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139
교랑의경 139화
“그러니까, 진(秦)씨 가문이다.”
주 노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육낭과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기도 하고 우리 집안과도 왕래가 있었으니, 교교 너도 본 적이 있을 게다.”
“그 절름발이요?”
시녀가 불쑥 입을 열자 주 노야는 무안한 듯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절름발이라니, 치료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주 노야는 목소리를 낮춰 대꾸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이따금 느껴졌다. 이렇게 대문 앞에서 혼사 얘기를 하는 경우가 어디 있나.
“들어가서 얘기하자.”
“됐어요. 그 집안이라면, 더 얘기할 것도 없습니다. 거절하세요.”
주 노야는 경악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볼게요.”
정교랑이 걸음을 옮기며 나가려고 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주 노야는 급히 막아섰다.
“교교, 무려 진씨 가문이다. 넌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진씨 가문은…….”
어려서 잘 모른다? 이 애가 일부러 꾸민 짓이 아니었나?
“반근.”
정교랑이 반근을 불렀다. 곁에 있던 시녀가 얼른 눈치채고 돌아섰다.
“진씨 가문은 천주(川州)의 명문가로 삼 대에 걸쳐 총 열아홉 명의 진사를 배출했어요. 종가의 진중(秦中)은 평원 팔 년에 진사에 급제하고 공주와 혼인했으며, 경성에 공주부도 하사받았죠. 현재 차남 진안(秦安)은 진중의 적손으로 팔품 조정 관료입니다. 부인 역시 분주(汾州)의 부(富)씨 집안 따님이시고요. 육공자께서 가깝게 지내는 분은 진안의 넷째 아들로 집안에서 항렬은 열셋째예요.”
시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읊어댔다. 주 노야는 시녀의 모습에 놀라 헙, 하고 숨을 들이켰다.
역시 부인 말이 맞았군. 집안 내력까지 이토록 소상히 조사했다니. 이름이 뭐고 어느 해에 공주와 혼인했는지까지 다 알잖아. 역시 이 바보를 만만하게 봐선 안 되겠군. 아니지, 아니지. 이 바보는 방금 거절하라고 했는데? 동의한 게 아니라?
“교교…….”
정교랑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주 노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노야,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휘장을 내리며 말했다.
마차를 불러세워도 소용이 없으니, 주 노야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멍하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쾅 소리가 났다. 사환은 어느 틈에 안으로 들어갔는지 누가 들어오기라도 할세라 잽싸게 문을 걸어 잠갔다.
이게 무슨 일이야!
명색이 외숙이라는 자가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으로 전락한 것도 모자라, 물 한잔은 고사하고 문전박대까지 당하다니. 무엇보다도 혼사를 일언지하에 거절하지 않았는가.
거절했으렷다?
주 노야는 수염을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왜?
주씨 저택의 대문으로 들어서던 진 공자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대문 앞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이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사람들이 예의가 없네.”
사환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공자께서 주씨 가문과 왕래하며 지낸다지만, 어쨌거나 진씨 가문의 사람이다. 어엿한 진씨 가문을 감히 주씨 가문 따위가 업신여기다니. 절름발이라고 비웃는 것 또한 안 될 일이었다. 그렇다. 남들이 이상한 눈빛을 보낸다면 그것은 필시 공자의 다리 때문이었다.
진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사환을 꾸짖었다.
“남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내가 이상한 것이 먼저다. 그간 주씨 저택을 수차례 드나들었지만, 아랫것들이 오늘같이 예의 없는 경우는 없었다. 오늘 유독 다른 걸 보면 내 다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연유가 있는 게로구나.”
사환은 그제야 깨닫고 얼른 네, 하고 대답했다.
“하늘은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괴롭힐 뿐이지.”
진 공자는 가마의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말을 이었다.
“남이 괴롭히는 게 아니라면, 스스로가 자신을 괴롭게 하지. 조금 전처럼 남의 시선을 이상하다 느껴 부아가 치밀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단정을 짓고 진짜 연유를 알아보지 않아. 그러다 시일이 흘러 깨닫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또 하늘 탓을 하지. 진실은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고 싶어 하는 자에게만 보일 것이다.”
사환은 들으면서도 알쏭달쏭했지만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윗전은 어릴 때부터 거동이 불편했기에 보통 사람들보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가마가 주육낭의 거처에 도착했다. 주육낭은 전갈을 듣고 회랑 아래에 나와 서 있었는데, 주육낭도 표정이 좀 이상했다.
“사소한 일이 아닌가 보네.”
진 공자가 웃으며 사환의 부축을 받아 안으로 들어왔다. 주육낭이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가, 여길, 왜 왔어?”
“내가, 여길, 오면 안 되나?”
진 공자가 주육낭을 빤히 보면서 물었다. 그러면서 무엇 때문에 자신이 여길 오면 안 된다는 건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보았다.
“무슨 일로 왔든 간에, 혼담을 넣었으면 지켜야 할 예절은 지켜야지. 지금 자네가 이 집에 오는 건 적절치 않아.”
주육낭이 껄끄러운 표정으로 낮게 읊조렸다.
이런 일을 사내대장부가 입에 올리기엔 좀 껄끄럽잖아? 남녀 사이의 일인데, 껄끄럽지. 주육낭은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 공자는 놀라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주육낭이 지금껏 진 공자를 알고 지내면서 이런 표정을 본 것은 딱 두 번뿐이다. 첫 번째는 주육낭이 정교랑과 함께 밥을 먹고 오는 길에 마주쳤을 때였다.
두 번 다 그 여인 때문이다. 아마 이런 것들이 여인네들이 떠들어대는 인연이겠지.
“뭐가, 뭐가 됐든 간에 말이야. 십삼, 앞으로 그 애를 잘 대해 줘.”
주육낭은 멋쩍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그 애가 영악하고 계략에 능하긴 하다만, 의지할 곳이 없다 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니겠어. 그러니 자신이 의지할 곳을 찾고 싶었겠지. 자네가 그 의지할 곳이 돼 준다면, 그, 그 애도 안정을 찾지 않겠나.”
말을 마친 주육낭은 고개를 들어 진 공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진 공자의 모습을 보자 순간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네가 이렇게 나서지 않아도 될 일이었어. 내가 하면 되는 것을, 왜 혼자 초조해져서 나서고 난리야!”
주육낭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진 공자가 실소를 터뜨렸다.
“자네가 이렇게 구구절절 한참을 말하긴 했는데, 도대체 내가 뭘 했는지부터 먼저 알려주면 안 되겠나? 혼담이라니, 누가?”
주육낭은 인상을 쓰며 그에게 물었다.
“지금 누구한테 묻는 거야?”
“당연히 자네한테 묻는 거지.”
진 공자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게 힘들었는지 회랑 아래에 털썩 걸터앉았다.
“내 사촌누이에게 혼담을 꺼낸 게 아니었나? 아직 혼사도 결정 나지 않은 마당에 이렇게 불쑥 찾아오면 어떡하라는 거야.”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진 공자의 반대편에 앉자 진 공자가 다시 지팡이를 짚고 일어났다.
“주육낭, 자네 지금 농담하나?”
3월의 날씨는 아직 서늘했지만, 주육낭은 몸에 오른 열기를 쫓으려 손으로 부채질을 해댔다.
“그럼 지금, 자네는 아직 모른다는 말이야?”
회랑 아래에서 시중을 들던 몸종과 진 공자의 사환은 멀찍이 물러서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회랑 아래에 좌우 양쪽으로 앉은 채였다.
“알았다면, 내, 내가…… 이런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진 공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난 정말이지, 내 어머니께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
예전에도 진 공자의 모친은 그에게 온갖 기괴한 민간요법을 행하고는 했다. 진 공자를 어르고 달래 가며 재를 태운 물을 탕약으로 지어 먹이거나, 어디서 구해온 건지 집안의 악귀를 쫓아낸다는 물건들을 진 공자의 방 안에 몰래 두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진 공자가 열 살이 되기 전에 행한 것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일을 할 때면 매번 진 공자의 비위를 맞춰 줘야 했다.
하지만 열 살이 넘자 더 이상 어르고 달래는 정도에 넘어가 주지 않을 걸 알았는지, 아니면 아들이 호전될 거라는 기대를 버린 건지, 모친은 그 이후로 기괴한 민간요법 따위를 행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 동안 잠잠했던 모친이 갑자기 이렇게 나오다니.
소란이 있었던 날, 정교랑은 진 공자의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진 공자는 이 일을 모친에게 숨길 수 없으리라 예상했다. 애초에 숨길 생각도 없었다. 모친이 자신을 불러 에둘러 묻거나, 다른 이유를 들어 정교랑을 청해 오면 그때 모친께 확실히 설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모친이 이렇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사람을 집안으로 들이겠다고 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모친은 악귀를 쫓기 위해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던 석상보다 사람 하나를 집안으로 들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거라고 여기시는 거겠지.
“내가 방심했어. 오랜 시간이 흘렀으니 어머니께서 집착을 내려놓으실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진 공자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랬던 거였군. 주육낭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흠칫 놀랐다. 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거지?
“그런 일을 누가 쉬이 포기할 수 있겠나.”
주육낭이 조용히 말하다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강주에서 온 그 바보 때문에!”
진 공자는 주육낭의 모습에 또 웃음이 났다.
“자네랑 이렇게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야. 어서 이 일부터 해결해야지. 안 그럼 나중엔 정말 입도 못 열게 될 거야.”
진 공자는 몸을 일으키다가 멈칫했다.
“아, 우선 정 낭자부터 만나서 설명을 해야겠어. 자네가 가서 통보 좀 해줘.”
진 공자의 말에 주육낭의 표정이 다시 묘해졌다.
“이제, 여기 안 살아.”
그 말에 진 공자는 다시 한번 놀랐다.
“이 일 때문에 화가 나서? 정 낭자는 이런 일로 쉽사리 화를 낼 사람이 아니지 않나?”
주육낭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진 공자가 주육낭의 얼굴을 훑어보고 물었다.
“육낭, 방금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됐다고 한 말, 자네가 나서려고 그랬던 거였군. 그렇다면 혹시, 자네가 이미 일을 저지른 거야?”
속내를 들킨 민망함에 주육낭의 얼굴색이 눈에 띄게 붉어졌다.
“그래, 맞아. 정교랑이 집을 나간 건 자네와 무관한 일이야.”
진 공자는 그 말을 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이 녀석, 어떻게 몸으로 때울 생각을 해? 어쩌다 그런 생각을 해낸 거야?”
진 공자는 다시 제자리에 앉으면서 덧붙였다.
“혹시 일찍부터 정 낭자를 마음에 두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 한마디에 주육낭은 꼬리를 밟힌 짐승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야, 아니라고! 다 자네를 위해서 그런 거였어. 자네만 아니었으면 그런 애 거들떠볼 일도 없어!”
주육낭은 눈을 치켜뜨고 붉어진 얼굴로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진 공자는 미소를 머금고 주육낭을 쳐다봤다.
“아니면, 제일 좋고.”
진 공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진 공자의 얼굴에 웃음기가 가시더니 엄숙하고 연민 어린 표정이 드리워졌다.
진 공자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아니면, 제일 좋아.”