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96
96화.
꽂혀 들어오는 살기를 정면에서 받으며, 윤은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혼자서 왕국의 정예병들과 장기전을 지속하는 건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에게 이들을 한 번에 베어 넘길 수 있는 엄청난 대마법이라도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이럴 때면 또 마법사들이 부럽단 말이야.’
예를 들어서 라인 레이먼드와 함께 다니던 대마법사 힐다.
라인과 친구라서 같이 다니긴 했지만, 은근히 자신을 무시하던 게 아니꼽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어딜 보는 거야!”
그런 와중에도 기사들 사이에 섞여든 마리아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계속해서 덤벼들고 있었다.
전신에 마몬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마리아의 마나와 뒤섞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다룸에 있어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히려 윤은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자신은 레비아탄으로서 이 땅에 소환되어, 그 힘에 잡아먹힐까 두려워 최대한 자중하고 있었는데….
마리아는 그런 윤을 비웃듯이 거리낌 없이 마몬의 힘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쩌라는 듯.
무지에서 비롯된 만용이다.
그 힘의 대가를 모르기에, 어리석음에서 피어오른 담대함이다.
하지만.
“그게 멋진 거야!”
윤의 전신에서 비명을 토해내는 남색 기운이 퍼져 나온다.
달려들던 마리아의 몸을 밀어낼 정도로 강렬한 힘.
방금까지 윤이 다루던 검술과는 또 다른 방식의 힘에 마리아와 주변 기사들의 눈이 크게 뜨인다.
끊임없이 알 수 없는 기운이 흘러나오는 윤을 향해 감탄과 절망이 동시에 피어오른다.
“후우.”
폭발적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남색의 기운은 용의 형상을 띠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드디어 자신을 억압하던 여인으로부터 벗어났음에 기뻐하면서도 이 세상을 향한 증오를 토해내고 있었다.
“어우, 씨.”
“전열을 갖춰라! 함부로 다가가지 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금이 기회야! 여기서 그냥 손 놓고 있으면 위험하다!”
순식간에 급변한 분위기에 빠르게 뒤로 물러나는 마리아.
신성 기사단과 적장미 기사단은 각기 다른 방향성을 취했다.
로만의 신성 기사단은 거리를 벌리며 사태를 파악했고, 마리안느의 적장미 기사단은 오히려 앞으로 돌격했다.
둘 중 누구의 판단이 옳은지는 말할 수 없었다.
둘 다 결론적으로 틀렸으니까.
아무 말 없이 휘두른 윤의 검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날카로움과 극에 다다른 검술을 통해서 상대를 제압해 왔다면….
지금은 거기에 비정상적인 근력과 마나까지 덧붙여진 상태.
콰아앙!
“끄아아악!”
“밀린다아!”
한 여인이 검을 휘두른 결과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의 검격.
적장미의 기사들은 하늘로 붕 떠올라 그대로 저택 정원 사이사이로 날아갔다.
그녀의 검을 육신 삼아, 대악마가 재림이라도 하듯 남색 기운이 기사단 사이를 누비기 시작한다.
“언니…….”
침울한 목소리의 메릴.
마리안느는 주먹을 꽉 쥐며 입술을 물었다.
“후퇴.”
“후퇴하라아아! 물러나아아!”
마리안느가 치욕스러운 한마디를 던지자마자 메릴은 금세 단장인 언니의 명령을 외친다.
물러나는 적장미 기사단.
판단력에서 신성 기사단과 로만에게 밀렸다는 생각에 마리안느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수치스러웠으나….
로만의 판단 역시 틀렸음을 알게 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
레비아탄의 힘을 다루는 윤은 시야가 더욱 넓어짐을 느끼고 있었다.
태도에 비친 본인의 눈동자가 어느새 세로동공이 되어 있음을 깨닫고 쓰게 웃었지만….
덕분에 저 멀리.
레이로즈의 저택에서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은발의 소년이 보였다.
“좀 작긴 해도, 얼굴은 옛날보다 나은데?”
오랜 벗을 눈에 담자 윤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앞에 있는 기사들이 거슬렸다.
“마침 잘됐어.”
안 그래도 보여주고 싶던 것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훨씬 위력적으로 뽐낼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윤이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술자리에서 걸핏하면 서로 허세를 부려대곤 했었는데.”
뻗어 나가는 대악마의 기운.
그 중심에 서 있는 윤은 담담하니 말을 이었다.
몇 합 만에 거대한 바위를 베어 넘길 수 있다던가, 자신의 검기가 더 멀리 뻗어 나간다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경쟁.
“알딸딸하니 술도 몇 모금 마시고, 기분 참 좋았는데 말이야.”
300년 전에는 맛있는 안주가 없이도 서로 잔을 나누는 것만으로 그렇게 술이 달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계속 이어진 검술에 대한 허세는 결국 초월적인 부분으로 넘어갔었다.
해안에 방파제로 놓인 거대한 바위를 일합에 베어 넘길 수 있다는 라인 레이먼드의 말에.
윤은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바다를 가리키며 외쳤었다.
저 바다를 베어 넘기겠다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그러자 방금까지 사방으로 미쳐 날뛰고 있던 용의 형상이 수축되더니.
비교적 작은 윤의 태도로 맹렬하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빛을 뿜어내던 윤의 검이 준비를 마쳤다는 듯 울어왔다.
콰득!
크게 앞으로 내딛은 발에 지면이 길게 울려온다.
물장구치듯 흙무더기가 사방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
태도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하면서도 파멸적인 검기.
앞에 있는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가는 재앙의 일검.
극에 달한 검술은, 마법과도 비견된다던 말마따나.
스스로의 검술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검객이 지평선 너머까지의 바다를 베어 넘기기 위해 사력을 다해 만든 오의.
몇 번이고 검의 한계를 뛰어넘는 위력을 보여준 윤이었으나, 이번만큼은 압도적인 힘을 통한 두려움을 넘어 동경을 정면에 있는 기사들에게 선사했다.
그렇게 열심히 가꾸었던 정원은 반파되듯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검기가 만들어낸 투박한 흙길 너머에 서 있는 건 은발의 소년.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그에게 윤은 씨익 웃어주었다.
“된다니까?”
옛 술자리에서 나눴던 농담을 현실로 뒤바꿨다.
그런 자신의 검술을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거리던 순간.
우드드득!
등 뒤로 화상을 입을 것 같은 뜨거운 감각이 응축된다.
신체 내부에서 뭔가가 튀어 나오려고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윤이 다급하게 검을 놓으며 몸을 웅크렸으나.
“끄아아아악!”
살갗을 찢으며 쑤욱 솟아오른 거대한 날개.
그 밑으로 지면을 밀어내듯 튀어 나온 건 우둘투둘한 가시가 박힌 용의 꼬리.
이마 위로도 두꺼운 뿔이 뚜둑거리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바다를 베어 넘기겠다고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던 과거의 말을 지키듯 고작 일격에 기사단을 제압한 윤을 본 순간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레비아탄의 힘이 담기긴 했더라도 어쨌든 그녀는 술자리에서 하던 농담을 실제로 구현한 거였으니까.
하지만 그 이후로는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갑자기 윤의 몸에서 날개와 꼬리 같은 마수 특유의 신체 기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외형적인 부분 때문이 아니라 마몬의 각인이 거칠게 소리쳐 대기 시작했으니까.
저 여인을 먹어 치우라고.
레비아탄교의 수장이었던 렉터를 보았을 때보다도 더욱 격렬한 충동.
탐욕스러운 대악마는 본인의 동족까지도 한 끼의 식사 정도로밖에 보지 않고 있었다.
“미친놈.”
그런 충동을 억제하며 윤에게 달려간다.
내가 너무 늦었던 걸까.
초조한 마음을 담아 달리기 시작했으나….
바닥에 떨어트린 자신의 검을 찾아 손을 더듬는 윤.
곧이어 용처럼 길고 두꺼워진 손톱에 닿은 자신의 검을 손가락을 까딱거려 가져온 윤이 소중하다는 듯 그것을 끌어안는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은 채로, 검만큼은 놓지 않겠다는 신념 속에서 끈적한 침과 검은 피를 토해냈다.
슬며시 고개를 든 그녀가 나를 바라본다.
바로 앞까지 온 나를 응시하는 세로동공.
눈동자마저 변해버린 모습은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모습까지 보여주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윤, 일단 진정을…….”
“내가 말이야!”
레비아탄의 기운이 치솟아 올라와 신체를 강탈하려는 상황에서도 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만 정신을 바로 붙잡고 있을 수 있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
“300년의 세월을 지나서 너를 찾아왔어!”
“…….”
“나와 마찬가지인 꼴이 되어버린 너에게 안식을 주기 위해서, 대악마 따위에게 몸을 빼앗길 너를 구해주기 위해서!”
한나와 도로시의 보고를 들었을 당시에는 아무리 대악마의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윤이 정말로 나를 죽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는 함께 검과 술을 나눈 벗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윤은 진심으로 나를 죽이려 하고 있다.
어떤 방해가 있었더라도, 그 모든 걸 다 넘어오며 이곳까지 당도했다.
대악마를 몸에 품고 있는 나를 죽이기 위해서.
하지만 그 말은.
반대도 통용되는 이야기.
누군가는 본다면 내로남불이라며, 스스로에게도 적용되는 소리가 아니냐 하겠지만.
윤은 바로 그것을 바라고 있었다.
대악마를 품에 담고 있는 나를, 윤은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니.
나 역시 마찬가지로, 자신을 진심으로 죽여 달라는 강압적인 요구를 해오고 있었다.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내게 찾아온 것이다.
“나는, 오롯이 검객.”
검 끝이 땅에 닿으며 그것에 기대어 겨우 몸을 일으킨 윤.
꼬리는 윤의 키보다 훨씬 길게 늘여져 있었고, 거대한 날개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육중하게 그녀를 깔아뭉개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윤은 쥐고 있는 검을 놓치지 않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왔어, 라인 레이먼드.”
“…….”
“너와 나누었던 그 시간을 잊지 못했기에 이 자리에 서 있어.”
드디어 결승선에 도달했다는 듯 그녀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어깨가 축 늘어진다.
몸에 힘이 풀리는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검을 쥔 손에 힘은 여전히 들어가 있었다.
“비록,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니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아.”
“…….”
“그깟 악마 하나한테 바짝 쫄아서 제대로 검도 휘두르지 못하던 나보다는, 차라리 괴물이 되어서라도 전력으로 너와 부딪칠 수 있는 지금이 나아.”
장죽을 꺼내고 싶지만 삐죽 솟아오른 손톱 때문에 자신의 품에 손을 넣을 수가 없어 보였다.
그게 뭇 아쉬운 듯 피로 뒤덮인 입을 쩝 다시며 다시금 나와 눈을 맞춘다.
“검을 뽑아.”
그녀의 담담한 요구에 맞춰 나는 허리춤에 걸치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청아한 울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검은 그녀를 상대하기엔 조악했다.
하지만 곧이어 나의 마나와 마몬의 기운이 뒤섞여 들어가며 검날의 색이 변모한다.
검게 물든 검을 바라보며 윤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옛날이야기도 좀 하고. 그러고 싶었는데 시간 관계상 다 건너뛰고.”
철컥.
윤의 검이 정확하게 나를 가리킨다.
“어디 한번, 마지막으로 신나게 휘둘러보자고.”
“그래.”
“마침 겉모습도 그럴싸하게 됐으니 마음 다잡기도 딱 좋지 않겠어?”
조금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는지 심호흡하며 윤은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또 한 번 대악마를 사냥하는 거야, 라인 레이먼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