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19
교랑의경 119화
진씨 자매를 보낸 시녀는 정교랑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아씨.”
시녀가 정교랑 앞으로 가서 앉았다.
“아씨, 아씨의 글씨가 그렇게 훌륭한 거였어요?”
시녀가 웃으며 물었다. 진십팔랑이 자신은 잘 모른다고 했지만, 진십팔랑의 말은 다른 이가 정교랑의 글씨를 보고 묘사한 게 틀림없었다.
“글씨일 뿐인데, 잘 썼으면, 어떻고, 못 썼으면, 또 어때?”
정교랑이 물었다. 그야 그렇지만……. 시녀는 멈칫했다가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죠, 아니에요. 좋으면 좋죠. 꼭 어쩌자는 게 아니더라도요.”
정교랑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씨.”
시녀는 또다시 입을 열며 눈웃음을 지었다.
“소인은 이제야 알겠어요. 반근 낭자가 떠날 때 왜 그리 슬퍼하고 아쉬워했는지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시녀를 쳐다봤다.
“왜 그랬는데?”
시녀는 풉 소리 내어 웃었다.
“아씨, 반근 낭자는 아씨한테 요리하는 법을 배웠는데, 소인은 아씨 곁에서 뭘 배워야 좋을지 모르겠네요. 배워야 할 게 너무 많아서요.”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시녀를 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는 걸 배워.”
입을 가리고 웃던 시녀는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췄다. 아무것도 안 하는 무위(無爲)의 도는 도교 이 진인의 도가 아니던가. 아씨께서 정말 신선을 만나 이 진인에게 가르침을 얻으셨나?
* * *
“병을 안 고친다고?”
신선거. 평복 차림의 사내는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 병이 났다고 합니다. 인화당의 의원도 사실 확인을 해 줬고요. 아무래도 신선을 만난 건 아닌가 봅니다.”
두칠의 말에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신선? 요즘 세상은 참 신선도 못 해먹겠다. 무슨 일이든 신선을 붙잡고 늘어지며 덕 좀 보려고 난리니.”
사내는 토끼고기를 탕에 넣고 흔들었다가 양념장을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옆에 앉아 있던 관기가 손수건으로 입가에 묻은 양념장 자국을 닦아 주었다.
“주씨 집안에서 가진 게 만병을 치료하는 비술은 아닌가 보구나.”
사내는 또 다른 관기가 올리는 술잔을 받아 한 모금 마시고 감탄을 내뱉었다.
“회선루의 술맛은 과연 으뜸이로다.”
“네, 네, 할아버님. 이 술을 들인 후로 장사가 더 잘되고 있어요.”
두칠이 얼른 웃으며 말했다.
“주씨 집안에선 아무도 안 왔지?”
사내가 물었다.
“네, 그날 이후로는 아무도 안 왔습니다.”
두칠은 말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 여인 말처럼 그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건가? 그래서 주씨 가문도 개의치 않고? 그때는 개의치 않았다지만 신선거의 장사가 점점 잘되는 걸 보고도 그럴 수 있나? 이 세상에 돈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본디 자신이 벌어야 할 돈이었다면 더더욱. 말도 안 된다. 마음을 꾹 억누르며 움직이지 않는 거라면 더 대단한 사람인데.
두칠은 더욱 공손하게 웃었다.
“할아버님이 계시니, 주씨 가문도 눈이 먼 게 아니고서야 어쩔 수 없겠죠.”
“그렇다면 다행이고.”
사내가 웃었다.
주씨 가문에서 눈이 벌게져서 이 일을 문제 삼으러 찾아왔다면, 눈이 벌게진 병을 고쳐 줄 방법은 물론 있었다. 하지만 성가신 일이었다. 어쨌거나 관직에 몸을 담고 있기도 했거니와 인맥을 동원하려면 곡절이 생기기 마련이니. 보아하니 주씨 가문의 비술도 그저 그런 것 같은데 재물까지 들여가며 애쓸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고. 주씨 가문에서 눈치 있게 굴면 성가신 일이 많이 줄 터였다.
“전에 하던 가게는 팔았다고?”
사내가 홀가분한 마음으로 물었다.
“네, 할아버님. 팔았습니다.”
두칠은 신이 난 목소리였다. 사정을 잘 아는 이면 4~5천 관에 샀을 식당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외지 사람을 만난 덕에 크게 한몫을 챙기게 됐다.
웃음이 번지려는 찰나 마음이 떨려 왔다. 앞에서 관기의 시중을 받으며 술을 마시는 사내를 보고 있노라니 얼굴에 있던 웃음기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흡사 누군가가 피를 빨아들이는 듯이.
“할아버님, 이번 달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인편에 배당금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사내는 그래, 하고 대꾸하고는 흡족하게 고기를 집어 탕에 넣고 흔든 후 입으로 가져갔다.
* * *
2월 보름. 눈이 몇 번 더 내린 후 경성의 날씨가 화창해졌다. 쌀쌀한 공기 속에 차츰 봄기운이 느껴졌다.
진십팔랑의 마차가 중문에 멈춰 서자 여종 둘이 얼른 나와 맞이했다.
“아씨, 서두르세요. 부인께서 입궐하시는 길에 아씨를 데려가신대요.”
입궐? 진 부인은 연말에 국부인(國夫人)으로 책봉됐다. 품계와 신분은 결코 낮지 않았지만 황족이 아닌지라 큰 명절을 맞아 알현하러 갈 때를 제외하면 황궁은 함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무슨 일로 입궐을?”
진십팔랑은 놀라며 서둘러 마차에서 내렸다. 두 여종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삼갔다. 저쪽에서 이미 고명복으로 갈아입은 진 부인이 걸어오자 진십팔랑이 얼른 다가갔다.
올케는 임신 중이라 태교가 중했다. 아이를 키우기 힘든 시절이라 순조롭게 출산하는 건 열에 다섯이고, 다섯 중에서도 둘은 요절하곤 했다. 그래서 온 가족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고 집 밖에 나가는 일은 딸들이 함께했다.
진 부인은 딸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딸은 여전히 정교랑의 옷을 따라 지은 소매가 넓고 품이 큰 옷을 입고 있었다.
“옷은 안 갈아입어도 되겠다.”
진십팔랑은 네 하고 대답한 후 모친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마차에 탄 후에야 진십팔랑이 물었다. 진 부인은 웃으며 나지막이 대답했다.
“현비(賢妃)께서 회임을 하셨어.”
궁중 비빈의 회임은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경사였다. 가뜩이나 손이 귀한 황실에 황제까지 병을 얻은 터라 조정의 인심이 흉흉했는데, 비빈의 회임 소식이 들려왔으니 실로 기쁜 일이었다.
“그럼, 외명부 부인들이 축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이해할 수 없는 듯 물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데. 황후가 아이를 낳은 것도 아니고. 진 부인이 방금 전 두 여종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현비마마께서 음식이 입에 안 맞아 갑자기 참새가 드시고 싶으시대. 황궁 숙수들이 만들어 올렸지만 마음에 안 들어 하셨다더구나. 나더러 숙수를 데리고 가 직접 만들어 주라는 태후의 전갈이 왔어.”
진십팔랑의 표정 역시 묘해졌다. 웃고 싶은데 감히 웃을 수 없었다.
“현비마마께선 참 지극한 총애를 받으시네요.”
진십팔랑이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황제가 동의한 일이 분명했지만 천자가 돼서 신하에게 숙수를 보내라고 직접 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다간 어사언관(御史言官)이 떠들어댈 게 뻔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이리 일찍 돌아와?”
진 부인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진십팔랑은 그날 집으로 돌아와 정 낭자와 함께 독서를 하겠다고 했다. 정교랑이 책 읽는 걸 즐겨 듣는다는 사실은 진소 부부도 잘 알았다. 그래서 진십팔랑이 정교랑에게 가 책을 함께 읽는다는 줄 알고 자연스레 동의했다.
“낭자는 어릴 때부터 사정이 딱해 경성에서도 가까이 지내는 형제자매가 없을 텐데, 그래도 너랑 가까이 지내려 하는구나. 가 보거라.”
진십팔랑은 부모의 오해에 딱히 해명하지 않고 말을 얼버무리며 알았다고 했다.
“정 낭자가 오늘 외출한다면서 내일 오라고 했어요.”
“어딜 갈 데가 있다고?”
진 부인은 궁금해했지만 진십팔랑이 고개를 가로젓자 더는 묻지 않았다. 마차는 어느덧 황궁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현비는 태교에 힘쓰기 위해 태후의 궁에 머물고 있었다. 전갈을 들은 태후가 즉시 일어나려고 하자, 고개를 숙인 채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년이 먼저 일어섰다.
“위낭(瑋郞), 넌 먼저 돌아가거라.”
태후가 소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소년이 예를 표했다.
“그리고 다신 궁을 떠난단 말을 입에 올리지 마. 네 부왕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상관없다. 네 부왕도 황실 사람인데 꺼릴 게 뭐 있느냐. 염려 말고 궁에서 지내다가 내년에 대황자와 함께 출궁하거라.”
태후가 주변 궁인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누구든 진안 군왕의 출궁을 함부로 입에 올렸다간 쫓아내 버리겠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자 궁인들은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소년은 다시 예를 올린 후 물러갔다. 기분이 좋아진 태후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옆에 있던 늙은 궁인의 팔을 붙잡았다.
“역시 저 아이는 복덩이야. 이번에도 돌아오자마자 황상의 병세가 좋아지고 현비도 회임을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저 애를 궁에서 내보내 봉지로 가게 하라는 진언을 올리는 이가 있다니.”
태후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진언을 올리는 이가 무슨 꿍꿍이인지 본궁이 모르겠느냐? 혜귀비(惠貴妃)의 가족더러 얌전히 지내라고 해라.”
궁인들이 네 하고 대답하자 태후가 표정을 풀었다.
“진씨 가문의 참새가 그리 맛있다지? 본궁도 먹어 봐야겠다.”
태후는 웃으며 문을 나와 안쪽에 있는 궁으로 향했다.
정문으로 나오던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추고 다소 기이한 표정으로 측문을 쳐다봤다. 궁녀 둘이 두 여인을 안내해 안으로 들어간 참이었다. 앞쪽 외명부 여인의 예복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외명부 여인 옆에서 걷던 소녀도…… 눈에 띄었다. 뒷모습일 뿐이었지만 그런 의복은 진안 군왕이 지금껏 살면서 딱 두 번 본 것이었다.
처음 본 건 늑대 떼가 사방에서 포효하던 모닥불 근처였다. 밤바람이 그 소녀의 두봉을 스치자 불빛 아래로 보이는 암회색 옷이 유독 눈에 띄었다.
“군왕?”
궁인이 나지막이 부르자 진안 군왕이 시선을 거두고 걸음을 내디뎠다.
“누구지? 현비마마의 가족인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물었다.
“아닙니다. 이부 진소 상공 댁의 가족입니다.”
궁인도 웃으며 대답했다. 소년 군왕의 밝고 명랑한 웃음을 보고 있노라면 쌀쌀한 한기가 한결 덜했다.
“아, 진씨 가문.”
진안 군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긴 눈썹이 저도 모르게 꿈틀거렸다. 이런 인연이? 또 만나다니. 밖을 나다닐 땐 아무렇게나 입어도 상관없다지만 귀인을 뵈러 입궐하면서도 저리 어두운 색의 옷을 입는 걸 보면 과연 기이했다. 진안 군왕이 빙긋 웃었다.
불이 붙은 모닥불 속으로 죽통을 던지자 여기저기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귀를 막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가 문 앞에 선 사내들에게 공수하며 무어라 말했다.
거리가 멀어 내용까지 들리진 않았고, 사람들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들어간 후로는 동작도 표정도 볼 수 없게 됐다. 다만 깃대에 달린 깃발이 2월의 찬바람에 흔들리면서 함께 나부끼는 ‘태평거’라는 세 글자는 멀리서도 보였다.
“아씨, 안 들어가 보세요?”
시녀가 기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며 옆에 선 정교랑에게 물었다.
“아씨의 가게가 개업하는 거잖아요.”
“여기 있으나, 저기 있으나, 똑같지.”
시녀는 웃으며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다가 땅 위에 올라온 풀을 보며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냈다.
“싹이 났네요. 아씨, 이것 좀 보세요.”
정교랑은 두모로 얼굴을 반쯤 가린 채 고개를 숙여 쳐다봤다.
“그래, 봄이 왔구나.”
태평거 앞의 뜨거운 열기는 금세 사라졌다.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구경하러 왔던 이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들어가는 이가 없었다. 길 위에는 사람과 마차, 말이 끊이지 않았지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길을 재촉하거나 힐끔 쳐다보고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반근.”
정교랑이 불쑥 불렀다. 아직 풀을 보고 있던 시녀가 얼른 일어나며 네 하고 대답했다.
“너희 노태야께서, 돌아오셨나 가봐.”
정교랑의 말에 시녀는 깜짝 놀랐다. 처음 이 아씨의 시중을 들게 되었을 때, 이 아씨는 종잡을 수 없이 기이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눈치를 살피고 의중을 알게 됐다. 표정은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 말뜻을 헤아리면서 아씨의 생각도 대강 알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경성에 올라온 후부터는 달랐다. 아씨와 차츰 호흡이 잘 맞게 된 것과 별개로 심중은 점점 더 헤아릴 수 없었다.
이를테면 아씨가 처음에 안 고친다고 했을 때, 죽을 사람만 치료만 한다는 건 짐작조차 못 했다. 도련님들에게 이 식당을 사들이라고 한 일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위해서인지 도련님들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그 숙수를 위해서인지, 또 아니면 한 공자의 선의에 보답하기 위해서인지 알 길이 없다.
아씨가 지금 하는 말은 먼 훗날에야 어떤 일과 들어맞았다. 시녀는 말이 적으면 단순하다고 여긴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말이 적을수록 단순하지 않았다.
지금껏 아씨는 그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고 차분히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지금 갑자기 노태야를 입에 올리다니, 혼자서는 해결 못 할 일이라도 만난 건가? 무슨 일이지? 시녀는 긴장되고 겁이 났다.
“네.”
시녀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