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89
89화.
“원하는 게 뭐냐.”
괜히 가주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건 아닌지, 메디안은 계산이 빠른 인물이었다.
자신의 목덜미가 이미 물린 상황이라는 걸 정확하게 인지하는 그는 한층 누그러진 기세로, 하지만 완전히 포기하진 않은 자세를 취했다.
내가 펼쳐둔 판에 조금이라도 허점이 있다면 바로 뚫고 나가려 몸을 비틀겠지.
다시 검을 물려 검집에 꽂은 그였으나, 검자루 위에는 손을 얹고 있다.
“저도 무조건 레이로즈 가문이랑 척을 질 생각은 없습니다.”
“입에 발린 말을 지껄이는군.”
약점을 쥔 상태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게 전혀 와닿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진심이었다.
마리아는 레이로즈 가문의 이름에 큰 무게감을 두고 있지 않다.
그렇기에 사실 그녀를 가문과 절연시키는 건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그래도 레이로즈 가문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리아에겐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것이며.
또한 우리 부단장이 연관되어 있는 가문이라서 억척스럽게 적대관계를 형성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단순히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서 자극적인 발판으로 약점을 잡은 것뿐.
“레이로즈 가문에서 원하는 것과 제가 원하는 게 일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일치한다?”
“마리 레이로즈의 등을 쫓고 있지 않습니까.”
“…….”
아무 말이 없지만 무언으로 긍정하고 있었다.
“마리아는 충분히 그 뒤를 이어 레이로즈 가문을 빛낼 수 있는 인재입니다. 하지만 가문에서 그 아이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레이로즈의 검술이 그 아이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맞습니다.”
“흠.”
잠시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던 메디안의 눈이 작게 뜨인다.
생각보다 쉽게 받아들이는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그 역시 몇 번이고 했던 생각인 듯싶었다.
‘이러면 얘기가 편해지겠는데?’
마리아와 레이로즈의 차이를 가주가 인지하고 있다면 생각 외로 쉽게 이야기가 흘러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던 순간.
메디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마리아에게는 어떤 검술도 어울리지 않는다.”
확고한 단언.
자신의 딸을 향해 말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든 확고부동한 선언 속에는 일말의 기대감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 아이는 짐승이다. 더 나아가 마수라고 볼 수 있지. 나부터 시작해서 내가 초청한 모든 검사들이 처음 마리아를 보았을 때 같은 말을 했다.”
“…….”
“실로 놀라운 재능이라고. 이 아이라면 단 한 자루의 검으로 대륙을 평정할 수 있으리라고.”
툭.
검자루 위에 얹어져 있던 그의 손이 툭 떨어진다. 지친 그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며칠 후면 다들 나가떨어진다. 마리아의 본성은 누구도 억누르지 못했다. 짐승과 같은 저 아이에게 검술이란 거추장스러운 것뿐이다.”
“…….”
“후우,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 대화가 편하군.”
쓴웃음을 입가에 건 채로 메디안은 선을 긋는다.
“고작 재능만을 보고 누구 핏줄인지도 모를 천한 것을 딸로 들이는 게 아니었다.”
질타의 한마디가 입안을 맴돌지만 억지로 삼킨다.
내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에게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정의감 넘치는 어린아이의 투정 정도로밖에 안 느껴지겠지.
해줄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결과로 증명한다.
마리아의 봉우리 진 재능이, 분명하게 피어오를 수 있음을 직접 두 눈으로 보게 해준다.
“후우, 정식 기사도 못한 걸 고작 생도 주제에? 마리아를 이기고 1학년 수석 자리를 차지했다고는 들었지만, 그 정도 가지고는 우리 가문에서 입을 놀리지 못한다.”
은퇴한 기사단장, 메디안.
적장미 기사단의 기사단장 마리안느와 부기사단장 메릴 등.
나이트 아카데미 1학년 수석의 이름값은 이들과 감히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하지만 내게는 그들이 모르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은빛사자 전 기사단장 라인 레이먼드.
스스로 이런 말하는 건 좀 그렇지만 우리한테서 파생되었다 말하는 적장미 기사단의 단장 정도로 비할 수 없는 이름값이었기에.
“결과로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어깨를 펼치며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입가에 내건다.
“보름. 딱 보름만 주시면 본인의 딸이 얼마나 위대한 검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어이가 없군, 도대체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지?”
“마리아가 필요하니까요.”
언제 어디서 또 다른 대악마가 고개를 들며 대륙을 위협할지 모르는 상황.
그들을 막기 위해선 견고한 방벽이 될 기사단을 키울 필요가 있었고.
그녀 정도의 전력이면 제2의 은빛사자 기사단을 시작할 때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우선은 나이트 아카데미에 잡아두면서 나와 함께 졸업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레이로즈 가문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결국 당장에 마리아의 보호자는 메디안 레이로즈였으니까.
“제가 당신에게 마리아의 가능성을 다시 보여드리면 마리아를 나이트 아카데미에 다시 다닐 수 있게 해주시죠.”
“네가 보여주지 못한다면?”
냉철하게 꽂혀 들어오는 시선.
사실상 이쪽에 더 관심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했다.
“뭐든 원하시는 걸 해드리죠. 가문의 비밀을 누설하지 못하게 마법을 걸거나, 혹은 아예 제 목을 치셔도 상관없습니다.”
“아카데미에 있다는 네놈의 동료까지 불어야 할 거다.”
“그럼요.”
미안, 다이니.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 속으로 사과 한마디 정도는 한다.
“후, 머물 방과 음식을 준비하라 하인들에게 일러두마. 딱 보름이다.”
“알겠습니다.”
성립된 거래.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검술을 가르치는 건 상당히 촉박한 시간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메디안도 코웃음 치며 허락했겠지만.
‘이미 아카데미에서 꽤 가르쳐 뒀다.’
윤의 검술에 대한 기본기는 이미 전부 가르쳐 둔 상태이다.
심화적인 부분을 가다듬고 집중적으로 가르친다면 시간이 촉박하진 않았다.
“책임이라는 걸 질 줄도 아는 나이라는 건 기억하길 바란다.”
17살이라는 건 전혀 변명거리가 될 수 없다고 못을 박는 것이었으나.
나에게는 오히려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확고하게 자리 잡은 마리아를 향한 불신.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기에….)
“뭘 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밖으로 나가려던 걸음을 멈추고, 인상을 찌푸리며 메디안을 노려봤다.
“가장 오래 마리아를 봐왔으면서 그 아이의 가치와 방향성을 찾아내지 못한 걸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겁니다.”
쾅.
불쾌한 감정을 실어 그대로 문을 닫은 나는, 곧바로 마리아를 찾아 복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 * *
며칠 후.
이안 아이넬과 마리아 레이로즈는 가문의 훈련장을 거의 전세 낸 것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누구도 그들에게 따로 핀잔을 주거나,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가주인 메디안의 허락이 떨어졌기도 했거니와 내심 저택 내부에서는 흥미롭게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이안 아이넬이라는 소년이 고삐 풀린 망아지와 같던 마리아 레이로즈에게 정교한 검술을 가르칠 수 있는가.
처음에는 당연하게도 실패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의외로 반대 의견들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전문적인 검사 분들이 딱딱하게 가르쳐서 마리아가 거부감을 느꼈다.’
‘같은 나이 또래에게만 배울 수 있는 게 있다. 마리아는 그게 검술이었던 것뿐이다.’
‘마리아가 이안을 연모하는 감정을 품고 있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거다.’
등등.
꽤나 다채로운 의견들이 나오고 있었으나 사실 메디안에겐 별 상관 없었다.
만약 마리아가 정말로 검사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레이로즈 가문에게 있어서는 더없는 호재.
그녀가 실패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꼬맹이를 처리함과 동시에 어차피 버려질 운명이었던 마리아가 그대로 버려질 뿐이었다.
이안과 마리아가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꽤나 열심히 노력한다는 건 알겠지만.
“후.”
당연히 메디안은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었다.
꾸드득.
손에 쥐어진 편지를 구기는 메디안의 미간이 좁혀진다.
로베르담에서 온 편지.
이안 아이넬이 말했던 것처럼 정말로 레이로즈 가문이 숨기고 있던 비밀들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안 아이넬 말고도 나이트 아카데미에 레이로즈 가문의 비밀을 알고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게 명확해진 상황.
메디안은 그걸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이안이 약속을 지킨다고 해도, 비밀을 알고 있는 소년을 그냥 둘 수는 없다.
수정구를 통해서 로베르담에 미리 보내둔 가문의 검사들에게 조사를 명령한다.
나이트 아카데미의 생도가 레이로즈 가문으로 편지를 보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니까.
아마 집배원이나 창구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어렵지 않게 정체를 알아낼 수 있을 거다.
나이트 아카데미에 있는 조력자를 찾아낸다면?
“결과가 어떻든, 약속 당일이 바로 네 목이 떨어지는 날이 될 것이다.”
가문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메디안은 상당히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 * *
“다이니 브랜드.”
레이로즈 가문의 검사들이 늦은 밤, 나이트 아카데미의 1학년 여자 기숙사 앞에 서 있었다.
내부로 침투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가주의 명령으로 이안의 짐을 챙기러 왔다고 말하며 아카데미에 들어왔고.
시간이 늦은지라 아카데미에 남는 숙소를 얻어서 숙박할 수 있었다.
레이로즈 가문의 검사들 역시, 나이트 아카데미의 졸업생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돌입한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으며 여자 기숙사 정문을 통해 당당하니 들어서는 기사들.
하나같이 실력 있는 기사들이었기에, 스스로의 기척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섯 명의 기사들이 걷고 있음에도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고요하다.
기숙사 사감을 맡은 여인이 늦은 새벽임에도 아직 잠에 들지 않고 조명등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으나.
“어?”
빛 밖에서 기사들이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그녀.
책에 집중했던 탓도 있지만, 그만큼 다섯 기사들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계단을 오른다면 또 모르겠으나 기사들에겐 운이 좋게도 다이니 브랜드의 방은 1층이었다.
날이 밝을 때 미리 다이니의 방을 파악해 뒀다.
그들은 뱀이 미끄러지는 듯한 유려한 발걸음으로 어둠 속을 이동했다.
다이니의 방문 앞에서 문고리를 살짝 돌려본다.
문이 잠겨 있어도 방법은 있었겠지만 부주의하게도 열려 있는 문.
그들에게 내려진 건 다이니를 가문으로 데려오라는 납치 명령.
그들 중 하나가 포박용 로프를 꺼내 든다.
여전히 가벼운 문소리조차 내지 않고 안으로 들어온 기사들.
방 내부가 좁았기에 바로 다이니 브랜드를 찾아낼 수 있었지만.
그녀는 비몽사몽한 상태에서 눈을 긁적이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암.”
깨어 있다.
이미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그보다 더 큰 변수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쩝쩝쩝.
닭고기의 살을 다 발라낸 후에도, 뼈까지 쪽쪽 빨아 먹고 있는 창을 쥔 여인.
그리고 또 하나.
양쪽 다리가 의수로 되어 있는 여인이 의자에 앉은 채로 기사들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
보아서는 안 될 심연을 눈에 담은 듯한 공포가 기사들에게 차올랐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 자체가 되지 않는 와중.
한나가 천천히 일어나며 혀를 찬다.
“발소리, 너무 크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