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rauff RAW novel - chapter 353
“이년이! 어디에서 앙탈이야!”
그 남자는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의 얼굴과 몸에 떨어진 과일을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그 남자가 소리를 지르자 연회장의 시선이 일순 모아졌지만 상황을 대충 이해한 그들은 다시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들었다. 그 30대 중반의 남자가 과일을 모두 털어내고 고개를 들어 레나를 보았다. 그는 아직 쓰러져 있는 레나의 은밀한 부위가 눈에 들어오자 다시 표정이 풀어졌다. 레나는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몸을 추스르고 있었는데, 언뜻 보이는 그녀의 속살이 무척이나 선정적으로 보였다. 레나가 미처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전에 곧바로 그 30대 중반의 남자가 레나의 몸 위로 올라왔다.
“아?”
그녀는 무어라고 말하려 했지만 곧 그 남자의 두터운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짓이겨 오는 것을 느꼈다. 미처 어떻게 하기도 전에 그 남자가 레나의 양팔을 잡고 다리 사이로 허리를 밀어 넣었다.
“아악!”
갑작스러운 통증에 레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남자는 사전애무고 뭐고 없었다. 자신의 분신이 레나의 몸속에 들어가자마자 거칠게 허리를 흔들어 댔다. 레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거칠게 자신의 입술과 입안을 탐하는 남자의 구역질나는 혓바닥 때문에 그럴 수조차 없었다. 남자는 자신의 욕정을 레나의 몸에 풀기 위해 격렬히 허리를 왕복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귀족들은 재미있는 것을 본다는 눈을 하더니 곧 자신의 옆에 있는 여자들의 몸을 더욱 더듬기 시작했다. 연회장은 곧 여자들의 야릇한 비음과 남자들의 헤픈 웃음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었기 때문에 레나는 그저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마구 소리를 지르면서 레나의 위에서 허리를 앞뒤로 흔들어 댔다. 그 남자는 곧 그녀의 몸속에 더러운 욕정의 찌꺼기를 내뱉고는 축 늘어졌다. 잠시 숨을 몰아쉬던 그 남자는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짓더니 레나의 몸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는 쓰러져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내버려둔 채 다른 노예소녀를 데리고 연회장 밖으로 나갔다. 레나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다가 눈물을 닦고 일어나, 이미 갈가리 찢어져 버린 자신의 옷을 대충 챙겨들고 조용히 연회장의 밖으로 나갔다. 눈물이 다시 주르륵 흘러 나왔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는 연회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연회가 끝나고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 채 망토 하나만으로 몸을 감싸고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다.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 나왔지만 어떻게 할 수도 없었다. 죽고 싶다는 생각 보다 죽이고 싶다는 감정이 먼저 북받쳐 올랐다.
안으로 들어서니 이곳에 참석하지 않았던 여자 노예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측은하다는 얼굴도 있었고 꼴좋게 되었다는 표정들도 있었다.
“흐흠······제법 검투 실력이 된다더니 결국에는 창녀인가?”
감옥에 있던 계집년들 중에서 하나가 그렇게 비아냥 거렸다.
“이 망할 년! 혓바닥을 잘라 버릴 거야!”
레나는 그 말에 화가 팍 치밀어 올라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보디세아도 같은 비아냥거림에 똑같이 소리를 질렀었다. 같이 들어온 다른 여자노예들이 진정하라고 하면서 레나를 그녀의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때 검투용 갑옷을 갖춰 입은 보디세아가 호페와 함께 감옥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제 나처럼 검투에 나설 때 표정이 없는 보디세아에 비해서 호페는 얼굴이 몇 군데 멍들고 맞아 찢어져 있었기 때문에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보디세아는 레나의 옆에서 잠시 멈추어 섰다가 오른손을 레나의 어깨에 얹고는 아무 말 없이 다시 호페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레나는 영주가 연회의 여흥으로 참석한 귀족에게 돈을 걸게 하고 최고의 검투사라고 하는 보디세아를 출전시켜 자신만의 검투 경기를 가지려 한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이것은 그녀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몸을 씻은 후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을 때 셀레네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이었다.
‘검투 경기라······’
보디세아의 상대는 남자도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일찍 끝나게 된다면 다른 상대를 불러오게 될지도 모른다고도 했다. 레나는 혹시 자신이 보디세아의 상대로 나서게 될 것인가 적잖게 두려워 졌다. 자신이 그녀를 상대로는 절대로 이길 수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보디세아는 이제 한 경기만 이기면 자유의 몸이 되는 친구도 아무런 표정 없이 죽여 버린 적도 있었다.
이것들 모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라고 했었다. 하지만 레나는 자기 자신을 위해 남들을 그렇게 죽여도 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모두 지금의 자신에게는 하나의 사치일 뿐이었다. 이런 사치스러움을 가질 수 없다는 것쯤은 그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셀레네가 내준 질이 낮은 포도주로 목을 축이고 조금 진정하게 되니 기분이 조금이나마 나아졌다. 하지만 보디세아가 경기를 마치고 돌아와야만 오늘 하루도 무사히 넘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 정오에는 게로가 죽었고 그리고 밤에는 자신이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런 것들도, 아니 이곳에서 죽어간 수많은 검투사들도 자신과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녀는 다시 울적해 졌다.
그날 밤 밖에서는 귀족들만의 검투 경기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환호성과 함께 보디세아를 열광하는 소리가 감옥 안까지 들려왔다. 그 소리로 세어 본다면 보디세아는 벌써 5명 이상의 검투사를 해치웠을 것이다.
그때 감옥 속에 다시 한번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페와 함께 영주의 부관의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보디세아의 상대가 부족하다며 다른 누구를 내보내야 한다는 말들을 하고 있었다.
그순간 레나를 비롯한 모두의 가슴이 얼어붙었다. 보디세아의 상대라고 한다면 아마도 자신들을 가르치고 있던 호페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레나는 자신이 선택될까 무척이나 긴장했다. 다행히도 호페와 영주의 부관이 자신의 방을 스쳐 지나가 버리자 정말로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때 안쪽에서 비명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누구인가 선택되자 나가기 싫다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다.
“아?”
뜻밖에도 싫다고 비명을 지르며 끌려 나가는 것은 자신과 같이 연회장에서 시중을 들었던 넬라였다. 머리를 짧게 깎은 여자로서 아마 올해 20세라고 했을 것이다. 검투사로서의 실력은 레나가 보기에도 제법이었지만 보디세아를 상대로는 아마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지금 시합장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자신의 앞에 서면 심장에 검을 받아 버릴 것이 분명한 보디세아이었다.
“뭐하는 거야! 이년아! 빨리 나와!”
부관과 호페가 울며불며 매달리는 넬라를 잡아 질질 끌듯이 끌고 나갔다. 그녀가 끌려 나가자 오히려 감옥의 안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레나도 바닥에 주저앉아 몇 번이고 살았다고 누구에게 인지는 몰라도 감사의 기도를 계속하고 있었다.
넬라가 끌려 나가고 한참이 되었건만 별다른 환호성도 무엇도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시시하게 끝나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얼마 뒤 병사 두 사람이 넬라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모두들 너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들의 팔뚝 사이에 끼워진 넬라를 바라보니, 축 늘어진 채로 다리 사이로 오물을 흘리면서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너무 놀라 실성한 것 같다고 투덜거리는 병사들의 말에 레나는 순간 안타깝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상대가 있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잠시 뒤에 불쾌한 얼굴의 영주가 감옥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무척이나 화가 난 듯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 옆으로 거구의 호페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영주는 그에게 마구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연신 굽실거리는 호페에게 한참을 욕설을 퍼붓던 영주는 감옥 안으로 들어와 사람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이때 영주와 눈이 마주치면 안 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보고 있던 레나는 영주가 자신의 옆에 멈추어 서자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영주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는 호페에게 마구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레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영주와 눈이 마주치자 너무 놀라 재빨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영주는 레나를 잠시 쳐다보더니 입맛을 한번 다시고는 안으로 걸어 들어가 버렸다. 레나로서는 천만 다행인 일이었다. 이제 자신 대신에 다른 사람이 끌려 나갈 것이다.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안도해 버렸다. 그리고 잠시 뒤 안쪽에서 호페가 펄쩍 뛰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 때문인지 몰랐다. 뭐라고 크게 영주 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영주 앞에서 호페가 저렇게 큰소리를 내는 것은 레나로서는 처음 있는 일로 알고 있는 일이었다.
호페가 자신들과 같은 검투사라고는 하지만 그는 엄연한 자유인이었다. 그렇지만 영주의 앞에서 저렇게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한참 동안이나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영주가 부관과 씩씩거리며 돌아 나갔고 안쪽에서 호페가 절규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레나는 무슨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설마 호페가 보디세아의 상대로 나서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아니었다. 뜻밖에도 검투 훈련을 전혀 받지 않는 셀레네가 갑옷과 투구를 입고 끌려 나가고 있는 것이었다.
“아?”
호페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신신 당부하고 있었다.
‘설마?’
레나로서는 뭐라고 말을 할 수 없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져 버린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별다른 환호성도 무엇도 없었고 한참 만에 호페는 울며 들어왔다. 그 뒤로 보디세아도 가죽갑옷 곳곳에 피가 엉겨 붙은 채로 들어왔다. 무표정하게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그녀는 곧바로 레나와 함께 쓰는 방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된 거야?”
레나가 놀라 보디세아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보디세아는 곧 갑옷을 벗더니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짧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레나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혹시 상처라도 입은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그녀의 계속된 물음에 보디세아는 특유의 나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혼잣말을 한 것인지 모를 말이었다.
“나······나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레나는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냉정했던 보디세아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수습되어 돌아온 셀레네의 시신은 마치 자는 듯 평안한 모습이었다. 원래대로 이었다면 대충 끌어다 구덩이에 파묻혀 버리게 될 것을 호페가 가져와 잘 닦아 깨끗한 옷을 입혀 주고 나무관속에 넣어 준 채로였다. 이 모든 작업을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끝마친 그는 그녀의 관 옆에 앉아 조용히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에 넬라가 목을 매 죽어 버렸다. 자신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되었을 셀레네가 죽었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런 괴로움을 끊고 싶어서 이었었는지, 죽어 버렸으면서도 넬라는 울고 있었다. 목을 매단 그녀는 두 다리 사이로 오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초점을 잃은 눈에서는 눈물을 뚝뚝 흘리는 채였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눈은 마치 앞으로 튀어 나올 것같이 쑥 나온 채 이었다. 입에서는 무엇인가 하얀 거품과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들의 상태를 차례로 본 레나와 보디세아는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일상을 시작했다. 하지만 아침에 목욕을 하고 식사를 마친 레나와 보디세아는 둘의 시신이 수습되어 가는 것을 보고는 정말로 길게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 뜻밖에도 호페는 없었다. 이해는 되었지만 그가 밤새 셀레네가 잠든 관을 지키던 모습을 보았던 그녀들로서는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그들이 완전히 나갈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Story. of ‘Rena’. Part. IV.
발바이스제국력 11년 3월이 끝나 가고 이제는 4월에 가을의 수확을 신께 기원하는 축제가 시작되려 한다. 기원의 축제는 파종하기 전 영주민들에게 영주가 신께 제사를 올리고 여흥을 즐기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축제는 일반의 영주의 주민들에게는 매우 기쁜 나날이 되어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 될 것이지만, 노예 검투사인 알리샤 레나에게는 자신의 죽음이 언제나 함께 있게 될 괴로운 시간인 것이다. 수확제의 최고 절정이 검투사들의 시합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망할······’
감옥속 자신의 방에서 레나는 다시 보디세아와 싸워야 할 것인가 걱정되었다. 그간 레나는 꾸준히 보디세아와 검투사 훈련을 했었다. 어느 정도 검을 쓰는 것에 익숙해 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보디세아는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지난 해의 게로처럼 레나도 그렇게 검투장 안에서 죽게 될 것인가 무척 걱정 되었다. 그때 꺼억 꺼억 소리를 내면서 감옥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밖을 내다보지 않아도 호페가 분명했다.
지난 번 사랑하던 셀라네가 죽고 난 뒤 그는 계속해서 술만 마셔대고 있었다. 거구의 호페는 최근 들어 자주 비틀 거렸다. 하루는 영주 앞에서 실수를 해 며칠동안 끙끙 앓아 누울 정도로 심하게 얻어 맞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오늘 또 술을 마신 것 같았다. 호페가 영주의 검투사이기도 했지만 그는 엄연한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술을 마신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저러지?’
레나는 호페가 몇달 동안 계속해서 저렇게 행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의 방을 청소해 주기 위해 들어갔을 때 호페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무엇인가 중얼 거리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셀라네와 대화를 하듯 그의 방에는 셀라네의 옷들이 아직까지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끔씩 새로 들어온 계집들이나 창녀들을 자신의 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셀라네의 옷을 입혀 놓고 그 앞에서 한참 동안이나 세워 놓고 보곤 했다.
한동안 영주에게 뭇매를 얻어 맞고 난 뒤 전과는 달리 제법 열심히 일도 하고 검투사들도 훈련 시켰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오래 가지는 않았다. 단지 영주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았지만 밤에는 거의 날을 새도록 술을 마시고 이렇게 꺼억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감옥안을 휘젖고 다녔다.
‘정말로······’
호페가 셀라네를 얼마나 사랑했으면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곳에 처박혀 있지 않았다면 그녀도 이제 어엿한 처녀로서 어디로 시집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들 보고 싶어······’
엄마와 에인샤가 지금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레나는 그들을 걱정할 틈도 없이 자기 자신의 죽음을 걱정해야 했다. 기원의 축제가 되어 검투사 시합을 열게 되고 만일 보디세아와 맞붙게 된다면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그 누구라도 해도 보디세아는 자신의 앞에서 검을 들고 서게 된다면 주저없이 상대를 찔러 버릴 것이다. 레나가 걱정인 것은 파티장에서 그 젊은 남자에게 강제로 당한 이후 영주가 자신을 찾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영주의 마음에 들어 있으면 보디세아와는 함께 세우지 않을 것이지만 지금은 영주가 아마도 자신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는 밤에 끌려가서 영주의 마음에 들려고 온갖 더러운 짓을 하지 않아도 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자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젠장······’
다시 영주의 마음에 들어 보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레나는 그러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차라리 죽을 지언정 그런 녀석을 위해서 다시 봉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이제 자신이 죽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 졌다. 조금이나마 더 살고 싶은 것은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어디에서 살고 있을 것인 어머니와 에인샤를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이들과 다시 만나려고 레나는 이곳에서 살고 있었다. 이렇게 스스로를 다짐하면서 무슨 일을 당하든 모든 것이 헤어진 어머니와 에인샤를 만나기 위한 일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 것이다.
그때 쇠사슬 소리와 함께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처음 듣는 발소리에 귀가 솔직해 졌다. 그리고 호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혹여 호페가 새로이 창녀라도 데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호페는 영주가 직접 데리고 자는 보디세아를 제외하고 이곳에 들어온 여자 노예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호페는 셀라네가 죽은 이후 가끔씩 창녀들을 사 들여왔다. 그리고 거의 밤새도록 섹스를 했다. 밤새도록 창녀가 소리 지르는 것이 온 감옥 안에 울려 퍼질 정도로 시끄럽게 만들었다. 지난번처럼 창녀를 불러 놓고 셀라네의 옷을 입혀 놓고 감상하다가 또 그럴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레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니 별별 생각이 다 들었기 때문이다.
‘죽게 되는 건가?’
그렇지만 레나는 죽고 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날밤 호페에게 누군가 찾아온 것 같은 이후 호페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몇일 동안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셀라네가 죽기 전까지의 그런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는 새로이 들어온 검투사 계집애들을 열심히 훈련시키고 남자 검투사들도 직접 조련시켰다. 훈련장에서 호페가 직접 계집애들을 상대로 싸워 새로 들어온 노예 10명을 찔러 죽여 버렸다.
레나는 호페가 너무 흥분해 있다는 것에 무척이나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계집애들 한 10명을 죽여 버리고 나서 사내들의 검투훈련장으로 가서 남자들도 여럿 베어 죽여 버렸다.
레나는 이것과 함께 보디세아도 평소와는 다소 달라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보디세아도 함께 나와 있는 자리에서 레나를 가르치다가 레나에게 혼자 연습을 시키고 난 뒤 다른 여자 노예들과 모의 시합에 들어갔다.
목검으로 서로 시합을 하는데 상대 검투사도 제법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보디세아는 이날 따라 처음부터 과격하게 나서더니 일격에 상대 검투사의 목검을 부러뜨리고 다음번 일격으로 팔을 부러뜨린뒤 머리통을 목검으로 마구 내리찍어 버렸다.
머리가 깨진 상대가 목검에 맞아 죽을 때까지 보디세아는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온몸을 피로 뒤집어 쓰고 나서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보는 다음 검투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되돌렸다.
레나는 보디세아가 정식 검투장이 아닌 연습장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혹시 그 전에는 있을지 몰라도 자신과 함께한 시간 동안에는 그런 경우가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머리통을 으깨버려 이미 숨이 끊어졌지만 죽은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여자의 시신을 내려보고 있던 보디세아는 피에 잔뜩 절어 있는 목검을 내던져 버리고는 짧게 혀를 찼다.
그날 저녁 레나는 조심해서 보디세아에게 요즘 너무 흥분해 있는 것 같다고 걱정을 해 주었다. 적어도 보디세아가 자신에게 만은 그렇게 과격하게 굴지 않는 다는 것을 생각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조심해서 건넨 말이었다.
“내가 그래?”
보디세아는 피식 웃기만 했다. 레나가 그런 것 같다고 말하면서
“너무 무서워 진 것 같아······”
이렇게 걱정을 하니 보디세아는 한참 동안이나 빤히 레나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그녀쪽으로 바짝 얼굴을 들이 밀었다.
“너 내가 왜 이렇게 무서워 졌는지 알고 싶어?”
무척이나 낮고 잔뜩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지만 듣고 있던 레나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틋한 목소리였다.
“으? 응······”
보디세아는 다시 고개를 들면서 빙긋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레나의 손을 움켜 잡았다. 너무 세게 잡아 무척이나 아팠다.
“아퍼!”
레나가 짧게 투덜거리자 보디세아는 헤헷 웃으면서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레나를 데리고 호페의 방으로 향했다.
가끔씩 여자 노예들이 호페의 방을 청소해 주기 위해 들어왔고 레나도 몇번 호페의 방을 청소해 주려고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자유인이었지만 노예 검투사의 대장으로서 이곳 감옥 안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하고 있었다. 자유인인 호페의 방은 무척이나 넓고 가구들도 많았다.
“보디세아? 레나는 왜?”
호페의 방으로 들어서니 거구의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보디세아는 피식 웃으면서
“이번 일에 레나도 끌어 들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호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참 동안 레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좋아······레나. 자리에 앉아봐······”
호페는 보디세아가 믿는 사람이면 자신도 신뢰할 수 있다고 대답하면서 레나에게 한참 동안이나 뜸을 들이다가 무서운 말을 해 주었다.
“나 이 영주 놈을 때려 죽일테다······셀라네의 복수를 할꺼야······”
레나는 호페의 눈동자가 불타 오르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무서웠다. 그리고 보디세아는 영주의 노예이면서도 이런 호페와 뜻을 같이한 것 같았다. 레나로서는 이들이 자신을 끌어 들인 일에 대해서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일까? 하지만 레나는 호페야 셀라네의 복수라고 해도 보디세아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호페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침대의 시트를 밀어 젖혔다. 그 아래에는 그리 크지는 않은 검은색 상자가 있었다. 그가 그것을 열자 안에는 금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금화들이 전부 절반으로 갈라져 있었다. 레나의 눈이 휘둥그래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