”
손가락을 두 개 펼치며 에리안은 의미심장하니 말했다.
“유언장. 찾아라.”
“……!”
“그래, 아버님께서는 이미 유언장을 작성하셨던 거야. 그런데 유언장은 없다. 이러니 우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지.”
유언장에는 분명히 다음 황제가 적혀 있다. 그것을 무시하며 자기들끼리 싸워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면.
사실상 반란과 크게 다를 바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게 된다.
무력으로 자리에 오른 정당성 없는 황제.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계속 잠들어 계셨어야 했다. 그걸 핑계 삼아 아예 결판을 냈으면 벌써 나는 황제가 되었을 텐데.”
“……유언장을 아직도 못 찾으셨군요.”
“그래, 1년 동안 나와 다른 형제들이 로아 제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지.”
텁.
에리안의 양손이 앤의 어깨 위에 얹어진다. 그의 악력이 강하게 소녀를 짓누르고 들어오며 압박감을 선사한다.
“크읍!”
옅은 신음을 흘리는 앤을 내려다보며 아리안은 여전히 뱀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로아 제국에 없는 누군가가 가져간 게 아닐까? 그렇다면 외부에 있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저, 저는 몰라요!”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네가 황궁에서 도망치기 전 아버님께 찾아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그건 맞지만 유언장에 대해서는 몰라요! 애초에 제가 찾아갔을 때도 아버님은 잠들어 계셨다고요!”
“아, 그래?”
몸부림치는 앤.
하지만 아리안의 목소리에는 이미 반쯤 확신이 담겨 있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와서 머리가 좀 굳은 모양이구나, 시간이 조금만 있으면 금방 떠올릴 수 있을 거야.”
“크으읍!”
“유언장만 있으면 끝이다. 앤, 네가 길게 이어져 온 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거야.”
황제라는 자리를 너무 오래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이미 에리안 황자는 찐득한 황실의 핏물이 깊게 잠식된 상태였다.
* * *
끼이익.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햇볕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린다.
공기조차 다르게 느껴지는 바깥. 나도 모르게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그려졌다.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서자 기사들이 곧장 나를 반겨준다.
“새끼, 정신 나간 거 보소.”
“어린놈한테 좀 가혹한 시간이긴 했을 거야.”
“자아, 가자.”
내가 제대로 걷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나를 들쳐 업는 기사.
어디로 가는 건지 모르겠으나 슬쩍 고개를 돌려 독방 안쪽을 확인한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모습을 감춘 마법으로 뒤를 졸졸 따라오고 있는 힐다가 느껴졌다.
“하아.”
나를 들쳐 업은 기사가 갑옷을 입고 있었기에 딱딱해서 아프긴 했으나 서늘한 게 시원하긴 했다.
“밖에서 보니까 몰골이 말이 아니네.”
갑자기 귓가에 속삭이는 힐다. 우리끼만 알고 있는 비밀을 만들자는 소녀 같은 목소리에 살짝 당황했다.
“앙? 뭐라고?”
기사의 귀에 중얼거림으로 들렸는지 윽박지르듯 물어온다.
“아무것도 아니야.”
힘이 빠진 목소리로 대충 대꾸하자 기사는 혀를 차며 나를 쥔 손에 힘을 더욱 준다.
“어린놈이 말투 싸가지 하고는.”
“독방에 있다 나와서 그런 거지 뭐. 원래 저기 있다가 나오면 혼잣말 하는 놈들 많잖아.”
그냥 참으라며 옆에서 한마디 보태는 기사. 나는 독방에서 지내느라 정신 나간 시늉을 대충 하면서 주변을 계속 둘러본다.
제국의 수도 로아니스.
그곳에서 황궁으로 가는 줄 알았으나, 의외로 나는 황궁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뭐야, 어디 가는 거야?’
그런 의문은 길게 가지 않았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비대로 보이는 남자에게 나를 인수한 것.
“독방에 보름 정도 있어서 정신머리가 나갔다. 자해 흔적이 있는데 조심하고. 먹을 건 주면 알아서 먹는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명부 등록하면 안 된다. 유치장에도 어떤 흔적이나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해.”
“넵, 묘지기한테도 미리 말해두겠습니다.”
아주 대놓고 나를 죽이겠다고 말하는구나.
일단 가둬놓고 때가 되거나 수틀리면 바로 죽일 수 있도록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을 하겠다는 노골적인 방식.
인수인계된 나는 다시 로아니스 시내에 위치한 경비대 구치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독방보다는 훨씬 낫네.’
탁 트여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몸을 웅크린 채로 잠들었거나 멍 때리고 있는 수감자들도 있다.
어쨌든 독방에 비해서는 몇 배는 좋은 장소였다.
그들은 나를 지하에 있는 유치장에 집어넣고는 무엇도 내게 요구하거나 하지 않았다.
정말 없는 사람처럼 집어넣어 둔 뒤, 그냥 명령이 떨어지면 죽일 셈이겠지.
‘건물 안에 몇 명이나 있을지 모르겠네.’
오면서 봤을 때는 4층 정도의 건물이었는데 지하에 있는 유치장 규모를 봤을 때 관리를 위해선 꽤 사람이 필요할 듯 보였다.
“뭐, 별 상관 없겠지.”
내가 심드렁하니 중얼거리자 뒤에 있던 수감자 중 하나가 짜증 낸다.
“애새끼가 뭐라고 구시렁거려. 시끄럽게 굴지 말고 이리 와 봐.”
“반반한데?”
“남자 맞지? 아쉽네.”
한 사람을 시작으로 수감자들이 나에게 뭔가 요구하듯 찾아온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내가 손과 발 둘 다 묶여 있어서 훨씬 만만하게 보였던 듯싶으나.
“힐다.”
파캉!
파캉!
양손과 발에 묶여 있던 수갑이 박살나며 바닥에 떨어진다.
마술쇼라도 본 듯 어벙하니 입을 벌리는 수감자들.
나는 오랜만에 자유가 된 손과 발을 풀면서도 마몬이 안정적으로 억제되고 있음을 느끼고 씨익 웃어 보였다.
“건물 통제해 줘. 금방 끝낼게.”
“소환수면 주인님 명령은 또 따라야지!”
투명화 마법을 쓰고 있는 힐다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건물 전체에 두꺼운 마나의 막이 씌워진 걸 느낀다.
“참아도.”
마나를 끌어올리며 마법진을 그려낸다. 그 안에서는 한때는 성검이라 불렸던 장검이 모습을 드러냈고.
“너무 오래 참았어.”
두툼한 창살을 깔끔하게 베어 넘기며 나는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