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yo Black Prince RAW novel - Chapter 239
239화
2부 에필로그
“폐하께서는 요즘 고려에 너무 베푸시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오.”
“아닌 말이겠소. 이번에 태묘에 바쳤던 금주의 유해를 주는 것도 모자라 동평왕의 왕작과 관작도 높이고 세자도 태자로 높인 일은 아무리 생각하여도 너무 하였소. 본조가 개국한 이래 번국에 그렇게 해준 사례가 어디 있었단 말이오?”
고려의 신료들과 백성들이 연호 제정과 관작의 상승에 기뻐할 무렵, 남송의 신료들은 모였다 하면 그 문제로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이전에도 고려와의 수교에 대해 아뢴 바가 있소. 본조는 정강의 변 이전에도 고려와 협력하여 요를 제거하려 하고자 과도할 정도로 대우해주었으나 결국 고려는 응하지 않았고, 정강의 변 이후로도 고려와 연계하여 금 토벌 준비를 거의 다 마치고도 고려에서 거절하여 좌절된 바가 있다고 말이오. 헌데 금상께서는 어찌하여 그러한 과거를 잊으시고 고려에 저렇게 다시 이전과 같이 대우해주시는지는 아직도 이해가 되지가 않소?”
그런 이들 중에는 몽골을 앞두고 고려와의 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신료들이 있다면 그 반대도 있었다.
그들은 금을 잃고, 몽골과 대립하게 된 것을 북송이 여진을 끌어들여 순망치한이던 거란을 잃은 실수를 반복한 것처럼 고려와의 재수교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아니오. 오늘날 고려에 대함은 과거보다 더하오. 과거 본조가 그들을 국신사로 올려주고, 서하보다 우대했을지언정, 일개의 번국 세자에게 왕태자라는 참람한 용어를 하사한 적은 없었소. 그런데 오늘의 작태는 무엇이오. 과연 고려가 그렇게 유용하단 말이오?”
“그렇습니다. 아니 그래도 잇따른 재해와 전란으로 국고에서 소모되는 비용이 큰데 번국의 하사품이 막심하니 통탄스러울 따름입니다.”
일명 ‘고려 무용론(高麗 無用論)’을 주장하는 이들은 딱히 이번 관작 상승 건을 기점으로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었다.
동요국과의 전쟁으로 고려인 가잉이 표류 아닌 표류로 기착하였을 때 고려와의 재수교 이야기가 거론되었을 때에도 고려와 수교를 하여도 무용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금이 멸하면서 하북을 탈환하기 위해, 그리고 송몽전쟁 이후로는 몽골의 대군을 보고 고려의 존재가 없는 것보다는 낮다며 여겼기에 다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금 애종의 유해를 요청하면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금은 송의 구적. 그런 금의 근원이며 부모라 주장하고 금 애종의 유해를 달라는 고려에 대해 불만과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그나마 고려는 옛 금이나 서하와 달리 매번 진공을 하고, 거리가 있어, 위협이 적다라곤 하는데 이 몸은 그런 것보다 다른 것이 걱정이오. 고려에게 매번 보내는 하사품들이 적지 않은 비용인데 그들이 정말로 그만한 역할을 해줄지 말이오.”
이렇듯 그들에게 있어 이번 고려에 대한 처우는 모든 게 마땅치 않았고 불만과 불안투성이였다.
조정에선 고려와 수교한 것에 고려 세자의 공이 크다느니 고려과 우방국이 된 것이 나라의 흥복이라느니 하지만 정작 고려에서는 병사 1명 보내지를 않았고, 지난 전쟁에서도 스스로의 힘으로 몽골을 격퇴했다.
일각에서는 고려가 위협이 되었기에 그들이 오래 있지 못하고 후퇴한 것이라 주장하지만, 자신들이 보기엔 호들갑에 불과했다.
이번 고려의 승리 또한 혹자는 자신들과 달리 제대로 승리하여 돌려보냈다고 하지만, 파고 들어가면 고려에 쳐들어간 몽골군은 자신들에게 쳤을 때보다 적었고, 자신들과 달리 금세 끝난 것이니 고려야말로 대송이 있었기에 적들이 회군한 것이라 볼 수도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일찍이 소동파(蘇東坡) 선생께서도 고려와 수교를 하여도 털 한 가닥 만큼의 이익도 없다 하였소. 오늘날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저들에게 내릴 하사품이나 접대비용도 10만 관이 넘는다 하는데, 그런 비용을 낼 바에 무비에 들이는 것이 백배 나라에 유익할 것이오.”
“저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물론 고려무용론을 주장하는 이들이라고 고려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옛날부터 전해져 온 고구려, 고려의 명성과 어찌 되었든 몽골군을 번번이 격퇴한 것은 높이 사는 이들도 분명 있었다.
단지 그 힘이 자신들을 휘둘러 줄 것 같지 않다. 혹은 이대로는 큰 도움은 안 될 것이라고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초점은 저 계륵과도 같은 고려를 어떻게 이용해야 하는지가 초점이었다.
“그러나 본조에 미치지는 못할지라도 적당히 힘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고려가 힘이 있더라도 그들이 먼저 움직일 것이라 기대해서는 아니 됩니다. 천군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이 고려가 본조에 도움을 준 것을 놓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에 좌승상께서 사천성을 반환받은 공을 세우시긴 하였으나 사실 그때 치는 것이 맞지 않았나 이 말입니다.”
“옳소. 저 북적이 어찌 저렇게 쉬이 반납하겠소. 10만 대군이 고려에서 패하면서 피해를 입어 천조와 싸울 자신이 없어 그런 것이지. 구태여 예페를 늘려준 것도 실수였다 생각하오.”
“그 말이 맞습니다. 저 북적의 군사가 고려에 집중되고 있을 때 쳤다면 저 북적이 무슨 짓을 할수 있었겠습니까? 헛되이 관망하다가 기회를 놓쳤습니다.”
금상이 신료들을 존중하고, 성리학을 배움에 게으름이 없는 것은 사실이고, 그에 대해 불만을 가진 신료들은 없었다.
그러나 정작 고려에 대한 씀씀이도 자국에 못지않게 혹은 이상으로 대우해주는 것 같아 걱정이 들었고, 과한 베풂에 일부에선 ‘고려천자(高麗天子)’라는 비꼬는 이들도 나오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 그 자리에 모인 신료들은 모두 한숨을 쉬었다.
“두 승상분들께서는 폐하를 잘 보필하신다 들었는데 어쩌다가 이런 일이 일어났단 말인고….”
* * *
“…라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폐하.”
정청지는 세간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황제에게 보고했다. 그들이 제 딴에는 몰래 말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못 들을 정청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어찌 나라의 녹을 먹은 이들이 작당을 하고 있단 말인가… 쯧. 우선 그대로 두도록 하라.”
“하오면 따로 별지를 내리시기 전까지는 관망토록 하겠사옵니다. …하오나 폐하. 저들이 감히 폐하의 시책에 불만을 표하긴 하였으나 이번에 폐하께서 고려에 베푸신 것은.”
“…고려가 금의 적통을 이으면 장기적으로 본조에게 이롭다는 말을 한 것은 정 재상. 그대가 아닌가?”
“그렇긴 하옵니다만 하북의 백성들에게 금의 근원이 요동과 여진임을 상기시킨다면 언젠가 본조가 하북을 탈환하였을 때, 반발심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태여 관작까지 올린 것은….”
“그 또한 교린책의 일환이로다. 고려를 달래 몽고를 견제하는 책략은 경들도 동의하고 있지 않은가?”
“…….”
정청지가 말을 흐리고 있자 이번엔 동행해 온 사숭지가 입을 열었다.
“분명 폐하께서 하교하신 대로 지금 고려는 본조에 필요한 나라이옵고, 신 또한 그런 걱정에 폐하께 연(連)고려, 적(敵) 몽고라 간언을 올린 바 있사옵니다. 하여 폐하께서 고려에 대한 치세와 교린에도 여지껏 반대를 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은 지금 차마 진실이라고 믿을수 없는 일을 들었기에 폐하께 묻고자 하옵니다.
폐하. 이번에 고려에서 건너온 상인을 알도(알도)에게 하사한 것들 중에 역법에 관한 책들도 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옵니까?”
“…그 사실을 사 승상이 어떻게 아는 것인가?”
순식간 정색하며 되묻는 황제의 질문에 사숭지는 움찔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의도치 않게 알게 되었사옵니다. 이것에 대해 죄를 물으신다면 달게 받겠사옵니다. 하오나 그 전에 신하 된 도리로 도저히 묻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사옵니다. 폐하. 역법과 책력을 일개 상인에게 하사하시다니요.
그 상인이 고려와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니될 일이옵니다. 천문에 관련된 모든 학문과 일은 오직 천자의 전유물이옵니다. 그것을 아무리 교린의 일환이라곤 하나 번국에게 하사하시는 것은….”
“짐도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나 고려와 본조의 기후가 달라 정삭을 내려주어도 오차가 빈번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고려 세자(왕태자)의 청이 딱하기에 내려준 것이다.”
남송 황제의 대답에 사숭지는 아연실색하며 되물어야 했다.
“폐하. 아무리 그렇다 하여도 그리해서는 아니 되었습니다. 만일 이번 평왕을 비롯한 관작을 하사하신 것이 그것을 달래기 위한 또 다른 교린책이었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옵니다. 도리어 이번 일로 그 옛날 서하가 그러했듯 자신들이 진짜 천자라도 된 것처럼 연호를 만들고 정삭을 만들고 급기야 칭제까지 참칭 하게 된다면 본조는 물론 황상 폐하께서도 외국의 비웃음을 당할 것이옵니다.”
사숭지의 비판 어린 우려에 남송황제 조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세상천지가 천자의 것이며, 천자는 이방(異邦)의 문제도 보듬으라고 경연에서 가르치고, 정삭을 내린 것은 그러한 이방에게 책력을 하사하여 어려움을 달래기 위함이니 그것이 천자의 덕이고, ‘예’이며 통치로다. 그런데 지금 승상은 그러한 처사 앞에 번국은 이방이니 죽어도 무방하다, 어려움에는 눈을 돌리라고 간언하는가?”
“그, 그런 뜻이 아니옵니다. 소신은 그저 과거 고려가 연상(延祥), 정풍(正豐)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처럼 이번에도 그러한 참람한 행동을 벌이지 않을까 그것이 우려되어….”
황제의 노기 어린 반문에 사숭지는 순간 당황해서 말을 더듬거렸다.
유교를 국시로 하고 덕화를 국가 이념으로 삼는 나라에서 남송 황제의 주장은 명분상 덕화에 속했으며, 그 이상으로 흔치 않게 남송 황제가 분노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소 노기를 푼 목소리로 이어 물었다.
“경은 짐이 그것을 몰라서 그러고, 짐이 무슨 이유로 고려에 그러한 혜택을 준 것인지 진정 모르는가?”
“…….”
“경도 알고 있다면 그만토록 하라. 만약 연호가 생긴다면 그 문제야말로 외교로 풀어야 할 일이라 경을 염두하고 있었는데 경이 이러니 짐은 참으로 유감이로다. 경들이 짐을 믿고, 짐도 경들을 믿기에, 짐은 이러한 대사를 치른 것이다. 경들이 이렇게 불안에 떤다면 향후 짐은 누구를 믿고 대사를 벌인단 말인가?”
““…송구하옵니다.””
이번 일에 대해 더 이상 추궁하지 말란 말에 두 승상은 입을 다물었다.
이미 손에서 떠난 것을 다시 돌려달라고 청할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반환을 요청한다 한들, 고려가 거절이라도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다.
“이상 논할 것이 없다면 물러들 가라. 짐은 잠시 사색에 잠기고 싶구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기어코 축객령까지 떨어지자 사숭지와 정청지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재상이 물러나자 홀로 남은 황제는 그들이 떠난 자리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둘 모두 이번 대응에 대해선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이 역력했다. 황제가 즉위한 지도 어언 10년이 넘었다.
즉위 당시 자신을 즉위시키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던 권신 사미원이 사라지고, 정청지가 그 틈을 노려 권세를 잡으려 했다. 다행히 완전히 공고하게 되기 전에 단평입락과 고려의 문제 등으로 사숭지를 강화시켜 견제하는 데 성공한 황제는 한가지 깨달았다.
‘역대 권신들과 난신들의 사례를 상고한다면 결국, 좌승상과 우승상도 어느 누구에게도 권력을 집중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신하도 권세가 심해지면 난신이 돼버리는 법이다.’
그렇다고 권신의 정적을 만들어 견제하는 것에서 그칠 생각도 황제에겐 없었다.
이번 사숭지의 대답에서 황제는 더욱 그러한 생각이 굳어졌다.
상인에게 내린 역법은 황제가 은밀히 하사한 것인데 그것을 신하가 눈치채고 그것을 논하는 것이다.
황제가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는 있어도, 어찌 신하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도록 내버려 둔단 말인가. 하물며 그는 사관도 아닐진데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선 군주가 있는 것이며, 군주가 권력을 쥐어야 하는 근본 이유로다. 작금의 천하를 제대로 통치하기 위해선 난신을 막아야 하며 그 업무는 바로 천자인 짐이 우뚝 서야 하는 법밖에 없도다.’
* * *
당 현종이 개원(開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을 때 당나라는 ‘개원의 치(開元之治)’ 혹은 ‘개원성세(開元盛世)라는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지금 고려가 제정한 연호 개원(開原)도 그러한 뜻에서 기반 된 것이라 할수 있다. 백성들과 신료들이 기뻐하는 것에 그것을 알고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칭제건원은 결국 하지 못한 상태다.
연호를 제정하기는 하였으나 공식 존호는 여전히 ‘대왕(大王)’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연호를 제정하긴 하였어도 남송에 보내는 서식에는 연호를 숨기고 있으니 칭제건원이라고 하기보다는 외왕내제의 성격을 더 강화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외부적으로도 변화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외부적, 그러니까 형식상 상국인 남송에서도 고려의 왕에 대한 공식 호칭이 이전까지 ‘高麗國王’ 혹은 ‘高麗王’이었던 것이 ‘大王’이라는 것으로 한 글자 더해졌고, 똑같이 세자였던 나의 직위도 고려에서 기존 사용하던 왕태자(王太子). 그러나 천자국 기준으로 근본이 없거나 거의 참람(僭濫)하다는 수준의 작위로 바뀌고 의전 서열도 높인다는 말은 고려의 위상이 상승한 것은 분명하다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동평왕이라는 작위까지 더하니 그 옛날 중원에서 고구려가 해동을 관리하는 것으로 봐준 것을 방불케 혹은 그 이상의 취급을 공식적으로 인정해 준다고도 볼 수 있기도 하다.
물론 동평왕이니 대왕이니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외교적 말과 글뿐이고, 실상은 남해 아래에는 일본이 있고, 압록, 두만 위로는 몽골과 동요국이 있으며 고려의 명령을 받지는 않았다.
거기다 지난 국교 재수교 이후 현 남송에서 고려보다 의전으로 위인 번국이 있냐고 한다면 또 쓴웃음을 짓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측근들은 지금 연호 제정으로 기뻐하는 신료들과 백성들을 보면 그것은 더더욱 심해진다.
‘조만간 사라질지 모르는 연호인데 저렇게 좋아하니 내가 너무 미안한데.’
조만간 사라진다는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라 확정에 가깝다. 애당초 연호를 사용한다고 시작했을 때 이미 남송의 황제에게 비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은 일이고 말이다.
남송 황제가 이번에 상인을 통해선 비공식적으로 역법과 금나라의 기록 등까지 보내주는 등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이 선물을 줬으니 그 대가 중 하나가 바로 ‘고려의 연호 폐지’ 인 것이다.
정확히는 지금 당장 폐지한다는 것이 아니고, 지금 연호를 제정함으로써 나중에 남송 황제가 남송 내부에서 정치적으로 위험하거나 입지를 높여야 할 때 남송 황제의 신호에 맞춰 폐지하기로 한 것이다.
이게 무슨 짓 거리인가 싶지만 남송 황제의 입장에선 상당히 끌리는 제안이다. 왜냐하면 유교를 국시로 삼는 남송에서 군주의 기본 덕목이자 주요 이념은 ‘덕’이다. ‘덕치’와 ‘예’로 만물을 ‘교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유교에서 바라는 군주의 롤모델이자 방향인 것이다.
그러한 나라에서 감히 연호를 참칭을 하는 이적, 그러나 서하처럼 쉽게 제압하기 힘든 고려를 황제가 덕으로 타일러 연호를 관두게 하는 모습을 만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안 봐도 뻔하지. 덕화로 이적을 설복시킨 황제의 명성은 가히 요순(堯舜)에 필적하게 될 것이고, 사후에는 중원 역사상, 아니 유학의 역사에서 덕을 갖춘 군주의 예시로 두고두고 이름을 남기겠지.’
그리고 그것은 황제의 권위를 공고히 하게 되는 결과를 안겨줄 것이다. 물론 나라 범주로 남송 황제를 위해 연기해 준다는 것은 다소 떨떠름하긴 하다. 그러나 남송이 이번에 우리에게 해준 것은 남송 황제 입장에서도 무리가 있는 것들이다.
그러니 이쪽도 남송 황제의 권위를 굳건하게 해줄 필요가 있고, 그것이 장래적으로 좋다.
어찌 되었든 자원과 물건으로 보답하기에는 우리가 송에게 줄 만한 것이 많지 않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흔쾌히 수락했다는 것은 내 책략에도 수락을 해주겠다는 것일 테니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지.’
* * *
카라콜룸.
“알아보았나?”
“서쪽을 오가는 상인(소그드 상인)들과 지난번 서쪽에서 잡아 온 이들에게도 알아본 결과 과거 서쪽에 멀고 먼 곳에 로마라는 나라가 서쪽을 지배하여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유함을 갖추었다는 말이 전해져 오는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분열되고 줄어들어 동쪽 영토만을 지키고 있으며 그 외에는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친카이의 대답에 오고타이는 눈을 꿈틀거리고는 되물었다.
“그럼 저 너머에 정말로 넓은 땅과 재물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란 말이냐?”
“그들의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모르나 일단 우리의 예상보다 더 많은 나라들이 있고 더 넓은 땅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서쪽에는 광대한 땅이 있다는 구유크의 말을 반신반의하면서 조사한 결과 높은 확률로 사실일지 모른다는 것은 오고타이로서도 서정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문제였고, 친카이 또한 그러한 것을 알고 있어 대칸의 반응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서정(西征)에 계획을 바꿔야겠구나.”
“혹, 연기하거나 취소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려 섞인 친카이의 물음에 오고타이는 고개를 저었다. 남송 정벌을 멈추고, 고려 원정도 멈춘 이유가 무엇 때문이던가? 이미 서정은 취소할 수도, 연기할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니 오고타이가 선택한 것은 연기나 취소가 아닌 속행이었다.
“이번 서정에는 나도 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케 몽골 울루스 대칸의 서정 친정(親征)을 알리는 말이었다.
完
* 작중 고려가 사용했다는 연상(延祥), 정풍(正豐)은 한국의 사서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으나 남송 왕응린이 저술한 유서(類書 유언장이 아니라 일종의 백과사전) 에 나와 있는 기록이라 합니다.
이 기록은 고려가 연호를 사용했으나 한국에는 남지 않았다는 가능성과 그냥 남송이 잘못 알았다는 가능성으로 나뉘는데 양쪽 뭐든 간에 남송에서는 고려의 연호 사용에 대한 썰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